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첫 실전.
"오늘도 퇴근 안 해?"
리안이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요 며칠 다른 팀원들이 퇴근한 이후에도 내가 회사에 남아 있는 모습에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스닥 증시 좀 더 확인하고···. 너도 알겠지만 내 돈으로 나스닥 선물하고 옵션까지 해서 하락에 투자했잖아."
내 말에 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너도 사람이기는 하구나···. 하긴 56만 불이 적은 돈도 아니지만 레버리지도 풀로 썼으니 걸린 돈이 얼마야."
리안은 잠시 내 모니터에 띄워진 내 선물계좌를 확인하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미친···. 그동안 25% 가까이 떨어졌으니 설마 천오백만 불을 번 거야?"
"뭐···. 대충 그 정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 달 사이 나스닥 폭락에 꽤 큰 이익을 얻었을 거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건 뭐 상상 이상이네. 너 혹시 너희 집안이 우리 아버지보다 많은 거 아니야?"
"그건 또 뭔 참신한 개소리야?"
나는 리안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리안 아버지가 얼마나 재산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리안은 홍콩의 중심인 센트럴에만 빌딩을 몇 채나 가지고 있었다.
1997년 바닥까지 떨어졌던 홍콩 부동산 가격이 회복하면서 재산이 말 그대로 하룻밤만 자면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잖아. 이 정도 돈을 선물옵션에 투자했으면 나는 물론이고 우리 아버지도 밤에 잠을 못 잘 금액인데···. 내가 너라면 일본이니 태국이니 출장을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매일 나스닥 선물 시세창만 들여다보겠다."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원금은 56만 불이잖아. 그런 것 생각하면 투자 못 하지."
"그걸 말이라고···. 그 정도 벌었으면 팔아야···. 알았다. 내가 뭔 말을 하겠냐. 아 씨···. 나도 좀 더 투자하거나 좀 늦게 팔걸···. 배만 아프네. 어때? 지금이라도 들어가도 될 것 같냐?"
리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내가 알면 퇴근 안 하고 남아서 나스닥 시세를 보고 있겠냐?"
"하긴 그렇지. 계속 봐야 배만 더 아프지. 그럼 나는 이만 간다."
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짐을 챙겨 퇴근했다.
뉴욕증시나 나스닥을 확인하고 위해 남아 있던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 퇴근해 사무실에는 나만 남았다.
나는 모두 퇴근한 것을 확인하자 책상에서 작은 가방을 하나 꺼내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들어간 나는 가방에서 길쭉한 전자기기를 꺼내 이어폰을 연결했다.
'내가 이걸 진짜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네.'
전자기기는 홍콩으로 올 때 CIA에서 받은 도청 수신 장치였다.
도청기가 설치된 곳은 당연히 왕 웬준의 사무실이었다.
방콕에서 돌아온 바로 그날 바로 설치했다.
리안에 말을 듣고 왕 웬준의 사무실에 찾아갔을 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설치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소파에 몸을 기대며 도청기를 숨겨놓았다.
사무실을 나올 때 본 왕 웬준의 눈빛을 보며 도청기를 설치한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날 이후 매일 밤 회사에 남아서 녹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아직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다만 왕 웬준이 느끼는 위기감이 얼마나 큰지는 알 수 있었다.
리안의 말과는 달리 왕 웬준이 라이창싱 사건과 크게 연관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중국 고위층 처지에서 왕 웬준은 부품일 뿐이고 문제가 될 수 있는 부품을 계속 쓸 이유가 없을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금 세탁을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라이창싱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흠 있는 왕 웬준을 쓸 이유는 전혀 없었다.
괜히 왕 웬준이 있는 팀을 통해 해외로 돈을 빼돌렸다가 나중에 라이창싱이 중국으로 송환되고 조사가 시작됐을 때 다른 자금 유출도 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 웬준은 나름대로는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나도 따로 조사해 보니 왕 웬준이 판단력을 잃고 행동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왕 웬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학벌도 있고 능력도 뛰어난 사람이 류오린 팀장에서 밀려나는 것에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미국과 중국의 차이를 아직 정확히 구분하지 못한 내 착각이었다.
미국도 이미 능력만으로 성공하는 나라는 아니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말 그대로 아메리칸 드림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한두 번 실패해도 정말 능력만 있으면 재기할 기회를 가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공산당을 정점으로 아래로 계층이 명확히 구분되는 국가였다.
그런 사회에서 공산당 고위층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곧 영원히 신분 상승을 할 기회를 잃는다는 의미였다.
능력과 야망을 품은 30대가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중국 본토의 인맥과 지원을 다 버리고 다른 나라에서 시작하는 것도 어려웠다.
