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4화 (25/270)

서몽

# 024.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금요일 밤 리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도쿄.”

“혼자 살판났네. 너 일본으로 떠난 이후 왕 웬준 팀장 분위기가 안 좋아.”

“왜?”

“왜기는 왜야. 왕 웬준 팀장에게 무조건 일본 출장을 가야 한다고 했다면서?”

목요일 회사에 출근해 왕 웬준 팀장에게 출장을 통고했다.

그리고 곧바로 공항으로 가 일본 교토행 비행기에 올랐었다.

“출장이야, 근래 몇 주 계속하던 일이잖아. 예전에도 이주에 한 번은 출장은 출장을 갔었고? 새삼스럽게 출장을 문제로 삼는다고?”

“네가 일방적으로 통보하듯이 떠난 것에 기분이 상했다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

“다른 이유라니?”

“우리 팀이 둘로 나뉠지 모른다는 말이 있어.”

“지금 팀이 둘로 나뉜다고.?”

불황을 모르던 중국 증시가 성장할 때도 하나였던 팀이 인제 와서 나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지금은 하나인 아시아팀을 실물 투자팀과 유가증권 투자팀으로 나눌 거라는데···.”

우리 팀은 본래 해외 화교 자금을 중국 본토에 투자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이런 팀의 업무를 생각하면 실물 투자팀과 유가증권 투자팀을 나누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해외 화교 자금을 결국은 투자자의 요구와 중국 본토 공산당의 요구 사이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실물 투자냐 유가증권 투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나눈다면 실물 투자팀은 팀의 주 업무였던 해외 화교의 중국 투자를 전담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반대로 유가증권팀은 투자자의 자금을 모집해서 해외증시나 채권 혹은 실물자산에 투자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나 리안은 유가증권 투자팀에 소속될 가능성이 컸다.

“장 웬준 팀장이 실물 투자팀으로 예정되었나 보군.”

“맞아.”

“그럼 유가 증권팀의 팀장은 누가 되는 거야?”

“베이징이나 상하이에서 사람이 온다는 정보야.”

“왕 웬준이 화를 낼만 하네.”

작년이라면 당연히 직접투자를 하면서 막대한 이권을 챙길 수 있는 실물 투자팀이 훨씬 중요한 자리였다.

그렇지만 중국 증시가 침체에 몇 년간 계속될 것으로 예상하는 지금은 유가 증권팀이 훨씬 중요한 자리였다.

단순히 수익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중국은 몇 년 전 GDP 1조 달러를 넘어 2000년 기준으로 1조 2천억 불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다음인 세계 6위였다.

1990년 GDP가 4천억 불도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10년 사이에 3배 이상 성장한 것이다.

중국은 권력이 중앙에 집중된 나라였다.

이런 나라에서 빠른 경제 성장은 곧 권력자들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할 기회였다.

“왕 웬준이 오늘 낮에 나를 불러서 자기 팀에 들어오라고 이야기하던데 너는 생각이 어때?”

“진심으로 묻는 거야? 상황이 그렇게 진행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미 주도권이 새로운 팀장에게 넘어간 거잖아.”

“그렇다고 봐야지.”

“굳이 손해를 감수하면서 너나 내가 침몰하는 배와 운명을 같이할 필요가 없잖아. 왕 웬준 팀장에게 그 정도 의리는 없어.”

“알았어. 나도 그렇게 알고 있을게. 도쿄에서는 어느 호텔에서 묵고 있어?”

“도쿄 제국 호텔(Imperial Hotel Tokyo)에 객실을 잡았어.”

전에는 몇 번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도쿄에서 그나마 조용한 시부야역 근처의 호텔에서 묵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호텔을 바꿨다.

도쿄 제국 호텔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인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본의 상황을 좀 더 현장에서 보기 위해 긴자 근처에 있는 호텔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도쿄 제국호텔은 호텔비가 비싼 편이기는 어차피 출장하면서 묶는 호텔비는 경비로 청구할 생각이었다.

“도쿄의 제국호텔···. 나도 도쿄에 갈 때마다 묶는 호텔이지.”

“그렇지 않아도 제국호텔에서 중국인을 많더라고···. 호텔에 자주 묵었지만, 외국에서 이렇게 중국인이 많은 호텔은 처음이야.”

“아···. 그건 아마도 왕 조우밍(왕조명, 汪兆銘)때문일거야.”

“왕 조우밍?”

“1940년대 대표적인 매국노지.”

“그게 뭔 말이야.”

매국노와 제국호텔에 중국인이 많은 것이 무슨 상관인지 나로서는 조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왕 조우밍의 남경 정부는 일본의 어용 정부였어. 그자가 일본에서 보낸 제국호텔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서 생활했거든···. 뭐 어떤 서비스를 해주기에 왕 조우밍이 나라를 팔면서까지 자기 생활을 맡겼을까···? 이런 궁금증이지.”

매국노가 제국호텔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한 것이 제국호텔을 방문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저러나 거기 일본 분위기는 어때?”

“밤에는 긴자에서 유명한 칵테일 바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젊은 층에서는 아주 정부에 대한 불만이 대단하더라고···.”

“일본 경제가 나쁘니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는 일본 경제 상황에 대한 불만과 현 일본 총리인 모리에 대한 불만이야.”

