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37화 (38/270)

서몽

# 왕 웬준.

나는 회의실을 나와 그대로 왕 웬준 사무실을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모였다.

그중에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웬 지하오와 장 샤오이의 시선도 있었다.

"에드릭입니다."

노크하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왕 웬준은 자신의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 오나 기다렸네."

애써 태연함을 연기하고 있지만, 그의 표정은 예전과는 달랐다.

무언가 쫓기듯 초조한 표정이었다.

나는 왕 웬준의 말도 듣지 않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왕 웬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 소파에 앉자마자 내가 먼저 말했다.

"지난번에 서로 자극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랬지. 하지만 상황이 변하면 약속도 달라져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지. 새로운 상황에는 새로운 약속이 필요한 법이네."

"상황이 변한 것은 팀장님 사정인데 내가 왜 새로운 약속을 해야 하죠?"

내 말에 왕 웬준이 미소를 지었다.

마치 내 말이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 내 상황만 변했다고 생각하나? 아니지 자네 상황은 변한 것이 없을지 모르지. 하지만 내가 자네에 대해서 전에는 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조건도 달라져야지."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태국에서 어제 전화를 받았는데 말이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

"···."

태국에서 나와 관련해서 왕 웬준에게 전화를 할 사람이라면 리 레이 정도였다.

아무래도 내가 리 슈의 여행사에 투자에 대해 왕 웬준에게 전화를 한 것 같았다.

내가 리 슈의 여행사에 투자한 이유는 태국에서 안정적으로 나에게 협조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리 레이는 본인은 탁신을 싫어하는 것 같지만 현 탁신 정부의 유력 인사들과 친분이 있었다.

장관들 대부분을 측근을 임명한 탁신이라면 그들은 탁신이 총리로 있는 이상 계속해서 정권에서 큰 역할을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 유력자들과 친분이 있고 그들과 나를 연결해줄 수 있는 리 레이는 지속해서 관리해야 할 인맥이었다.

"리 레이 동생 여행사에 투자했다고 하던데 맞나?"

"맞습니다."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여행사에 직접 투자라···. 왜 거기에 투자했는지는 묻지 않겠네. 내가 알 필요도 없고 말이야."

나도 생각 같아서는 리 레이의 자동차 부품 회사에 직접 투자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리 레이는 별로 투자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리 레이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가지려면 몇십만 불 단위가 몇백만 불 단위로 투자해야 했다.

지금 내 투자 수익률을 생각하면 현재의 몇백만 불은 일 년 후 몇천만 불의 가치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리 슈의 여행사였다.

단순히 리 레이와의 친분을 생각해서 한 투자는 아니었다.

리 슈는 물론 예쁘고 능력도 있어 보이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태국에 머무는 동안 가이드를 해주었던 수난 클라한이었다.

정확하게는 수난 클라한의 군경력 때문이었다.

군사정권은 끝났지만, 태국의 최대 정치 세력은 여전히 군대였다.

나로서는 여러 번 생각하고 한 결정이지만 그게 왕 웬준에게 빌미를 준 것 같았다.

"내가 알아보니 이번 태국 여행사에 투자에서 류오린은 제외됐더군. 회사 계좌에서 돈은 빠져나가고 투자는 진행됐는데 회사가 얻은 이익은 없더라는 말이야."

보통의 경우 류오린에 투자된 자금의 경우 이런 직접 투자도 류오린을 통해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제 류오린의 주요 수입은 주식을 거래해서 얻는 매매수수료가 아니라 바로 해외의 화교 자금을 중국에 투자해서 얻는 중계수수료였다.

최근에 주식 매매수수료 비중이 커지고는 있지만 나와 리안을 제외하면 실제 이런 매매수수료는 아직 류오린의 수입 중 아주 작았다.

하지만 내가 관리하는 AAM의 투자금의 경우는 이런 직접 투자에 관한 조항 자체가 없었다.

투자 자체가 에디 미첼의 기술주 투자 손해를 떠넘기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연히 직접 투자를 할 경우는 생각하지 않았다.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으신 것 같군요. 류오린과의 계약은 주식이나 채권을 거래할 때만 적용되는 계약입니다. 직접 투자는 AAM의 회사 재량이고 이전에도 한 이야기지만 AAM 투자금을 어떻게 쓸지에 관한 결정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맞네."

왕 웬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인정했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잘 알고 있네. 에드릭 자네가 AAM 자금에 진짜 전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전화를 받고 난 후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과연 자네가 그런 권한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야."

왕 웬준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나는 그런 감정을 최대한 숨기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계약서에 처음부터 이미 나와 있는 내용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자네는 그런 권한이 있으면서도 무려 연말까지 반년 동안 거래를 할 때마다 손해를 봤지. 말 그대로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할 정도로 말이야. 아무리 무능하더라도 반 년 동안 계속 손해를 보는 예는 없는데 말이야."

"그야 제가 거래를 하던 시점에 시장이 내림세라서···."

내 변명에 왕 웬준이 코웃음을 치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나와의 대화에서 우위를 차지했다고 생각한 듯 거만한 모습이었다.

"자네는 내가 바보로 보이나? 자네가 왜 그런 손해가 뻔한 거래를 반년 동안 했는지 모를 정도로?"

"···."

왕 웬준이 투자회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바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과 맞지 않은 투자회사에서도 왕 웬준의 실적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른 팀원들보다는 훨씬 나은 성과를 꾸준히 내고 있었다.

"자네가 달라진 시점은 도이치뱅크의 에디 미첼 본부장의 사고 이후지. 그 사고 이후 자네가 거래하는 주식 종목부터 거래 패턴까지 모든 것이 변했네. 당연히 수익률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지. 그럼 자네가 진짜 투자금에 대한 전권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일까?"