최근에 미국이나 유럽의 회사들이 중국인 인재를 많이 뽑고 있기는 하지만 그 대부분은 중국 본토와의 사업에서 써먹기 위해서였다.
중국 공산당 고위층에 찍힌 왕 웬준을 이런 이유로 뽑을 회사는 없었다.
결국, 본인의 능력과 가진 돈으로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왕 웬준이 아무리 류오린에서 높은 연봉을 받았다고 해도 그 정도는 여생을 나름 풍족하게 보낼 정도였지 무언가를 시작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새끼가 진짜 미쳤나!"
녹음을 빠르게 확인하던 나는 순간적으로 욕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다시 조금 전 들었던 부분을 다시 확인했다.
내가 다시 듣는 부분은 왕 웬준이 사무실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내용이었다.
통화 상대의 목소리는 알 수 없었지만 왕 웬준의 목소리는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호텔은 보안이 철저해서 힘들 테니 그 건물에 있는 사무실에 있을 때를 노려. 이틀에 한 번은 사무실에 들르는 것 같으니까.
-그래. 계좌의 자금을 빼 올 수 있게 정보를 알아내라는 말이야.
-뭐? 그것까지 말해줘야 해? 시체는 네가 알아서 처리해야 할 것 아니야!
-서둘러. 또 언제 홍콩을 떠나 출장을 가는지 몰라. 외국에서는 어렵다니까. 그놈이 뭐가 불안한지 경호원을 항상 고용하는 것 같아.-
-그런 자본주의 나약한 개새끼 하나 처리하는데 뭔 돈이 그렇게 많이 불러. 알았어. 그 새끼가 가진 돈도 꽤 되니 거기서 알아서 떼줄게.
왕 웬준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나약한 개새끼는 아무래도 '나'인 것 같았다.
도청 내용은 왕 웬준이 누군가에게 나에 대한 살인 청부하고 내가 관리하는 투자금을 빼돌리려는 시도였다.
홍콩에서 돌아온 날 이후에도 왕 웬준은 며칠 동안 계속 나에게 이런저런 미끼를 던지며 자신과 같이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오늘은 왜 잠잠하나 했더니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나는 왕 웬준이 라이창싱 사건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으면 정보원으로 끌어들일 생각도 있었다.
라이창싱 사건은 지금 중국 지도부 그중에서도 상하이방이 대대적으로 연관된 사건이었다. 만약 라이창싱 사건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조커 패를 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미국에 충성하는 스파이였다면 바로 왕 웬준이 라이창싱과 관련됐다는 말을 처음 리안에게 들었을 때 CIA에 알려야 했다.
만약 왕 웬준이 라이창싱 사건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이번에 세운 성과로 내가 예전에 원했던 백악관이나 국무부를 통해 출세하는 길을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실을 CIA에 알리지 않았다.
CIA에 보고하는 순간 내 류오린에서의 생활은 그 순간 끝날 가능성이 컸다.
나는 최근에 본래 1억 불 정도를 모으면 CIA를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CIA에 들어갈 때 가졌던 야망과 최근에 정한 목표 사이에 고민하는 동안 왕 웬준, 이 새끼가 내 목숨을 노린 것이다.
'이제 고민할 필요는 없겠네.'
나는 곧바로 화장실을 나와 왕 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단하신 분이 먼저 전화를 걸다니··· 이거 영광이군. 무슨 일인가?"
"이야기 좀 나눴으면 합니다."
"이야기? 허···. 무슨 이야기? 내 제안들을 계속 거절하더니 왜 갑자기?"
왕 웬준은 내 갑작스러운 연락에 당황하는 듯한 말투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밤에 제가 댁에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오늘 밤 말인가?"
"예, 회사인데 지금 하는 일만 처리하고 찾아뵙겠습니다."
"···. 알겠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내 자리로 돌아와 설치해 두었던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그리고 사무실을 나와 계단을 통해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왕 웬준의 집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왕 웬준의 집은 홍콩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은 단독주택이었다.
물론 왕 웬준의 소유가 아니라 류오린이 홍콩 부동산 가격이 바닥일 때 투자 목적으로 구매한 집을 팀장인 왕 웬준에게 빌려준 집이었다.
홍콩에서는 고급 주택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주변은 물론이고 집도 보안이 꽤 좋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정보분석 요원이기는 했지만 나는 정규 훈련과 셔먼 켄트 정보학교까지 수료한 스파이였다.
이 정도 보안을 피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보안이 허술한 장소를 찾아 담을 넘었다.
