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33화 (34/270)

서몽

# 지나치게 뛰어난···.

리 슈는 나를 호텔 앞에 내려주었다.

차창을 통해 리 슈가 말했다.

"가자마자 곧바로 가이드를 호텔로 보내겠습니다."

"서두르실 필요 없습니다. 밤까지는 밖에 나갈 생각이 없으니까요."

리 슈의 긴장했던 표정이 풀렸다.

아마도 바로 사람을 보내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던 모양이었다.

11월부터 2월은 태국의 관광 성수기였다.

그녀의 말대로 나에게 보내려고 하는 사람이 유능한 가이드라면 태국 관광 성수기인 이때 사무실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날 때쯤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내가 대답했다.

리 슈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차를 몰고 떠났다.

나는 호텔에 들어가기 전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찾았다.

마침 호텔 주변이라서 그런지 국제전화를 걸 수 있는 전화부스가 있었다.

나는 공항에서 미리 구매해 놓은 국제전화 카드를 이용해 일본으로 전화를 걸었다.

단테 패트릭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태국에서 조사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도움 요청을 거부했었다.

방콕에 도착한 이상 그에게 내가 태국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해결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단테 패트릭 서기관님 전화가 맞나요?"

"누구시죠?"

"지난번에 스테이크를 같이 먹었던 신입직원입니다."

"아! 자네··· 지금 어딘가?"

단테 패트릭이 내가 누군지 확인하고는 반갑게 말했다.

"태국 방콕입니다."

"그랬지···."

단테 패트릭의 목소리에서 그의 심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일본에 근무하는 그로서는 일본의 반미 감정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게 대사관 직원으로서든 CIA 요원으로서든 두 가지 경우 모두···.

"자네가 보낸 메일은 받았네. 그런데 그 정도로 될까 모르겠네."

나는 방콕으로 오기 전 나름의 대책을 단테 패트릭에게 보냈었다.

완벽한 대책은 아니었다.

나는 신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은 사고로 사망한 고등학생들이 다시 살아오지 않는 이상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사실 별다른 대책이 먹힐 상황이 아닙니다. 이전에 했던 작업을 계속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전에 했던 작업이란 당연히 모리 요시로 총리를 개자식으로 만드는 일을 의미했다.

혹시 모를 도청을 생각해서 이런 사실을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자네 말이 맞네. 그래도 자네 덕분에 뭐라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네."

"준비는 다 끝났습니까?"

"배우들은 섭외됐네. 무대도 세팅이 다 끝났고···. 이제 무대에 올리기만 하면 되지."

말하는 것이 영화에서 본 사기꾼들이 하던 말 같았다.

도청을 염려해서 하는 말인 것은 알겠지만 너무 노골적이었다.

도청하는 사람이 실제로 있다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긴 뭐···.

한국이나 일본은 대놓고 CIA가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스파이가 하는 일이나 사기꾼이 하는 일이나 큰 차이가 없기도 했다.

규모가 크고 목적이 돈이냐 아니면 국가나 조직의 이익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잘되기를 여기 태국에서 기원하고 있겠습니다."

"잘 돼야지. 자네 각본을 다른 직원들도 마음에 들어 하더군. 그런데 이것 내 이름으로 진행해도 되나 모르겠네."

"제가 서기관님께 메일을 보낸 것은 팀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일입니다. 오히려 제가 팀 활동 중에 딴짓한 것을 알게 되면 팀장님께 징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 태국에서 활동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만도 원래는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런데···."

"뭔가 말해 보게?"

"다음부터는 제가 이런 식으로 서기관님을 돕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야 서기관님을 돕고 싶지만···. 서기관님도 아시겠지만, 필드에서 오래 활동하신 분들은 좀 보안 문제에 관한 한 편집증적인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해하네. 하긴 자네도 원래는 정보분석관실 소속이라고 그랬지. 나도 작년 지원국이 해체되고 지금은 작전국 소속이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니까."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다음에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이번 단테 패트릭이 도움 요청은 어떻게 넘어갈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단테 패트릭이 다음에 또 도와달라는 메일을 보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한 번이 어렵지.

이미 두 번이었다.

세 번이 되기는 쉬웠다.

단테 패트릭이 CIA에서 오래 근무했다고는 하지만 그 경력 대부분은 지원국에서의 행정 경험이었다.

행정 경험뿐이라고 해도 단테 패트릭이 CIA 요원으로서 아주 무능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무리 직접적인 작전 경험이 없다고 해도 단테 패트릭의 나이를 생각하면 최소 10년에서 15년 이상 CIA에서 근무했을 것이다.

그 정도 경력이라면 이런저런 간접 경험만 해도 꽤 많을 것이다.

다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한 길을 찾는 법이었다.

단테 패트릭 처지에서 쉽게 데려다가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안 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지금은 단테 패트릭 한 사람이지만 앞으로 다른 사람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더구나 있지도 않은 팀이나 팀장 핑계를 대는 일도 한 두 번이지 이런 핑계가 언제까지 먹힌다는 보장이 없었다.

단테 패트릭이 마음먹고 내 신상을 조사하기 시작하면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일을 하려면 단테 패트릭이라도 무리를 해야겠지만 아주 불가능 일도 아니었다.

단테 패트릭이 처음부터 작전국 소속이라면 이런 조사를 하는 일이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원래 지원국 소속이었다.

'진짜 내가 하루라도 빨리 시드머니를 벌어서 CIA를 그만두든지 해야지. 불안해서 못 살겠네.'

나는 하루라도 빨리 투자금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호텔로 향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호텔직원이 다가왔다.

