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2.
흥분한 왕 웬준의 태도에 나는 그대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양팔을 올려 목 뒤로 깍지를 끼었다.
"그건 오히려 제가 할 말이네요."
"뭐야!"
"제가 지난 반년 동안 이 회사와 팀에 벌어준 매매수수료가 300만 불이 넘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팀원들에게 성과급으로 지급됐고 그중에서 가장 많은 성과급을 받은 분이 바로 팀장님이죠."
"자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다른 팀원들이 받은 성과급 다 합쳐도 자네가 받은 성과급과 비슷한 정도네. 자네가 그 반년 동안 받은 성과급이 50만 불이 넘네. 아마 자네 정도 경력에 그 정도 성과급을 받는 직원은 미국이나 영국 어느 투자회사에도 찾기 어려울 거네."
"물론 그렇죠. 하지만 제 성과급은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류오린에서 받는 게 아니라 제 투자자분들이 저에게 주는 것이죠. 류오린은 제 거래에 편의만 봐주고 그 돈을 받은 것이고요. 아닙니까?"
내 말에 왕 웬준이 이를 악물었다.
"자네가 매주 반 이상을 회사를 비우고 출장을 갈 때마다 그 비용을 부담한 것은 바로 류오린이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출장과 자네가 하던 투자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문이군."
왕 웬준은 생각했던 것보다 쪼잔했다.
"작년에 자네가 거래한 주식은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의 기술주였지만 자네 출장지는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이었지. 자네 출장이 일과 관련이 있기는 한 건가?"
출장비를 들고 나왔다.
"지금에 와서 예전 출장과 제가 했던 주식거래가 무슨 관계인지 보고서라도 제출하라는 말씀입니까?"
내가 물었다.
"그러면 좋겠지만···. 이미 오래전 일을 지금 거론하는 것은 좀 그렇지. 예전 출장은 내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네. 자네가 무슨 보고서를 쓰더라도 그걸 검증해 줄 에디 미첼 본부장이 세상에 없으니 말이야."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내 출장이나 그 비용을 류오린에서 부담하는 것은 처음 에디 미첼이 류오린과 계약할 때 이미 양해된 문제였다.
더구나 내 출장비를 모두 합쳐도 나를 통해 류오린이 벌어들인 300만 불에 비하면 아주 적은 금액이었다.
"예전 출장은 몰라도 이번 도쿄 출장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것 같네. 내가 오늘 출근해서 자네 법인카드 내용을 보니 도쿄 제국 호텔에서 묵었더군."
"맞습니다."
"자네는 매번 출장 때마다 항상 최고급 호텔만 이용하는군."
"그게 잘못입니까?"
"항상 출장이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출장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겠네. 하지만 매번 출장 때마다 최고급 호텔을 이용하는 일반 직원은 류오린에서 자네뿐이네. 직원들 사이에 말이 많이 나오고 있네. 자네가 일하러 가는 것인지 관광을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이야.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니 앞으로는 자제해줬으면 좋겠네."
왕 웬준이 통고하듯 고압적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모습에 왕 웬준의 팀에 남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평성에 어긋난다···. 그러면 안 되죠."
"자네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내가 마음이 편하군. 자네에 대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팀원들 사이에 형평성을 맞추려는 조치네."
감정으로 하는 조치가 아니라고 하는 말이 나에게는 악감정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는 말로 들렸다.
"오늘 안에 지난 7개월 동안 제가 출장 때 특급호텔에서 묵어서 생긴 차액 전액을 회사에 반환하겠습니다."
차액을 전부 회사에 반환하겠다는 내 말에 왕 웬준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왕 웬준의 말을 막았다.
"그럼 이야기를 다 끝내셨으면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래. 나가보게."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왕 웬준의 사무실을 나왔다.
왕 웬준의 사무실을 나온 나는 리안을 찾아갔다.
"이야기 다 끝났어?"
"주식 전부 다 팔아줘. 지금 당장."
나는 리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뭐?"
리안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나는 보통 화요일이나 수요일에 주식을 팔았다.
월요일에 주식을 매매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 팔아달라고···. 되도록 빨리···."
"잠시만···."
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회의실로 끌고 갔다.
"갑자기 왜 그래?"
나는 리안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왕 웬준 팀장에게 누가 위인지 보여주려고···."
"무슨 일인데?"
"큰일은 아니야. 그냥 나에게 장난을 치네."
그렇다.
별일 아니었다.
내가 지난 7개월 동안 묶었던 호텔 숙박비를 합쳐도 2만 불 정도였다.
