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사람의 가치.
"스노우 투어에서 나왔습니다. 수난 클라한(Sunan Klahan)이라고 합니다."
"아, 예···."
건장한 체격의 남성의 입에서 스노우라는 이름을 들으니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알기로는 태국어로 클라한은 용감한(brave) 이라는 뜻이었다.
수난 클라한은 그 이름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눈(雪)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처음 리 수(Li Xue, 李雪)의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비슷한 느낌을 받기는 했다.
태국과 눈이라니···.
이보다 더 부자연스러운 조합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수난 클라한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제가 실례를 한 것 같네요.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분이라서···."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종종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일단 제가 안내를 맡았던 분들은 다음에 저를 다시 찾아주십니다."
수난 클라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런 반응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수난 클라한은 첫인상과는 달리 좀 말이 많았다.
'의무병 출신이라서 그런가?'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나는 수난 클라한을 방으로 들이면서 순간적으로 이른바 쪽팔렸다.
명색이 CIA 요원이라는 인간이 겨우 사람의 인상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고 당황하다니···.
역시 현장 요원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군대에 있으셨다고요?"
"예. 5년간 군에 있었습니다. 사장님에게 듣자니 경호도 할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고 하셨는데 저라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 정도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수난 클라한은 키가 6피트 미터 기준으로 183㎝였다.
태국 성년 남자들의 평균 신장이 170㎝가 안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15㎝ 정도 더 큰 셈이었다.
더구나 몸무게도 최소 85에서 90킬로는 되어 보였다.
도둑들이 어지간히 자신이 있지 않은 이상 필리핀에서처럼 소매치기나 강도를 만날 걱정은 없어 보였다.
"체격을 보니 운동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어릴 때부터 무에타이를 익혔습니다. 군에서는 좀 더 실용적인 기술을 익혔고요. 부대에 있을 때는 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지금도 꾸준히 매일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교관이요? 의무병 출신이라고 들었는데요?"
"의무병 역할도 했습니다. 임무를 하다 보면 현장에서 바로 치료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요."
'이런 사람이 왜 관광 가이드를 하는 거야? 그냥 경호원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궁금했지만 만나자마자 물어볼 말은 아니었다.
"아직 식사 전이면 나가서 저녁 식사나 같이하죠."
"감사합니다."
나는 호텔을 나가기 전 지하 쇼핑몰에서 적당한 옷을 사서 입었다.
나는 옷을 고른 후 수난 클라한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수난 클라한 씨도 옷 하나 골라 보세요."
수난 클라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가이드 중에는 손님께 선물을 받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고 있는 양복이 더워 보이는데···.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고 본인이 거절하는데 계속 권할 수는 없었다.
계속 권하지 않은 이유 중에는 옷가게 점원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도 있었다.
내가 본래는 옷가게를 자주 가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류오린에서 일하는 동안 해외 출장을 다니면서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옷가게를 가야 할 때가 있었다.
해외 출장은 주로 아시아 지역이었다.
말이 아시아 지역이지 같은 2월이라도 날씨가 전혀 달랐다.
예를 들어 2월의 홍콩이 초가을 날씨라면 베이징은 2월은 영하 10도까지 내려갔고 서울은 그보다 덜 추웠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도쿄는 늦가을 날씨였다면 방콕은 여름 날씨였다.
내가 비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매번 방문하는 국가의 날씨를 생각해서 옷을 챙겨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혼자 일하는 데 굳이 불편한 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다.
이렇다 보니 해외 출장을 갈 때 옷을 새로 사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길게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내가 현지에서 옷을 사는 데 경험이 꽤 많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오늘처럼 점원들의 대접이 깍듯한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경호원을 데리고 다닐 정도의 신분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옷을 권하면서 슬쩍 유혹하는 여직원들의 추파가 없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런 경험을 하다 보니 어쩌면 저 복장도 스노우 투어 회사 나름의 영업전략일 수도 있었다.
사실이라면 리 슈의 사업 수완은 꽤 괜찮다고 봐야 했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호텔을 나서자 호텔을 들어올 때는 느끼지 못했던 상쾌함마저 느껴졌다.
"저녁을 먹기에 적당한 식당이 있나요?"
나는 고개를 돌려 수난 클라한에게 물었다.
"방콕을 방문하신 분 중 많은 분이 디너크루즈를 이용하시더군요."
차오프라야강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중 하나로 꼽히는 명소 중 하나였다.
디너크루즈는 바로 그런 강에서 배를 탄 채 저녁 식사를 하면서 강을 관광할 수 있는 코스였다.
방콕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코스였다.
"마음에 드네요. 그런데 지금 5시인데 예약이 가능한가요?"
디너크루즈는 보통 7시에 출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명한 관광코스인 만큼 예약이 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방콕의 관광시즌 성수기인 2월이었다.
"제가 회사에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디너크루즈가 인기가 많기는 비슷한 서비스를 하는 회사가 많아서 운이 좋으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수난 클라한은 곧바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하던 수난 클라한이 나를 보며 말했다.
"마침 샹그릴라 디너크루즈에 자리가 있다고 하는군요. 여기 태국 요리가 괜찮습니다. 예약을 잡으라고 할까요?"
"좋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샹그릴라 디너크루즈는 이름을 들어보니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 체인인 샹그릴라 호텔에서 운영하는 듯했다.
생각보다 리 슈가 운영하는 여행사의 수완이 좋은 듯 보였다.
방콕의 디너크루즈는 방콕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코스였다.
아무리 자리가 남더라도 어지간한 수완이 없다면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옷가게에서 일도 그렇고 리 레이와의 관계 때문에 이용한 여행사는 생각보다 쓸만한 것 같았다.