다행히도 개는 키우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창문을 다가갔을 때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목표가 제 발로 호랑이 굴에 찾아온다는 말이죠."
"그래. 할 말이 있다고 하는데 이미 늦었지."
"정말 괜찮겠습니까? 미국 시민권자고 나온 학교들을 보면 인맥도 막강할 것 같은데···. 실종되면 조사가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이거 조직에서도 모르게 처리하는 일이라서 사실이 밝혀지면 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와 나와 흥정하자는 거야? 투자금을 빼돌리고 잠적한 것으로 처리하면 무슨 문제야. 시체만 네가 잘 처리하면 조사해봐야 뭐가 나올 게 있다고!"
"요즘은 예전 같지 않아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홍콩에서 조직이 와해한 상태라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따로 외부에서 전문가를 불러야 하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까지 자네가 중국에 갔을 때 공안에게 보호해준 것이 누군데 섣부른 수작이야!"
"물론 그 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인께서는 미화로 천팔백만 불을 가지게 되는데 제 몫이 겨우 오십만 불이면 너무 적지 않습니까."
"알았어. 시체만 잘 처리하면 백만 불을 자네 몫으로 떼어주지. 외부에서 시체를 처리할 필요 없이 내 집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것 생각하면 내가 큰 선심을 쓴 줄이나 알아. 내 말 한마디면 자네 본토에서의 사업은 그날로 끝이야."
"백만불··· 여전히 적은 것 같지만, 알겠습니다."
웃기지도 않았다.
자기들끼리 내 돈을 서로 나누고 있지 않은가?
왕 웬준이 나를 평소에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나에게 투자금을 순순히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내가 CIA 요원이 아니라도 미치지 않고서야 투자금을 주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데 순순히 불리가 없지 않은가?
어쨌든 내가 들은 대화대로라면 저 둘만 처리하면 이 일에 더 아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했다.
나는 창문에서 떨어져 문으로 가서 두드렸다.
"밖에 누구야?"
"접니다. 에드릭입니다."
잠시 후 왕 웬준이 문을 열었다.
"자네 어떻게 안으로 들어왔나? 밖의 현관문은?"
왕 웬준은 내가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몰라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하긴 조금 전까지 투자금을 가로채고 내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왕 웬준이었다.
그런데 그 상대가 집의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현관문이 열려있던데요?"
왕 웬준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30대 후반 정도의 사내가 있었다.
"저는 분명히 현관문을 잠그고 들어왔습니다."
사내의 변명에도 왕 웬준은 화를 참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사람이 하늘을 날아서 집 안까지 들어왔다는 말이야! 밖에 나가서 현관문을 닫고 와!"
왕 웬준의 고함에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밖으로 향했다.
"들어오게."
나는 왕 웬준의 안내를 받아 소파 쪽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일찍···."
왕 웬준이 방심한 틈을 타서 다가가 그의 목동맥을 강하게 압박했다.
기절한 왕 웬준을 소파에 일단 앉혔다.
그리고 왕 웬준이 입고 있던 상의를 내 옷 위로 걸쳐 입었다.
집안을 살피던 내 눈에 거실 한쪽에 놓인 골프채가 들어왔다.
'이거 좋네.'
잠시 후 밖으로 나갔던 삼십 대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밖의 현관문은 잘 잠겼는데···. 넌···!"
나는 들고 있던 골프채로 들어오는 삼십 대 사내를 머리를 내리쳤다.
쓰러진 사내에게 다가가 목을 확인했다.
상대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나는 사내의 품을 뒤져 신분증을 확인했다.
사내는 홍콩 출신이 아니라 중국 광동성 출신이었다.
나는 사내의 품에서 칼을 꺼냈다.
걸쳐 입은 상의를 다시 벗어 소파에 쓰러진 왕 웬준에게 다시 입혔다.
그리고 왕 웬준을 문 앞으로 끌고 왔다.
'이 새끼 무겁네.'
나는 들고 있던 칼을 들어 왕 웬준의 아랫배에 두 번 정도 찔렀다.
그 와중에 왕 웬준의 입에서 작은 앓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 배에 칼에 찔린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아마추어에게 당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많다면 왕 웬준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왕 웬준과 내가 며칠 동안 사이가 안 좋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았다.
어서 회사로 돌아가서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했다.
나는 칼과 골프채에 묻은 지문을 지우고는 두 사람의 손에 쥐여 주고 들어올 때와 같은 방법으로 왕 웬준의 집을 나왔다.
교육만 받았지 살인은 처음이었지만 의외로 별로 떨리거나 긴장되지는 않았다.
직접 살인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지랄 맞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