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람.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리안은 문을 굳게 닫았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회의실 안쪽으로 끌고 갔다.
"무슨 일이야?"
"왕 팀장이 갑자기 미쳐 날뛰고 있어."
리안이 말했다.
"왕 팀장이? 뭔 일을 벌였는데?"
"내 고객들에게 너와 내가 같이 투자하는 사실과 수익률을 알렸더라고···. 그래서 나에게 돈을 맡긴 분들이 자신들의 돈을 네가 관리하는 투자금과 같이 투자하기를 요구하고 있어."
"뭐?"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지금처럼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내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로서는 근거가 있는 투자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자료만으로 투자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누가 손해를 보겠는가?
내 투자는 내 느낌이나 감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리안의 고객 돈을 함께 투자하려면 매번 투자할 때마다 먼저 동의를 구해야 했다.
"왕 웬준 미친 것 아냐?"
왕 웬준이 팀장이기는 하지만 팀원들의 투자 수익률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권한은 없었다.
팀원들이 하는 투자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고객들의 투자를 대행하는 것이었다.
왕 웬준이 하는 짓은 고객의 투자 정보를 밖으로 유출한 범죄행위였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지난주 내가 태국으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은 것 같았는데?"
나는 왕 웬준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 웬준은 지난달에도 나를 자신의 팀에 남게 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계좌의 돈을 다른 은행으로 이체하는 실력행사를 통해 그를 굴복시켰다.
그때 왕 웬준과는 어느 정도 타협을 했다고 생각했었다.
"밖에 새로운 팀원들 온 것 봤지?"
"모르는 얼굴이 있더군."
"월요일 날 새로운 팀원들이 왔는데 그때부터 조금 이상해 보이더니 어젯밤에 내 고객들에게 전화를 쫙 돌린 것 같아. 오늘 오전 내내 전화 받느라 다른 일을 할 틈이 없을 정도야."
"그게 이런 미친 짓을 한 이유라는 말이야? 겨우 이틀이잖아?"
"불안해 보이기는 했지만 너나 나를 건드릴 줄은 정말 생각해 못했어."
"왕 웬준이 불안해할 만한 일이 있기는 했다는 말이야?"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손을 잡고 회의실 창가로 끌고 갔다.
리안은 블라인드를 올리며 말했다.
"저기 따로 떨어진 책상에 앉아있는 사람이 새로운 부팀장이야. 웬 지하오라고 왕 웬준과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라고 하더군."
리안이 가리킨 책상에는 왕 웬준과 비슷한 나이의 남성이 앉아있었다.
그는 무언가 바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공붓벌레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누군가 자극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왕 웬준과는 같은 상하이 출신으로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상하이에서도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다고 하더라고···."
"그래?"
단순히 동향 출신이고 같은 학교에 다닌 사이라면 왕 웬준이 불안해할 이유가 없었다.
중국인들은 외지에서 동향 출신들끼리 향관이라는 것을 토대로 똘똘 뭉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도 불안해한다면 한 가지 이유밖에는 없었다.
"뭐 라이벌 비슷한 건가?"
"라이벌이라기 보다는 일인자와 이인자에 가까운 사이지. 이인자는 물론 왕 웬준 팀장이고···.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알아보니 왕 웬준 팀장이 홍콩에 온 이유도 상하이에 있을 때 회사에서 웬 지하오 부팀장에게 승진에 밀려서 온 것이라는 말이 돌더라고···."
"뭔가 좀 복잡하네. 그럼 어떻게 된 거야? 상하이에서 왕 웬준을 밀어낸 사람이 몇 년 지나서 왕 웬준 밑으로 온 거야?"
예전 자신을 이겼던 상대가 그냥 부하로 온 것이라면 왕 웬준이 저렇게 날뛸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봐야지."
새로운 팀이 회사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소문을 생각하면 이번에도 왕 웬준이 밀린 셈이었다.
왕 웬준이 어떤 심정일지는 나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대학에서 풋볼을 하던 시절 다른 사람에게 밀린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실력으로 밀렸다기보다는 아시아계라는 사실 때문에 밀린 것이니 왕 웬준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누군가에게 경쟁에서 계속 밀린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건 본인의 능력에 자부심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 힘들었다.
나나 리안에게 무시를 받기는 하지만 왕 웬준 팀장이 중국에서는 상위 0.1% 안에 드는 엘리트였다.
다만 지금 상황이 완전히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상황은 알겠는데 네 고객은 왜 건드린 거야? 어차피 너나 내가 자기 라이벌 밑으로 들어갈 것 같으니 초라도 치겠다는 거야?"
리안은 왕 웬준의 부하이기 이전에 홍콩 명문 출신이자 류오린의 대주주였다.
아무리 왕 웬준이 중국 본토 출신이라도 그런 리안을 대놓고 자극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리안의 고객들이라면 리안의 집안과 친분이 있는 홍콩의 부호들이었다.
아무리 왕 웬준의 뒤에 중국 인맥 있더라도 쉽게 이용할 수 없는 거물들이었다.
"미친 짓이라고 했잖아. 지금 왕 웬준이 앞뒤를 가릴 상황이 아니거든···."
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뭐가 더 있는 거야?"
리안은 다시 블라인드를 걷어서 손으로 리안과 내 책상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저기 내 옆에 누가 앉아있는지 봐."
나는 리안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자 직원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른바 오피스룩이라고 불리는 세련된 여성이었다.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글쎄···."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미인의 문제점 중 하나는 처음 보는 사람도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점이었다.
"춘절 파티···."
나는 리안의 말을 듣고서야 이야기를 나눴던 상대가 떠올랐다.
