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이길 수 없는 게임.
왕 웬준이 에드릭과 대화하고 이상을 느낀 것은 목요일이었다.
자신과 대화를 끝내고 돌아간 후 에드릭은 가지고 있던 모든 주식을 팔았다.
이때만 해도 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문제는 목요일 오후가 되도록 아무런 주식을 사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에드릭은 빠르면 화요일에서 늦으면 금요일 사이에 주식을 매매했다.
사들인 주식을 일주일 이상 가지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주식을 팔면 바로 그날 혹은 다음 날에 다른 주식을 사들였다.
주식 거래 방법의 하나로 사들인 주식을 일주일을 넘기지 않고 파는 전형적인 스윙이었다.
지금이면 당연히 다른 주식을 사야 할 시기였다.
그런데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심지어 이번 주에는 최근 매주 가던 출장도 가지 않고 있었다.
왕 웬준은 찜찜한 생각에 리안을 급하게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리안이 노크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오자 왕 웬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앉게."
아마 다른 사람이 에드릭의 파트너였다면 진작에 불러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리안은 왕 웬준도 조금 껄끄러웠다.
리안을 제외한 가족들은 1997년 홍콩 반환 직전에 모두 캐나다에 이민했다.
캐나다에 이민 간 홍콩의 부자는 리안의 집안을 제외해도 많았다.
하지만 리안은 그중에서 조금 특이한 경우였다.
우선 리안의 가문 정확히는 리안이 홍콩에 가진 재산은 꽤 많았다.
홍콩 부동산 가격이 폭락한 지금 가치로 따져도 최소 수천만 불에서 넘는다는 소문이었다.
더구나 리안의 아버지는 캐나다에 이민을 하기는 했지만 중국 공산당 고위층과 막강한 인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심지어 2년 전 은퇴한 전국인민대표대회 차오스 상무위원장과도 친분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차오스 상무위원장이 누구인가?
한때는 현재의 중국 지도자인 장쩌민과 차세대 지도자 지위를 다퉜고 은퇴하기 전까지 장쩌민의 가장 막강한 정적이라고 불리던 거물이었다.
나이 때문에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넓게는 상하이 방에 속하는 왕 웬준으로서는 차오스는 말 그대로 하늘 같은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왕 웬준에게 리안은 가까이하기도 껄끄럽고 그렇다고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계륵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도 있는 법이었다.
"마시게."
왕 웬준은 특별한 직원이 왔을 때만 주는 찻잔을 리안의 앞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왕 웬준은 잠시 리안이 차를 마시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왕 웬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를 부른 것은···."
탁.
리안은 왕 웬준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찬 잣을 내려놓으며 잘랐다.
"알고 있습니다. 에드릭 때문에 부른 것 아닙니까."
"맞네."
왕 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저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리안이 자신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시선을 찻잔으로 옮겼다.
그런 리안의 모습에 왕 웬준은 가슴에서 무엇인가가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건방진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릭이나 이놈이나 모두 팀장인 자신을 우습게 보고 있었다.
"하···."
왕 웬준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왕 웬준은 원래 리안이 자신의 팀으로 오는 것을 반대했었다.
힘에 밀려 리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단 팀원이 된 다음에는 꽤 신경을 써주었다.
다른 팀원들에게는 거래처를 잡아 오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리안에게는 그런 적이 없었다.
투자회사에서 직원들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바로 고객과의 관계였다.
다른 직원들은 고객 하나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몇 달간 그 고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하인처럼 일하는 때도 많았다.
그렇게 고객을 끌어온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끌어온 고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보다 훨씬 더 노력해야 했다.
직원들이 투자회사를 그만두고 헤지펀드나 사모펀드로 이직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고객들의 갑질이었다.
그런데 리안은 그런 경우를 당한 적이 없었다.
고객 유치에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왕 웬준은 리안에게 고객 유치를 압박하지 않았다.
팀에 배치된 다음에는 왕 웬준 나름으로는 리안을 많이 배려해 준 것이었다.
