서몽
# 023. 세상에는 감출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사랑, 미인, 그리고 돈이다.
음력 1월 1일 당일.
나는 리안과 함께 춘절 파티에 참석했다.
“생각보다 규모가 더 큰데?”
시내 호텔 연회장을 빌린 파티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규모가 컸다.
“오늘만 이런 비슷한 규모의 파티가 몇 곳에서 열려. 여긴 그중 하나일 뿐이야.”
리안이 말했다.
내가 파티장에 들어서자 몇몇 참석자들이 나를 보며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반년 동안 홍콩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마도 리안과 함께 참석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남자와 함께 와서 그런 거야···. 아니면 리안 너와 함께 참석해서 그런 거야?”
내가 물었다.
“후자겠지? 생각보다 이런 파티 참석자들은 매번 뻔하거든···.”
참석자 중에는 나도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내가 아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유명 연예인이거나 신문에 날 정도의 유명 인사들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상대를 알지만, 상대는 나를 모르는 그런 사이였다.
“나는 먼저 인사드릴 사람이 있어서 잠시 가볼게.”
리안은 말을 마치자마자 파티장 사이로 사라졌다.
리안으로서는 이런 파티에 나와 초대해 준 것만으로도 큰 배려를 한 것이었다.
내가 그에게 팀을 이루자고 한 것에 대한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홍콩에 온 지 반년이 지났지만 이런 상류층 파티는 처음이었다.
일반적인 홍콩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홍콩에서 10% 안에 든다고 한다면 여기 모인 사람들은 0.1%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반년 동안 류오린에서 받은 연봉과 성과급을 합하면 50만 불 정도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반 이상은 50만 불 정도를 자식들에게 용돈으로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형식적인 인사라도 나누고 안면을 익혀두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이번 기회를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리안은 인사를 한다면서 나를 뒤에 남겨두고 떠났다.
이번에는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해 줄 생각은 없다는 의사표시였다.
리안에게 아직 내 가치는 그 정도라는 의미였다.
내 능력을 그나마 알고 있는 리안이 이럴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은 그냥 파티에 참석한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잠시 서 있던 나는 손에 잔을 하나 집어 들고 파티장을 둘러보았다.
파티는 굉장히 화려했지만,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썰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참석자들이 노골적으로 무리로 나뉘어 서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파티에 무리가 나뉘는 일은 흔한 일었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서로 날을 세우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파티가 흔하지 않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홍콩은 이런 파티에 익숙한 도시였다.
나는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최근에 정신이 없었다지만 일 년에 가장 큰 파티의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큰일을 몰랐다는 것은 내 실수였다.
누군가 말을 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분위기가 좀 그렇죠?”
나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20대 초중반 정도의 미모의 여성이었다.
“장샤오이(張少慧)라고 해요.”
“에드릭 손이라고 합니다.”
상대가 이름을 먼저 밝히자 나도 이름을 밝힐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에 홍콩행정부의 수석비서관인 앤디 찬이 사임한다고 이야기한 것 때문에 이곳 홍콩 출신인 분들이 상당수가 불안해하는 것 같더군요.”
“아···.”
나도 알고 있는 뉴스였다.
앤디 찬은 홍콩행정부의 수석비서관이었다.
홍콩행정부에서 수석비서관이라는 지위는 이름과는 달리 홍콩행정부의 이인자였다.
앤디 찬은 마지막 홍콩 총독이었던 크리스 패튼이 있을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홍콩이 중국 일부가 되기 전 과거의 홍콩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홍콩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졌다.
그런 앤디 찬이 현재 홍콩 행정장관인 둥칭화와의 권력다툼에서 패해서 사실상 강제로 물러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 둥칭화 뒤에는 바로 중국 정부, 정확하게는 중국 공산당의 입김이 있었다.
앤디 찬의 사임을 중국 공산당이 허용한 것은 중국이 본격적으로 홍콩 행정권을 장악하려는 신호탄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다.