"아··· 그 충칭에서 왔다는 장 샤오이라는 아가씨?"
옷이나 몸짓이 전혀 달라서 알아보지 못했다.
'명색이 스파이인데 사람을 몰라보다니···.'
"맞아."
"그런데 저 아가씨가 왜?"
"저 아가씨 집안이 양바이빙(楊白?)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설마 그 양상쿤(楊尙昆)의 동생인 그 양바이빙?"
"맞아."
양상쿤은 이른바 중국 혁명 8대 원로 중 한 명으로 90년대 초 물러나기 전까지 군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동생인 양바이빙도 90년대 초 군에서 물러나기 전에 군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둘이 물러날 때 중국군의 최고위 장성 절반이 물러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저 아가씨가 충칭에서 왔다고 했었다.
양상쿤, 양바이빙 모두 충칭 출신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전화 통화를 계속하고 있는 장 샤오이를 바라보았다.
만약 리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아가씨는 태자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혁명 8대 원로 후손들이 공직에 나서기보다는 기업가로 변신했다는 말은 듣기는 했다.
2세대가 중국 국영기업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면 3세대인 손자 손녀 중 상당수는 미국에서 유학해서 미국 금융기관에 근무하는 예도 많았다.
태자당 출신의 아가씨와 왕 웬준과 비슷한 경력을 가진 상하이에서 온 부팀장···.
이제야 뭔가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웬 지하오는 왕 웬준과 너무 경력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리안의 말대로라면 웬 지하오는 왕 웬준보다 한발 앞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임시로 몇 달만이라도 해도 웬 지하오가 왕 웬준 밑에 있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혹시 왕 웬준이 아예 회사에서 밀려나는 거야?"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번 달 말에 웬 지하오 부팀장을 팀장으로 발령낸다는 말이 있어."
"그렇게 갑자기?
"전부터 라이창싱(Lai Changxing)의 돈세탁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아."
라이창싱은 중국 역사상 최악의 밀수범으로 불리는 사람이었다.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이곳 홍콩과 샤먼을 중심으로 자동차, 석유, 담배 등등 무려 274억 위안(5조 원)에 가까운 밀수를 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중국에서 이런 일은 관리들의 묵인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관리들에게 뇌물을 상납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홍루라는 건물에 중국 각지의 미인을 모아놓고 관리들에게 성 상납을 한 일이었다.
라이창싱은 성 상납을 하면서 비디오를 찍어서 보관했었다.
자신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라이창싱은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도주했다.
체포된 것은 라이창싱에게 뇌물과 성 상납을 받은 60여 명 정도의 관리들이었다.
그중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만 12명이 넘었다.
하지만 체포된 관리들은 대부분 하급관리였다.
그런 하급관리들만의 힘만으로 이런 대규모의 밀수가 가능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라이창싱의 밀수 뒤에 장쩌민을 비롯한 상하이방의 방조가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작년 12월에 라이창싱이 캐나다에서 체포됐다고 하더니 꼬리를 자르려고 하는 것인가?"
체포됐다고 해서 캐나다가 곧바로 라이창싱을 중국으로 송환할 가능성은 작았다.
그건 라이창싱 본인은 물론이고 캐나다 중국 모두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상하이방으로서는 미리미리 라이창싱과 관련된 일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런 것 같아. 끈 떨어진 신세가 된 왕 웬준 팀장으로서는 뭐라도 하려는 것이겠지."
왕 웬준이 미쳐 날뛰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이대로 류오린에서 밀려나 중국으로 돌아가도 그에게 남은 인생은 없었다.
목숨을 건지고 어떻게 감옥에 가는 일은 피한다고 해도 그가 다시 재기하기는 어려웠다.
어쩌면 새로운 팀을 만든다는 말 자체가 왕 웬준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리안의 고객들에게 잘 보인다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리안의 고객 대부분은 홍콩의 대부호들이었다.
그들의 호의를 받는다면 왕 웬준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상황은 이해가 가는데 왜 하필 나야?"
이 상황이 짜증이 났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가 류오린에 오기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내가 왜 피해를 봐야 한다는 말인가?
"몰라서 물어? 내 고객분들의 흥미를 사려면 너 정도 수익은 돼야지."
"아, 젠장!"
저절로 입에서 욕이 나왔다.
"어쨌든 네 고객분들께 전해. 나는 다른 분들의 투자를 더 받을 생각 없다고···."
리안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사정은 아는데···. 대부 어르신들이 이해해 주실지 모르겠네."
"설득할 자신 없으면 파트너 하는 것 그만둬야지···. 최악의 경우에는 류오린을 나가도 나는 상관없어."
"알았어."
내 단호한 말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각오는 해야 할 거야. 대부 어르신들이 몰랐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거야. 네가 아시아에 있는 이상 그분들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어."
맞는 말이었다.
아시아에서 있는 이상 홍콩 화교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보자. 어쨌든 지금은 우선 왕 웬준 팀장, 이 새끼와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
"왕 웬준 팀장도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지만 이야기를 해봐야 소용이 없을 거야. 나도 너 오기 전에 이야기를 해봤는데 말이 안 통하더라고···."
나는 회의실을 나가기 전에 고개를 들었다.
회의실 천장에는 내 상황과는 반대로 형광등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목덜미가 당긴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언젠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목덜미가 뻐근하고 두통이 발생하는 이유가 혈압이 상승하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 양쪽 어깨 근육과 목 근육이 수축하기 때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런 현상이 라이창싱의 캐나다에서의 체포라는 돌아돌아 전혀 상관없던 내 삶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