심지어 에드릭이 일방적으로 리안을 파트너로 삼겠다는 말을 할 때도 대범하게 허락해 주었다.
왕 웬준은 리안이 당연히 이런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리안, 이 자식은 그런 자신의 배려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하여간 에드릭이나 이 자식이나 싸가지가 없는 것은 똑같군.'
화가 나기는 하지만 원래 이런 놈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놈은 에드릭보다 오히려 더 함부로 할 수 없는 놈이었다.
왕 웬준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주식을 사들인다는 말도 없었다는 말인가?"
"한동안 거래를 할 생각 없는 것 같던데요."
"뭐!"
왕 웬준은 자신도 모르고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거래를 중단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류오린 투자회사가 거래할 때마다 매매수수료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드릭도 거래할 때마다 그 매매수수료 중 5분의 1을 성과급으로 받는다.
에드릭으로서는 거래하면 할수록 수입이 늘어났다.
실제로 작년까지 에드릭은 매매할 때마다 손해를 봤지만, 성과급으로만 50만 불 이상을 받았다.
왕 웬준이 에드릭이 자신의 수입을 포기하면서까지 거래를 중단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이유였다.
"한동안이라면 도대체 언제까지 중단한다는 말인가? 언제 시작한다는 말은 전혀 없었나?"
왕 웬준이 다시 물었다.
"전혀 없었습니다."
리안이 대답했다.
리안의 말에 왕 웬준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얼마 후면 새로운 팀원들이 들어온다.
형식상은 리안의 부하직원들이지만 사실상 다른 팀을 만들기 전에 임시조치였다.
부하라기보다는 앞으로 실적을 두고 경쟁할 경쟁자였다.
최근 실적이 좋은 에드릭과 리안을 자신의 팀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새로운 팀원들이 합류하기 전에 실적을 최대한 높이는 것도 필요했다.
새로운 팀원들이 합류하고 갑자기 팀의 실적이 급상승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팀이 나뉘고 다시 팀의 실적이 곤두박질친다면 그건 바로 팀장으로서의 자신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왕 웬준은 중국 본토와 본토의 해외 투자를 나눈다는 구분 자체가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두 가지 모두 고객들과의 인맥을 통해서 이뤄지는 일이었다.
한동안은 팀의 역할이 구분되겠지만 얼마 가지 않아 두 팀 모두 중국 본토에 대한 투자와 해외 투자를 모두 함께하게 될 것이다.
직접적인 경쟁자가 된다는 의미였다.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당장 에드릭을 불러 어떻게든 거래를 시작하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에드릭이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자네 생각에는 에드릭이 언제 거래를 다시 시작할 것 같은가?"
왕 웬준이 물었다.
왕 웬준의 물음에 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그건 팀장님에게 달린 것 같은데요?"
결국, 사과를 해야 하는데···.
'내가 왜 그 위아래도 모르는 놈에게 사과해야 해? 운 좋게 고객 하나 잡아서 막대한 보너스를 챙기는 자식에게···.'
왕 웬준은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며칠 전부터 나 보라는 듯이 아예 센트럴에 있는 특급호텔에서 묵고 있다지.'
자신이 출장 때 특급호텔에 숙박한 것을 문제 삼자 에드릭은 숙박비 차액을 송금했다. 그리고 왕 웬준 보라는 듯이 아예 숙소를 센트럴에 있는 포 시즌으로 옮겼다.
AAM의 투자금으로 주식매매를 하지 않으면 에드릭이 받을 수 있는 돈은 류오린의 연봉 정도였다.
에드릭 기본 연봉은 지금 묶고 있다는 호텔의 숙박비도 부담스러운 정도의 수준이었다.
"알았으니 나가 보게."
왕 웬준은 인간의 탐욕을 믿었다.
에드릭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 왕 웬준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너 이 자식 뭐 하는 새끼야! 투자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류오린의 부사장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왕 웬준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거듭 숙이며 통화를 계속했다.
