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영입제안.
장 샤오이의 영입제안···.
나로서는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왕 웬준을 처리하면서 한가지 깨닫고 결심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금융계는 전쟁터라는 사실이었다.
전쟁터에서 상대에게 만만하게 보이면 상대는 약점을 물어뜯으려고 한다.
왕 웬준이 나를 죽이고 투자금을 가로채려고 한 것처럼 말이다.
나만 죽이면 돈을 가로챌 수 있다고 생각한 것만 봐도 그가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는지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왕 웬준에게 내가 빌미를 준 면이 있었다.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물론 그 시작은 작년 7월 왕 웬준과 내가 처음 만났던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 왕 웬준과의 나와의 관계가 형성된 것은 작년 12월 말 에디 미첼이 죽고 난 이후였다.
그때까지 왕 웬준과 나는 서로 인사를 하고 지내기는 했지만 철저한 타인이었다.
나도 류오린의 다른 직원들과 관계를 맺으려는 생각이 없었고 왕 웬준도 내가 자신의 부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상사와 부하 관계였지만 우리는 철저한 타인이었다.
그런 관계가 바뀐 것은 에디 미첼의 사망 이후였다.
왕 웬준은 에디 미첼이 사망한 직후 나를 보호해주던 배경이 사라지자 곧바로 나를 압박했다.
에디 미첼의 죽음이 이후 CIA가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느라 에디 미첼의 죽음이 가져올 류오린에서의 내 상황 변화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왕 웬준의 무리하다면 무리한 요구를 아무런 말 없이 따랐다.
그 순간 왕 웬준과 내 관계는 형식적이던 상사와 부하 관계가 현실이 됐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 순간 왕 웬준의 머릿속에서 만만한 존재가 된 것이었다.
왕 웬준은 석 달 전에 깨달은 이런 사실을 나는 나에 대한 살인 청부를 하는 왕 웬준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
그 직전까지 왕 웬준은 나에게 위장 근무하고 있는 곳에 사사건건 내 일에 나서는 사람일 뿐이었다.
내가 굳이 왕 웬준을 찾아가서 죽인 것은 바로 이런 안이한 나에 대한 경고였다.
상대에게 얕잡아 보여서 화를 키우는 일은 한 번이면 족했다.
"지금 당장 결정하기 어려우면 며칠 시간을 줄게요."
장 부팀장이 말했다.
그녀는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영입제안은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나는 자신의 팀에 들어오라는 장 샤오이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장 샤오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단번에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 설명이 부족했나 보네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장 샤요이가 말을 이었다.
"다음 달이나 다다음 달에 팀이 나뉘면 웬 팀장이 해외 팀을 맡게 될 거예요. 그리고 웬 팀장의 팀원들은 이번에 새롭게 합류한 팀원들일 거고요. 웬 팀장은 에드릭 씨와 리안 씨를 그 팀에 데려가려고 하고 있어요."
왕 팀장이 죽인 이후에 웬 신임 팀장이 해외 팀을 맡게 되는 계획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럼 제 팀에 들어오는 것이 미래를 생각하면 나은 선택이라는 사실도 알겠군요. 웬 신임 팀장의 배후가 지금은 대단해 보여도 그게 영원할 수는 없어요."
처음 팀 개편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차이가 있다면 바로 중국 본토 투자팀을 왕 웬준이 아니라 장 샤오이가 맡게 되는 정도였다.
단순히 팀장이 바뀐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중국 본토 투자팀이 왕 웬준일 때는 아시아 팀의 중심이 웬 신임 팀장이 되겠지만 장 샤오이가 팀장이 된다면 어느 팀이 아시아 팀의 중심이 될지는 불확실했다.
당장이야 현재 집권하고 있는 장쩌민 주석을 배출한 상하이방을 배후에 두고 있는 웬 신임 팀장이 이끄는 팀이 유리해 보인다.
하지만 장 샤오이 뒤에는 태자당이 있었다.