특급호텔이 아니라 다른 직원들이 묶는 일반 호텔에서 묵었다고 했을 때 차액을 생각하면 훨씬 더 적은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왕 웬준이 호텔비를 지적하고 나온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만약 이번에 밀린다면 팀이 나뉘기까지 계속 사소한 지적으로 귀찮게 할 것이다.
호텔비 차액을 한 번에 갚아서 왕 웬준의 입을 막는 것은 시작이었다.
왕 웬준의 쪼잔한 반응에 대한 내 대책은 바로 그가 가장 신경을 쓰는 점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바로 실적이었다.
"하루 이틀은 더 오를 것 같은데··· 그래도 오늘 팔겠다는 말이지?"
"맞아."
"주식을 팔고 난 후에는?"
리안도 어느 정도 내 생각을 짐작한 표정이었다.
"내가 말할 때까지 내 투자금에 대한 거래를 멈춰 줘."
류오린은 은행이 아니었다.
류오린이 고객의 투자금을 가지고 있다고 그 자체로 이익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매매하지 않으면 투자금을 아무리 유치해도 수입은 제로였다.
AAM의 법인계좌는 법인계좌치고는 엄청나게 거래를 자주 하는 편이었다.
아마 법인계좌로 스윙 거래를 류오린 투자회사를 통해서 하는 것은 AAM, 즉 내가 관리하는 투자금뿐일 것이다.
내가 거래를 멈추면 일주일에 정기적으로 들어오던 15만 불에서 20만 불의 매매수수료 수입이 제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안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왕 웬준 팀장님 앞으로 마음고생 좀 하시겠네."
나는 리안의 미소에 미소로 답했다.
"리안 네 생각에는 우리 팀장님께서 얼마나 버틸 것 같아?"
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 일주일?"
"그래도 팀장인데 보름은 버티지 않을까?"
"에드릭 넌 왕 웬준 팀장님을 어떻게 보고···. 절대 열흘 이상 버티지 못해. 그런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네가 팀을 떠날 때까지 애지중지했겠지. 그나저나 도쿄는 어땠어?"
"그저 그랬어. 아무래도 불황이 오래되다 보니 나라 전체가 활력을 잃어가는 것 같은 분위기?"
일본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장기침체를 빠져 있는 중이었다.
90년대 후반 잠시 살아나는가 싶었던 일본 경제는 아시아 경제위기와 닷컴버블의 붕괴로 다시 불황의 늪에 빠졌다.
이런 분위기는 그대로 일본 국민을 패배주의와 극도의 개인주의를 이끌고 있었다.
오죽하면 철로에 빠진 사람을 외국인 유학생이 구하려다가 죽은 사건을 온 언론이 대서특필하겠는가?
그만큼 지금의 일본이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나 희생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언론에서 사회의 공정 경쟁을 강조한다면 그건 공정하지 못한 사회라는 의미였다.
마찬가지로 언론에서 국민의 도덕성을 강조한다면 그건 바로 사회의 도덕성 타락이 극에 달했다는 간접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분위기라면 모리 총리도 오래 버티기는 어렵겠군."
리안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지. 그런데 따지고 보면 모리 총리 잘못은 아니지. 잘못된 시기에 총리가 된 것이 운이 없는 거지."
모리는 오랜 세월 총리 후보로 거론되던 거물 정치인이었다.
오부치 총리의 건강 악화로 총리직을 물려받은 것은 미국에서 닷컴버블이 붕괴한 2000년 4월이었다.
총리가 되지 맞아 전 세계적인 증시 폭락했다.
당연히 증시 폭락과 함께 전 세계 경제도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하긴 뭐···. 망언제조기라고 불리지만 모리가 국회의원이었을 때 망언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작년부터 올해까지 운이 나쁜 정치인은 한두 명이 아니지. 근본적인 원인은 경제가 나쁘기 때문이지."
1992년 클린턴은 "The economy, stupid!"(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선거구호로 이라크전을 승리로 이끈 부시 대통령을 무너트렸다.
작년 닷컴버블 붕괴로 시작된 경제위기는 아시아의 지도자들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었다.
위기에 처한 아시아 지도자는 일본의 모리 총리뿐이 아니었다.
이미 태국에서는 집권당이 패해 탁신에게 정권이 넘어갔고 필리핀에서는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쫓겨났고 인도네시아에서도 와히드 대통령이 쫓겨날 위기였다.
이들이 위기에 처한 이유는 막말, 부패, 무능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경제위기였다.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풍요할 때 정치 지도자에게 관대해지는 법이었다.
"뭐···. 우리가 그런 인간들 걱정할 필요 있나? 내가 한가지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정치적 불안은 돈이 된다는 거야."
정치적 불안은 CIA 요원으로서는 미국에 어떤 것이 이익이 될까를 분석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주식투자자로서의 나는 돈을 벌 기회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