"AAM 계좌에 있던 투자금 중 천육백오십만 불이 지난 금요일 마감 직전에 다른 은행 계좌로 이체된 것도 아직 모르고 있는 거야!"
"예?"
AAM의 계좌라면 바로 에드릭이 관리하는 투자금이었다.
그리고 지난주 확인한 바에 의하면 천육백오십만 불이라면 거의 전액이었다.
남은 금액이라고 해봐야 이만 불 정도···.
한마디로 거의 투자금을 정리했다고 봐도 되는 수준이었다.
"당장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내서 내 방으로 와."
"알겠습니다. 되도록 빨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다···. 오전 중에 자금 원위치시키지 못하면 사표나 써놔! 아무리 본토에 연줄이 있어도 알아서 찾아온 중요 고객도 놓치는 능력이라면 그만두는 게 낫지."
"···."
AAM의 현재 투자금인 천육백오십만 불 정도면 류오린이 거래하는 기업 계좌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다른 기업 계좌와 다른 것은 다른 기업 계좌는 거래가 한 달에 한 번 정도였다.
그런데 에드릭은 거래를 기업 계좌 중 가장 거래가 많아 막대한 수수료를 류오린에 가져다주는 수익성 높은 계좌였다.
현재 단일 투자 계좌로는 왕 웬준의 팀은 물론이고 류오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계좌라고 할 수 있었다.
부사장이 직접 나서서 전화를 건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음 주에 새로운 팀원들 오는 것 알지."
부사장이 말했다.
"예."
"굴러온 돌에 박힌 돌이 튕겨 나가야 하겠어? 자네 팀이 우리 회사에서 가장 핵심이라는 것 알고 있지. 그 자리 노리는 사람들 많아."
부사장의 목소리에는 왕 웬준에 대한 호의가 묻어났다.
애초에 부사장은 왕 웬준에는 류오린 투자회사 내부에서 파벌의 보스라고 할 수가 있는 존재였다.
"제가 어떻게든 원래대로 복구시키겠습니다."
"잘하자···."
부사장이 전화를 끊자마자 왕 웬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릭의 자리로 갔다.
@@@
류오린 투자 계좌에 있는 투자금 중 천육백오십만 불을 HSBC의 AAM 계좌로 이체했다.
류오린 계좌에 남은 금액은 이만 불이 조금 금액뿐이었다.
왕 웬준 팀장이 직접 찾아왔다.
"에드릭! 너 지금 뭐한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는데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의도적으로 왕 웬준의 화를 돋우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었다.
"AAM의 계좌에 있는 돈을 다 뺐다면서?"
"아···. 한 이만 불 정도 남아 있지 않나요? 그 정도는 남겨둔 것 같은데요?"
나는 이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으며 말했다.
"나랑 장난해? 돈을 왜 빼간 거야! 그것 때문에 내가 위에서 무슨 소리를 들은 줄 알아! 말도 없이 그런 거액을 빼면 어쩌자는 거야!"
왕 웬준은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AAM의 투자금을 빼는 것은 AAM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걸 왜 팀장님에게 말해야 하는지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네요. 팀장님이 저도 모르게 AAM의 지분이라도 가지고 계신 건가요?"
"지난 6월 계약할 때···."
왕 웬준은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팀원들이 모두 왕 웬준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류오린과 AAM, 정확하게는 에디 미첼과의 투자계약은 두 회사 간의 비밀이었다.
공개된 자리에서 할 내용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본 왕 웬준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내 사무실···. 아니 저기 회의실로 따라와!"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니네.'
나는 성큼성큼 회의실로 가는 왕 웬준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잘하고 와!"
옆에서 지켜보던 리안이 조용히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리안의 어깨를 몇 번 치고는 왕 웬준의 뒤를 따라갔다.
이미 승부는 결정되었다.
아니 애초에 이 게임은 시작부터 왕 웬준이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그걸 나와 리안은 알고 있었다.
왕 웬준은 몰랐다는 것이 그의 실수이자 한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