내가 바로 파티 분위기를 망친 이유를 떠올리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내가 홍콩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홍콩인들이 중국에 대해서 느끼는 불안을 내가 똑같이 느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홍콩 출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다른 지역 출신이신가 보네요?”
내가 물었다.
“베이징에서 왔어요. 태어나기는 충칭에서 났고요.”
예상한 그대로 그녀는 본토 출신이었다.
본토 출신으로 이런 파티에 참석했다면 집안이 대단하다는 의미였다.
“충칭이라면 그 미녀의 고장이라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직접 보니 이렇게 장샤오이 씨를 만나니 그 이야기가 사실인가 보네요.”
미녀라는 칭찬은 많이 들었겠지만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고맙네요.”
상대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우리는 잠시 홍콩의 날씨 이야기를 나누었다.
추운 베이징에 있다가 홍콩에 오니 따뜻해서 좋다는 뭐 그런 이야기였다.
얼마 후 그녀는 다른 참석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떠났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누군가 다가왔다.
“누구야?”
리안이었다.
“충칭 출신의 미녀?”
“그게 전부야?”
“그냥 잠시 이야기를 나눈 미녀지 그럼 뭐가 더 있어?”
내가 대답했다.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이런 파티에 참석하는 본토 출신인 여자는 조심해야 해. 부모가 고위층이거나 아니면 흑사회와 연관된 여자이거나 둘 중 하나거든. 특히 충칭 출신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충칭은 대표하는 세 가지가 더위, 미녀, 조폭이야.”
리안이 말했다.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잠시 이야기한 것뿐인데 너무 나간 것 아니야?”
조금 어이가 없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것뿐인데 조심하라니?
더구나 장샤오이는 그녀의 말에 의하면 충칭에서 태어났을 뿐 베이징에서 왔다고 말했다.
“나는 미리 경고했어. 충칭 여자 만나서 고생을 해봐야 알지.”
말투로 봐서는 리안이 예전 충칭 여자를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나를 보며 고개를 젓던 리안은 손으로 한쪽에 모여있는 연예인들을 가리켰다.
“이 파티에서 여자를 만나려면 차라리 저기 있는 연예인들을 노려봐. 너 정도면 충분히 넘어올 테니까.”
“글쎄···.”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면 아주 유명한 배우가 아닌 이상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파티는 홍콩에서 최상류층이 모이는 파티였다.
옆에 억만장자들을 두고 나를 선택할 가능성은 작았다.
“평소와 다르게 왜 그래? 오다가 확인해 보니 일주일 사이에 필리핀 주가가 14.1%나 올랐어. 5주 사이에 도대체 얼마나 수익률을 올린 거야.”
“77% 정도?”
오늘까지 투자금은 약 천육백만 불 정도까지 늘어난 상태였다.
지난 연말 구백만 불 기준으로 약 77.78% 수익률이었다.
리안이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단하네. 지금 추세 대로라면 내년 계약이 끝나면 전 세계 금융회사에서 너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 줄을 설걸. 아니지···.”
잠시 말을 멈추고 한 걸음 다가와 말을 이었다.
“그때가 되면 나랑 같이 투자회사를 차리는 것은 어때? 돈은 내가 투자하지.”
리안이 동업을 제안했다.
리안의 동업 제의.
파티에서 우발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리안의 표정으로 봐서는 단순히 지나가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오늘 파티 초대 자체가 이 제안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안 자신의 위치와 홍콩 최상류층 파티를 보여줌으로써 나에게 동업을 제안하기 위한 무대···.
화교들에게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자본을 대고 동업을 하는 일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아직 그런 결정을 하기에는 이르지.”
리안과의 동업은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내가 하기 싫어도 명령이 내려오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일 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 몰랐다.
“나도 꼭 동업하자는 이야기도 아니고 지금 당장 답을 하라는 것도 아니야. 우리 꽤 잘 맞는 것 같아서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정도지.”
리안이 말했다.
별 뜻 아니라는 듯한 말투였다.