“모리 총리 자체가 말 그대로 망언 제조기잖아. 총리가 되기 전에도 구설수가 있기는 했지만, 총리가 된 다음에도 생각 없이 말을 할 줄은 몰랐어.”

“재미있지. 내가 알기로는 처음 총리가 될 때만 해도 모리는 준비된 총리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알고 있거든···.”

“경력이야 괜찮지.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긴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일본의 명문 와세다 대학을 나왔고 정치인으로서도 승승장구했으니까. 모리는 직전 총리였던 오부치 총리 밑에서 나름 헌신적으로 총리를 보좌했고···. 그래서 전임 오부치 총리가 건강 악화로 인한 갑작스러운 사임하고 나서 거의 추대나 마찬가지로 자민당의 총재가 되고 곧바로 총리 자리를 이어받은 거잖아. 그릇이 그런 자리를 담을 만한 그릇이 아닌 거지.”

리안이 말했다.

최고가 되기 전에는 뛰어났던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온갖 기행을 저지르며 몰락하는 일은 의외로 흔한 일이었다.

“취임 초기 일본은 신의 나라라는 망언을 시작으로 연이어 망언을 쏟아냈더라고···. 지지율도 30% 이하로 떨어져서 작년 연말에는 여당인 자민당 간사장의 불심임 받아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겨우 불신임이 부결되기는 했지만, 자민당 내 장악력은 반쯤은 잃은 상태인 것 같아.”

“분위기가 그러면 오래 버티기는 어렵겠네.”

“그럴지도···.”

“얼마나 버틸 것 같아? 곧 쫓겨날 것 같아? 공매도라 할까?”

리안의 목소리에 갑자기 활기가 돌았다.

“갑자기 뭔 소리야?”

나는 리안의 말에 당황했다.

“나는 네가 출장을 가면 그 나라에 일이 생기기에 이번에도 뭔 일이 생겼나 했지. 태국에 갔을 때는 태국 집권당이 참패했잖아. 필리핀을 갔다 온 다음에는 대통령이 쫓겨났고···.”

리안이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그 정도로 작년 말부터 올해 아시아 각국의 지도자들은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에 내몰리고 있었다.

“그런 나라와는 다르지. 일본은 그런 반정부 대규모 시위 자체가 이제 없어. 선거도 꽤 남았고···.”

“아깝네.”

“어차피 길어봐야 모리 총리의 남은 임기가 몇 달에 불과하니 그때 솜씨를 보여주면 되지.”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봐.”

리안과 전화 통화를 하던 나는 대화를 멈추고 방송에서 나오는 뉴스에 관심을 돌렸다.

“일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우리 또래 청년이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 죽었다는 뉴스야.”

일본 방송에서는 한국인 유학생과 다른 승객이 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가 사망했다는 뉴스가 대대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일이 일본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뉴스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대단한 사람이네.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 목숨을 걸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영웅은 보통 사람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므로 영웅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삶을 살 생각은 없었다.

CIA 요원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내 이익은 내가 지키면서 살 생각이었다.

일요일 명목상 류오린에 2천만 불을 맡긴 AAM 사무실에 나와 일본에 대한 보고서를 썼다.

‘누가 읽어 보기나 할까?’

에디 미첼이 죽고 난 이후 나는 CIA 요원으로서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가 한 일의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에디 미첼은 살아 있을 때 내가 보고서를 올리면 며칠 후에 이런저런 지적을 하고는 했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나는 때로는 지시를 받고 때로는 내가 임의로 결정해서 일주일에 하나씩 보고서를 쓰고 있었다.

그렇지만 에디 미첼이 살아 있을 때와는 달리 아무런 피드백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직접 보고서를 출력해서 무인 오피스에 가져다 놓았다면 긴장감이라도 있었을 텐데 지금은 메일 주소에 임시저장의 형태로 남겨 놓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임시저장한 파일을 누가 읽었는지 내려받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스파이로서 내 삶이 이렇듯 공허한 외침이라면 위장 신분에 불과한 투자회사의 삶은 전혀 달랐다.

내가 조사를 하고 분석을 하면 그대로 숫자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내가 매 투자에 성공할 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만약 내가 투철한 애국심 때문에 CIA 직원으로 사는 삶을 선택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스파이로서의 삶이 흔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CIA에 들어갔던 것은 주류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CIA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내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지시라면 굳이 벗어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보고서를 완성하자마자 암호화한 후 지난번처럼 메일 계정으로 들어가 임시저장했다.

AAM의 사무실을 나온 나는 집으로 가는 대신 호텔로 향했다.

집을 비우는 날도 많고 출퇴근할 때마다 고생하는 것이 귀찮아서 사인안호(西灣河, Sai Wan Ho)에 임대하고 집 대신 호텔에 장기투숙을 할까 생각 중이었다.

월요일 아침 방송에서는 지난 금요일 인도 구자라트에서 발생한 지진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금세기 최악의 지진 중 하나로 사망자가 최소 만 명에서 이만 명이 넘고 부상자는 십만에서 이십만이 넘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 침체로 어려운 상황에서 발생한 최악의 자연재해였다.

나는 폐허로 변한 현장을 보며 아침 식사를 하고 룸서비스를 통해 받은 옷으로 갈아입고 회사로 향했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팀장인 왕 웬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끌고 팀장실로 호출했다.

왕 웬준은 다른 때와는 달리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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