상하이라는 특정 지역의 관료들이 중심이 된 상하이방은 2년 후 장쩌민 주석이 물러나고 후진타오가 새로운 주석이 되면 점점 세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태자당은 중국에 공산당이 집권하는 이상 사라질 수가 없는 세력이었다.
현 체제에서 중국의 태자당은 기업으로 말하면 창업자이자 오너라고 할 수 있었다.
상하이방의 장쩌민이든 아니면 차기 지도자인 공청단의 후진타오 부주석이든 태자당이 보기에는 전문경영인에 불과했다.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웬 신임 팀장보다 공산당 8대 원로 중 한 명과 핏줄로 엮인 장 샤오이와 손을 잡는 것이 맞았다.
내가 계속 홍콩을 중심으로 일을 할 생각이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내년 6월까지 류오린에서 일하고 그 후에는 CIA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장 샤오이와의 인맥은 오히려 그때가 되면 부담이 될 뿐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거절합니다. 우리는 따로 계획이 있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장 부팀장의 제안을 거절했다.
"답답하네요. 짐작하겠지만 웬 지하오의 팀이 할 일 중에는 죽은 왕 팀장이 은밀히 하던 일도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왕 팀장의 죽임에 그 일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죽고 싶어요? 내 팀이 들어온 이후에도 지금과 변하는 것은 없어요.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지금처럼 일만 잘하면 돼요."
왕 웬준을 처리한 것은 바로 나였다.
그런데 장 샤오이는 왕 웬준을 죽인 것이 엔 지하오, 정확하게는 상하이방의 권력자들이 꼬리를 자른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설득하면서 하는 말도 그렇고 웬 지하오와 장 사오이 사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해 보였다.
'홍콩에서 베이징에서 하던 권력다툼이라도 하는 거야 뭐야?'
"처음 볼 때와는 달리 끈질긴 분이시네요.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따로 계획이 있습니다."
내 계속된 거절에 장 부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휴···. 걱정해서 말을 해줘도 이해를 못 하시네요. 혹시 내가 무슨 딴생각하거나 그쪽을 팀원으로 받아들여서 이득을 얻으려고 생각하고 있다면 오해에요. 전 단지 예전 팬심으로 그쪽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 같아서 걱정돼서 한 제안이니까요."
"팬심이요? 혹시···."
나는 어릴 때부터 풋볼을 했었다.
발로 공을 차는 축구가 아니라 아시아에서 흔히 말하는 미식축구.
다른 운동도 꽤 잘했지만 내가 가장 열심히 한 것은 미식축구였다.
당연히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백인들이 주로 하는 쿼터백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국 사회에서 주류에 끼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것 같다.
"맞아요. 하버드 크림슨(Harvard Crimson) 시절에 경기할 때 응원하고는 했어요. 춘절 파티에서 보고 깜짝 놀랐어요. 홍콩에서 만날 줄은 몰랐거든요. 부상으로 NFL에 진출하지 않고 워싱턴에 있는 연구소로 갔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시험을 봐서 하버드에 간 이후에도 대학팀인 하버드 크림슨에서 쿼터백을 했다.
4학년 때는 주전 쿼터백으로 나가서 하버드대 대학 패스 성공률을 갈아치우며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대상으로 하는 리그에서 우승하기도 했었다.
아마 장 샤오이는 그때 응원을 왔던 얼마 안 되는 아시아계 학생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저 정도 미인이라면 눈에 띄었을 텐데 기억에는 없었다.
하버드 풋볼팀은 역사가 오래되기는 했지만 다른 대학의 풋볼팀만큼 관객이 많지 않았다.
가장 관객이 많았던 경기는 하버드에서 열린 우승을 확정하는 마지막 경기였다.
학생들이 많았던 이유도 경기 결과보다는 경기 이후 경기장 내에서 벌어진 바비큐 파티 때문이었다.
"팀 개편이 시작되려면 몇 달 남았으니 잘 생각해보세요."
장 부팀장이 제안을 한 바로 다음 날 웬 팀장이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
"장 부팀장이 제안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하지만 나는 자네 둘이 내 팀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네. 미래? 이 바닥에 미래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장 부팀장의 제안을 어디서 들은 듯했다.