그렇지만 정말 별 뜻이 없었다기보다는 일단 제안을 철회한 것으로 봐야 했다.
정식으로 동업을 제안하기에는 확신이 부족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홍콩으로 왔을 때와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처음 CIA에 지원할 때만 해도 그 경력을 바탕으로 국무부나 백악관으로 진출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투자에 점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돈도 일정 수준 이상 넘으면 그 자체로 권력이 되는 세상이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은 아예 로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권력으로 바꾸는 것이 합법이었다.
그렇지만 투자를 한다고 해도 그게 리안과의 동업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류오린에서의 일 년 반 정도면 어느 정도 자금을 마련하는 데 충분한 기간이었다.
굳이 홍콩에 남아 리안과 동업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아무리 홍콩이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라고 해도 세계 금융의 중심은 뉴욕의 월가와 런던의 더 시티였다.
“나스닥 ETF에 투자했던 자금은 다 빼서 다우 ETF로 옮겼지?”
“그래. 이미 옮겼어.”
리안이 대답했다.
“그래, 추가 금리 인하 기대로 올랐지만, 나스닥은 한동안 떨어질 수밖에 없어. 그나마 기술주 하락에서 안전한 다우로 옮겨야지.”
소문에 사고 뉴스에 팔아라.
누구나 알고 있는 주식 명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누구나 알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주가에 영향을 준다..
지난 한 주 동안 나스닥은 6.6% 올랐다.
바로 몇 주 전부터 주식투자자들 거의 모두가 연준에서 1월 말에 추가 금리 인하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 발표가 바로 앞에 다가온 이상 그 전에 팔아야 했다.
아무리 연준이라고 해도 존재하지 않는 인터넷 상거래를 만들 수는 없었다.
다우지수도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떨어져도 다우가 나스닥보다는 하락 폭이 작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나마 안전한 다우로 옮겼다가 다우도 급락하면 그때는 현금으로 가지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나스닥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하면 선물은 어때? 옵션은 위험이 크다고 해도 선물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리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도 선물 옵션 같은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것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파생상품은 위험성이 너무 컸다.
특히 내가 지난 5주 동안 높은 수익률을 얻었다고 하지만 아직 대출한 원금조차 회복을 못 한 상태였다.
그런 위험한 투자는 적어도 원금을 회복하고 내가 조금 더 투자에 대해 자신을 가지게 된 이후에나 생각할 분야였다.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것은 투자자들에게 조금 더 믿음을 준 다음에 건의해 볼 생각이야.”
“아쉽기는 하지만 뭐···.”
리안은 여전히 아쉬운 표정이었다.
“참, 나 내일 일본으로 출장 갈 생각이야. 회사에 들러서 보고는 할 생각이기는 한데···. 왕 웬준 팀장과 엇갈릴 수도 있으니 혹시 나를 찾으면 말해줘.”
나는 화제를 전환했다.
“갑자기 무슨 출장인데?”
“지금까지는 일본이나 홍콩은 제외하고 투자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어. 두 곳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금융시장이잖아.”
“그야 그렇지.”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오늘 아침 이메일로 일본 전반적인 상황을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조사하라는 지시는 없었으니 굳이 일본에 직접 갈 필요는 없었다.
오늘 파티에 오기 전만 해도 나도 홍콩에서 일본에 대한 자료를 찾아서 보고할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바뀐 것은 파티 분위기가 침체한 것이 앤디 찬의 사임 때문이라는 장샤오이의 말 때문이었다.
자료나 보고서는 어떤 일을 객관적으로 볼 수는 있겠지만 그 일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감정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일국 이체제니 뭐니 해도 홍콩 행정장관인 둥칭화가 있었다.
앤디 찬이 둥칭화와의 권력다툼에서 밀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었다.
최근 중국 본토에서 탄압을 받는 파룬궁 신자가 아닌 이상 변하는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파티 분위기가 이렇게 우중충하게 변할 일이 아니었다.
아마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홍콩인들이 앤디 찬의 사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내가 일본에 가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현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