호텔직원은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가방은 크기가 작은 것은 아니었지만 안에 든 것은 노트북과 간단한 속옷과 세면도구뿐이었다.

별로 무겁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방을 호텔직원에게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홍콩에서는 계속 호텔에 머무르다 보니 호텔에 들어설 때마다 짐을 맡기는 것이 오히려 귀찮았다.

되도록 지난번에 머물렀던 객실을 원했지만, 여전히 관광 성수기라서 남은 방이 많지는 않았다.

객실에 올라가 보니 지난번에 머물렀던 객실보다는 조금 전망이 떨어졌다.

어차피 태국 전망을 구경하러 온 것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태국은 2000년 기준으로 이동통신 보급률이 5%가 겨우 넘는 국가였지만 다행히 특급호텔이라서 그런지 객실에서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객실의 인터넷 선과 연결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태국의 인터넷 속도는 느렸다.

나는 지난번 태국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서 조사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그때 조사했던 내용에 따르면 관광서나 일반 호텔에서는 주로 전화선을 이용해서 인터넷을 사용한다고 한다.

ADSL, ISDN과 같은 초고속망은 이런 특급호텔에나 겨우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보급률이 아주 낮았다.

물론 가정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비율은 훨씬 낮았는데 일단 태국은 유선 전화 보급률이 15% 정도밖에 안 되고 PC가 여전히 고가였다.

오히려 휴대전화의 WAP (Wireless Application Protocol) 시스템을 이용해서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태국의 유선 통신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국영 통신회사인 TOT 및 CAT가 비싼 요금 정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

통신회사 출신인 탁신이 총리가 된 이상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있을 것 같지만···.

어쨌든 태국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빠른 특급호텔의 인터넷망 덕분에 태국의 주요 영어로 서비스되는 신문과 중국어로 서비스되는 신문의 기사를 확인하는 데는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나는 태국 신문과 태국에 관한 외신을 빠르게 확인해 보았다.

태국에서 가장 먼저 확인할 부분은 당연히 정치 분야였다.

지난번 왔을 때 선거에서 압승했던 탁신은 총리로 취임한 상태였다.

이미 새로운 정부의 장관들에 대한 발표는 난 상태였다.

첫 국무회의는 다음 주 월요일에 열릴 예정이었다.

탁신 총리는 새로운 국무회의를 공개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외신을 통해서 태국에서 가장 비판적인 신문이라는 Nation이라는 곳에서만 장관 임명에 대해 혹평을 해놓았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새로운 장관들에 대한 평가는 별로 좋지 않았다.

장관들 대부분이 전문성보다는 탁신과의 개인적인 인연으로 임명됐다는 평가였다.

총리가 되기 전에 운영하던 회사의 중역들 아니면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지난번 왔을 때 만났던 솜키드 교수도 이번에 재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언론들은 그가 통상이나 산업 쪽 장관이 될 것이라는 예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솜키드 교수가 탁신의 경제 공약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는 마케팅 전문가이지 재정 정책의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솜키드 교수가 아예 경제나 정책 분야에 비전문가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지극히 마케팅적인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봐서 그런지 그는 이미 태국 국가 정책에 관한 책을 낸 적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재무부 장관이 재정 정책을 전공한 재무 관료나 중앙은행 출신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인선이기는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별로 나쁠 것이 없는 인선이었다.

아예 얼굴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재무부 장관에 내가 한 번이라도 만난 사람이 임명되는 일이 나쁠 일이 없었다.

여기에 솜키드 교수 아니 장관을 재무부 장관에 임명한 것은 선거 때 공약을 임기 초반에 밀고 나가겠다는 의미였다.

솜키드 장관이 썼던 책과 공약을 통해 앞으로 태국의 경제정책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한 나라의 경제정책 방향을 아는 것은 그게 설사 다른 사람도 예상할 수 있는 정보라도 그 자체로 돈이 되는 정보였다.

'이번 태국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것은 별로 어려움이 없겠는데···.'

다음 주 월요일에 열린다는 국무회의와 국무회의 이후 발표되는 정책을 보면서 세부 사항을 맞춘다면 어느 정도 그럴듯한 보고서를 쓰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아직 보고서는 시작도 안 했지만 마치 일을 다 끝낸 기분이었다.

나는 객실 소파에 기대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아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단테 패트릭의 지원 요청 때문에 갑자기 태국으로 오느라 긴장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았다.

남은 시간은 태국 관광이나 하면서 보내야겠다는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내가 잠을 깬 것은 나를 찾아온 사람이 있다는 호텔 로비의 전화를 받고 난 이후였다.

"올려보내셔도 됩니다."

리 슈가 보낸 사람이 오는 동안 샤워를 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보니 전부 30도가 넘는 방콕에서 입기에는 부담스러운 옷뿐이었다.

며칠 동안 머물자면 내일은 옷이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벨 소리가 울렸다.

기다리던 가이드가 온 것이다.

문을 연 순간 나는 잠시 멈칫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내가 리 슈의 말을 들으며 예상했던 세련된 가이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가이드라기보다는 무에타이 선수에 가까운 단단한 근육질의 남성이었다.

'이 사람이 가이드라고?'

말 그대로 과유불급이었다.

아무리 경호원도 겸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지나쳤다.

어지간한 사람은 이런 사람의 안내를 받으면서 관광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인상이 험악하다고는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편안한 마음으로 안내를 받을 정도 인상도 아니었다.

내 요청이 아니더라도 이런 사람이 여행사의 관광 가이드라는 사실이 별로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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