"부팀장의 제안은 거절했습니다."
웬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성과가 있으면 사람들은 찾게 마련이야. 전임 팀장을 생각해보게. 실적이 없으면 아무리 누가 밀어줘도 그렇게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 세상이야."
"···."
장 샤오이도 그러더니 웬 팀장도 왕 웬준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웬 팀장의 말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왕 웬준을 처리한 일에 후회는 없지만 아무래도 내가 한 살인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은 껄끄러웠다.
웬 팀장은 내 이런 표정 변화에 자신의 말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회사 밖에 따로 투자회사를 만든다면서?"
"예. 어디까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류오린 내에서 AAM이라는 회사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몇몇 대인분들께서 AAM에 투자하기를 원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니···. 내가 자네에게 그 일에 대해서 추궁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네. 나는 왕 웬준이 아니야. 자네가 특수한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네. 회사에 막대한 돈을 벌어지는 자네를 몰아붙일 생각은 조금도 없어."
말하는 것을 봐서는 왕 웬준이 웬 지하오를 싫어하는 것만큼 웬 지하오도 왕 웬준을 싫어했던 것 같았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투자를 추가로 받을 생각은 없나?"
"예?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이미 투자액이 다 모인 상태입니다. 이미 투자회사는 반쯤은 제 손을 떠난 상태라서···."
웬 지하오의 투자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상하이방 고위층의 돈일 가능성은 작았다.
그런 고위층이 나에게 돈을 맡기기에는 나는 경력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어쨌든 중국 본토의 검은돈일 가능성이 큰데 그런 자금은 너무 위험했다.
괜히 왕 웬준이 불안에 떨면서 평정심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나도 굳이 그 투자회사에 하겠다는 말은 아니네. 나는 이왕이면 AAM에 투자하고 싶은데 말이야. 가능하겠나?"
"하···. 진짜···."
나는 순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건 무슨 웃음인가?"
내 웃음에 웬 팀장의 안색이 굳어졌다.
내가 AAM에 직접 투자금을 받지 않고 따로 투자회사를 새롭게 만들었겠는가?
AAM에 투자금을 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회사의 정보를 투자자들에게 공개해야만 했다.
리안의 지인들인 홍콩 유력자들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으므로 새로운 투자회사 설립을 허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중국 본토에서 온 인간이 감히 AAM을 노골적으로 노리고 있다.
"웬 팀장님. 어디서 되지도 않는 수작을 부리고 있어요.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요?"
웬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뒤에 어떤 권력자들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여기는 당신이 있던 상하이가 아니에요."
나는 웬 지하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뭐야!"
웬 팀장이 내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더듬었다.
"내가 리안과 리안의 고객들을 데리고 류오린에서 나가면 당신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회사에서 나와 리안보다 당신을 선택할 것 같아요?"
"감히 지금 나를 당신이라고 부른 거야!"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홍콩은 자본주의 사회야. 돈이 있는 사람이 주인이지. 그에 비해서 당신은 누군가가 부리는 도구이자 기르는 개일 뿐이야. 하지만 리안이나 그 고객들은 당신 같은 개가 아니라 목줄을 쥔 주인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주인이야. 나도 마찬가지고···. 나 참···."
나는 웬 지하오의 넥타이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개새끼가 지금처럼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다가는 오래 살지 못해."
말을 마친 나는 웬 지하오를 밀어 의자에 앉혔다.
웬 지하오는 내 행동에 충격을 받은 듯 내가 사무실을 나오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팀장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리안에게 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우리 따로 팀을 만들어야지."
정 수틀리면 웬 지하오에게 말한 대로 류오린을 나갈 생각도 하고 있었다.
아직 AAM의 투자 원금 이천만 불에 조금 모자란 천구백만 불 정도였다. 그렇지만 지난 한 달 나스닥 선물옵션으로 번 내 자금 천오백만 불을 합치면 삼천사백만 불이었다.
아직 계획했던 일억 불에는 모자라지만 굳이 다른 투자를 받지 않더라도 작은 투자회사를 만들기에는 충분한 금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