다만··· 비용은 좀 나갈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리 슈나 수난 클라한 둘 모두에게 요금을 묻지 않았다.
샹그릴라 디너크루즈는 생각보다 더 괜찮았다.
특히 배 안에서 먹는 태국 음식은 상당히 맛있었다.
홍콩에서도 바쁠 때 자주 태국 음식을 시켜 먹기는 했지만, 기분인지 더 맛있는 것 같았다.
다음날 수난 클라한의 안내를 받아 낮에는 태국 왕궁과 짜뚜짝 시장을 구경하고 밤에는 카오산 거리에 가서 맥주도 마시면서 여유롭게 보냈다.
수난 클라한은 관광 가이드로서도 굉장히 유능했다.
그리고 월요일 기다렸던 탁신 정부의 첫 국무회의가 열렸다.
국무회의 직후 탄신 정부는 몇 가지 주요 정책을 발표했다.
정책 대부분은 대중영합주의적 성격을 가진 선심성 정책들이었다.
농가 부채를 3년간 상환을 유예한다거나 전 국민에게 병원 치료비를 일정 비용까지는 정부가 일괄적으로 부담하겠다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마을 하나당 백만 밧화, 달러로 2만 3천 불 정도의 자금을 지원해서 마을 특산물을 개발하겠다는 정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탁신이 서민들의 지지로 당선된 만큼 예상된 정책들이었다.
하지만 내 관심을 끈 것은 이런 정책들보다 은행 부분에 대한 개혁이었다.
이른바 부실채권전담은행을 세워서 은행들의 악성 부채를 상당 부분 줄이고 은행 부분에 대해 개혁을 하겠다는 공약이었다.
경제위기를 겪은 많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많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만큼 그만큼 효과는 어느 정도 검증된 방법이기도 했다.
당연히 주식 시장에는 호재 중 호재였다.
나는 호텔 방에서 국무회의 결과를 보자마자 곧바로 홍콩으로 전화를 걸었다.
"방콕에서 잘 놀고 있어?"
리안이 말했다.
그의 말투에서도 불만이 느껴졌다.
자신은 일하고 있는데 파트너가 해외 관광지로 출장을 가서 오지 않는다면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는 불만이었다.
"누가 논다는 거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그래 믿어줄게."
심드렁한 말투였다.
"사람 말을 못 믿네.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마···."
"네가 류오린 회사 카드로 결제한 명세 다 회사로 통보되거든···."
"···."
나는 순간 말을 하지 못했다.
아무 생각 없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결제했는데 그게 류오린에서 지급한 회사 카드였다니···.
"거기 보면 네가 카드 쓴 곳이 다 나오는데 일을 열심히 했다고? 아무리 왕 웬준 팀장이 이제는 간섭 못 한다고 관광지에서 펑펑 쓰는 것은 좀 아니잖아?"
"다 이유가 있다니까."
"그렇겠지. 믿어줄게. 그런데 왕 웬준 팀장은 그렇다고 해도 이거 나중에 감사 나올 수도 있으니 출장보고서 잘 만들어 놓아야 할 거야."
"알았어. 인도네시아 주식이나 다 팔아."
"뭐!"
놀란 말투였다.
인도네시아 주식을 산 것이 지난주 그것도 수요일부터였다.
다음날에 산 주식도 있으니 거래일 기준으로 산 지 이틀이 겨우 지난 주식들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주식 다 팔고 다 파는 대로 되도록 빨리 태국 주식을 사들여. 은행주 중심으로 사라고···."
"뭐가 있는 거야?"
"태국 새 정부가 은행 부분 개혁을 한다고 조금 전에 발표했어. 내가 주가를 살펴보니 보통 새 정부가 들어서면 한두 주는 오르는데 지난달 말부터 몇 주 연속으로 떨어졌었더라고···."
"떨어질 만큼 떨어졌으니 오를 때가 됐다는 말이네. 그 와중에 새로운 정부가 호재를 내놓은 것이고···."
"이번에는 최소 4~5% 이상 오를 것 같아. 그 이상은 어렵겠지만 일단 은행주를 사서 주가지수 4% 이상 오르기 시작하면 팔기 시작해서 주가지수가 5%가 되기 전에 다 팔면 될 것 같아."
"태국 금융회사들은 조사해 놓은 것이 있으니 어렵지 않을 거야. 운이 좋은 놈은 놀다가 본 뉴스에서도 투자 소스를 얻네."
"논 것 아니라니까!"
"믿어주는 척은 해볼게. 나만 믿어서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 진짜···."
"그럼, 일 열심히 하는 에드릭 손 씨···. 언제 돌아올 거야?"
"만날 사람이 있어서 내일은 되야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잘 놀다 와!"
리안은 자신의 말만 마치고 바로 끊었다.
"진짜 노는 것··· 맞지."
방콕에 있는 동안 논 것이 맞았다.
쓰려던 보고서도 첫날 방향만 잡아놓은 채 하나도 쓰지 않았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태국에 대한 보고서를 쓰자면 탁신 신정부의 국무회의에서 발표될 정책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그렇지만 사실 이건 핑계였다.
오늘 발표된 정책 대부분은 이미 예상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보고서를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고서야 내가 정신적으로 지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쉬었으니 다시 시작할 시간이었다.
나는 그날 밤.
수난 클라한과 함께 리 레이, 리 슈 남매를 만나러 갔다.
그들을 태국 현지의 정보원으로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들에게는 CIA가 아니라 류오린 투자회사의 이름을 내세울 생각이었다.
지금도 필리핀에서 정보를 보내오고 있는 리코와 같은 위치였다.
다만 이들은 리코처럼 몇천 불로 끌어들 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남매는 뭐로 회유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