왕 웬준이 몸을 일으키며 나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에디 미첼 본부장이 죽고 나서 자네가 투자금에 대한 진짜 전권을 가지게 됐다는 내 생각이 착각인가?"

왕 웬준의 위협적인 태도에 나는 이대로는 끌려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양 손바닥을 위로 펴며 말했다.

"그래서요? 제가 투자금에 대한 전권을 작년 연말에 가지게 된 것이 뭐가 문제라는 말입니까? 회사에 손해를 입힌 것도 아닌데요? 류오린을 빼고 10만 불 정도 직접 투자한 것이 큰 문제라도 됩니까?"

내 말에 왕 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문제가 될 것은 없지. 회사에 막대한 수익도 가져다주고 있고 수익도 높으니까. 자네는 정말 유능한 투자자야. 아마 홍콩 금융회사를 다 뒤져도 지난 두 달 동안 자네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얻은 직원은 거의 없을걸. 홍콩 최고라면 아시아 최고라고 봐도 되지."

나는 도대체 왕 웬준이 무슨 수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뜬금없이 나를 아시아 최고의 투자회사 직원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또 뭐라는 말인가?

"감사합니다."

"아니야, 자네는 실제로 뛰어나. 그런데 말이야."

왕 웬준이 음흉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밖에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뛰어난 직원인 자네가 왜 여기 홍콩 금융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을까?"

왕 웬준의 말에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건 홍콩을 비하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자네 정도라면 뉴욕이나 런던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설마 이 자가 내 정체를 알아낸 것인가?

"자네가 어느 날 갑자기 투자에 눈을 뜬 것이 아니라면 도이치뱅크에서도 뛰어난 직원이었겠지. 에디 미첼 본부장이 자기 일을 맡길 만큼 말이야. 그래서 내가 알아봤는데···. 자네는 도이치뱅크에 근무한 적이 없더라고···."

나는 양복 주머니 상의에 있는 펜을 손으로 잡았다.

혹시라도 왕 웬준이 내 정체를 알아냈다면 이 자리는 위험할 수도 있었다.

중국 본토 출신인 왕 웬준이라면 중국 정부를 통해 나를 조사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홍콩 정부에 알려 나를 스파이로 체포할 수도 있었다.

"제 뒷조사라도 하셨나 보네요."

"했지. 자네도 알겠지만 요즘 세상에 화교가 없는 금융기관은 없지. 도이치뱅크에 있는 아는 사람들 통해 자네에 대해서 알아봤지만, 결론은 마찬가지더군. 바로···"

나는 펜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주위를 살폈다.

혹시라도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자네 도이치뱅크와는 관련이 에디 미첼이 개인적으로 고용한 사람이라는 것이 내 결론이야? 아닌가?"

왕 웬준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렸다.

왕 웬준이 알아낸 것은 내가 도이치뱅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정도인 것 같았다.

스파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낸 것은 아니었다.

하긴 중국 정부가 나서도 내가 CIA 요원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어려웠다.

일단 내가 직접 CIA에 근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내가 너무 앞서간 것이다.

나는 긴장했던 손의 힘을 풀며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설사 팀장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게 문제가 되나요?"

왕 웬준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이제 다 끝났다는 듯한 태도였다.

"정말 문제가 되지 않을까? 나는 말이야. 작년 연말 이후로 자네가 관리하던 투자금을 자네가 가로챘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게 아니라면 지금처럼 투자금을 멋대로 사용하는 것이 말이 되지 않거든···. 펀드에 든 것이라면 모르지만 그게 아닌 이상 아무리 직원을 믿는다고 해도 그런 거금을 투자회사 직원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투자자는 내가 알기로는 없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저를 사기꾼으로 모시네요."

서류상으로 왕 웬준이 증거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도이치뱅크에서 AAM 사이의 자금 흐름은 공식적인 단계만 5단계였고 그 사이에 거쳐 간 금융기관은 엄청나게 많았다.

유럽 금융계의 거물이었던 에디 미첼이 자신의 투자 실패를 감추기 위해 만든 거래였다.

왕 웬준이 아니라 미국 국세청이 조사한다고 해도 AAM까지 찾기 위해서는 몇 년은 걸릴 일이었다.

그렇게 추적에 성공한다고 해도 AAM의 주인은 바로 나였다.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도 도이치뱅크에서 처음 빌린 이천만 불만 갚으면 그만이었다.

"정말 그럴까? 자네가 관리하는 투자금. 아니 이제 자네가 전권을 가진 게 된 투자금이 나온 도이치뱅크에 내가 전화해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이야기하세요."

"뭐?"

내 말에 왕 웬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실망스럽네요. 뭔가 대단한 것이 있을 줄 알았는데 겨우 그 정도라니요. 팀장님 말처럼 투자금이 제 것이 됐다면···. 물론 저는 그냥 투자금을 관리하는 것뿐이지만요. 혹시라도 투자금이 진짜 제 소유가 됐다면 류오린에서 제게 이렇게 나오면 안 될 텐데요."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른 분들도 팀장님이 이러고 다니시는 것 알고 있나요? 아···. 어차피 곧 팀장 자리에서 밀려나신다죠?"

"내가 너나 지하오 같은 새끼들 때문에 밀려날 것 같아!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왕 웬준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물론 알죠. 팀장님 능력이 좋으신 것···. 운이 좋으면 홍콩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도 있을지도 모르지요. 제가 홍콩에 없을 때 회사를 떠나시면 많이 아쉬울 것 같네요. 소식을 듣고 한 10분 정도는요."

말을 마치고 나는 왕 웬준의 사무실을 나왔다.

아무래도 일이 이대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리안에게 들었던 것보다 왕 웬준이 느끼는 불안이 더 큰 것 같았다.

저렇게 궁지에 몰린 인간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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