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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슈퍼리치 되다-43화 (44/270)

서몽

# 썩은 사과.

누가 팀장이 돼야 하는가?

"그야 당연히 리안 네가 해야지."

내 생각에는 물을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난 회사에 들어온 지 이제 8개월 째야. 더구나 내년 6월까지가 류오린과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그게 문제라니까. 내가 팀장을 맡는 것은 문제가 아니야. 그런데 내가 팀장을 맡은 이후에 네가 떠나면?"

"그야···."

"너도 알겠지만, 류오린에는 우리 집안, 정확히는 아버지의 지분도 있어. 정확히는 말할 수 없지만, 대주주 중 한 명 정도는 되지. 나는 이해관계의 충돌 때문에 관여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 집안의 자금 중 상당 부분도 류오린에서 관리하고 있고. 그런데 내가 왜 지금까지 팀원으로 있었겠어. 귀찮아서야. 그런데 지금에 와서 팀장을 하라고? 더구나 너 같은 팀장들에게 계속 들이받는 팀원을 데리고?"

리안은 마치 나를 트러블메이커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억울했다.

나는 팀장들과 먼저 문제를 만든 적이 없었다.

먼저 왕 웬준이나 웬 지하오가 가만히 있는 나를 건드렸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내가 괜히 들이받아? 내가 팀장들과 문제가 있었던 것은 너도 알지만 다 이유가···."

내 말에 리안이 손을 저어서 말을 막았다.

"됐고. 나 너랑 오래가고 싶다. 그런데 내가 팀장이 되고 너를 팀원으로 받아들이면 싸울 것 같거든···."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네가 팀장 해. 내가 팀원 할 테니···. 까놓고 지금도 우리는 하나의 팀이나 다름없고 지금도 네가 지시하면 내가 그 지시 따라서 거래하니 지금과 달라질 것도 없잖아."

"회사에서 그렇게 하겠어? 나는 경력도 짧고 류오린의 직원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운데?"

류오린은 홍콩에서 손에 꼽히는 투자회사는 아니지만, 전체 투자금을 모두 합치면 수십억 불이 넘는 중견 투자회사였다.

"뭐가 걱정이야. 이미 웬 팀장과 장 부팀장의 선례가 있는데···. 너는 실적도 있으니 충분하지."

"두 사람과 나는···."

"배경? 그 배경은 나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줄게."

나는 리안의 말을 들이며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가 팀장이 되면 홍콩 금융계에 금방 소문이 퍼질 것이다.

내가 류오린에서 한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지낸 것은 CIA 요원이라는 본래 신분 때문에 튀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어느 정도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눈에 띄게 두각을 나타내는 것도 곤란했다.

적어도 CIA를 그만두기 전에는···.

리안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가 팀장을 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새로운 팀을 안 만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리안의 말대로 웬 팀장이 자꾸 자극하면 또 담을 넘어야 할 상황이 될지도 몰랐다.

살인이라는 것이 처음에야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는데 나는 처음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매번 나와 문제가 있는 팀장이 죽어 나가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CIA도 아무런 지시도 없는 상황에서 내 살인을 막아 줄 리가 없었다.

선택해야 했다.

계속 이대로 웬 팀장 밑에 남을 수는 없었다.

결국, 회사를 나가느냐 팀장이 되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CIA의 상황을 모르는 이상 신상 변화는 최소화해야 했다.

"일단 맡아보지 뭐···. 그런데 내년 6월까지만이야."

나는 팀장을 맡겼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팀장을 맡겠다는 내 말에 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그 후에는 네가 계속 팀장을 하겠다고 해도 내가 받아들일 수 없어. 그때가 되어서도 여기서 일하면 그게 바보지."

***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리안은 무슨 마술을 부렸는지 다음날 바로 회사 임원진의 허락을 받아냈다.

조직개편도 예정보다 빠른 바로 다음 달인 4월도 앞당겨졌다.

정식 조직개편과는 별개로 팀 분할은 바로 이루어졌다.

이 조직개편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다름 아닌 웬 팀장이었다.

직책은 가장 높은 팀장인데 정작 직계 팀원은 그와 함께 온 다섯 명이 전부였다.

가장 많은 팀원을 거느린 것은 장 샤오이로 기존의 팀원 거의 전부인 스무 명이었다.

가장 작은 팀원을 거느린 것은 바로 나로 팀원은 리안 한 명이었다.

우리가 배정받은 새로운 사무실은 우리가 최근 자주 이용한 회의실이었다.

나는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꽤 큰 회의실에 달랑 리안과 둘만 있으니 뭔가 을씨년스럽게까지 했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리안을 보며 말했다.

"우리 따돌림 받는 건가?"

"조용하고 좋은 데 뭐···."

리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회의실로 사무실로 바뀐 명목상의 이유는 조직개편과 팀원이 늘어난 것에 대한 업무 환경 개선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새롭게 증원된 팀원들, 즉 웬 팀장과 함께 온 팀원들이 새로운 사무실로 배정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회의실로 이동된 것은 나와 리안 둘이었다.

겨우 우리 두 명이 빠져나간다고 '업무 환경 개선'이 될 리가 없었다.

회의실 밖은 여전히 좀 어수선했다.

"나도 나쁘지는 않은데···. 왜 우리 팀만 회의실이 사무실이 된 거야? 이 정도 넓이면 웬 팀장이 이끄는 팀이 들어와야 하는 것 아니야?"

내 말에 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임원진에게 너를 '썩은 사과'라고 부르면서 그냥 놔두면 상자 안에 있는 다른 사과까지 썩게 만든다고 했다더군. 조직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말이야."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웬 팀장, 웬 지하오가 분명했다.

"인간 참 이름과 달리 그릇이 작아도 너무 작네."

웬 지하오(Wen Jihao)는 한자로는 문기호(文基浩)였다.

이름의 뜻은 기초나 터가 크다는 의미였다.

지금 그가 하는 짓은 자신의 이름과 정확히 반대되는 행동이었다.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리안이 말했다.

"왜 없어? 너와 나 둘 있잖아."

리안(Ryan)은 소왕(little king)이라는 뜻을 가진 아일랜드어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그에 비해 내 이름인 에드릭(Edric)은 부와 지배를 뜻하는 고대 영어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나나 리안의 최근 상황과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게 그렇게 되나?"

리안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너나 나나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지."

나는 다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웬 팀장을 욕하며 잠깐 웃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둘만 따로 사무실에 있는 지금 상황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우리 팀에 한 명도 들어 오지 않을 줄은 몰랐네. 나야 그렇다고 해도 리안 너를 봐서라도 몇 명을 들어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너나 나나 뭐가 다르다고 날 보고 들어오겠어."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나 나나 따로 논 것은 마찬가지인가?"

"기존 팀원들은 명색이 중국 전문가잖아. 태자당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 새로운 팀장이 됐는데 내가 보이기나 하겠어."

하긴 장 샤오이라는 인맥은 중국에 이해관계를 가진 팀원들로서는 가장 확실한 줄이었다.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미래를 위해서는 꼭 친해져야 하는 사람, 그게 바로 장 샤오이였다.

리안이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기존 팀원들은 들어온다고 해도 필요가 없어. 대부분이 몇 년간 중국 투자로 손쉽게 투자하는 일에 익숙해져서 우리 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그래도 사람이 필요하기는 해. 이왕 독립했으니 투자 범위를 좀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거든···."

"투자 범위를 확대하다니?"

"지금은 주로 아시아 국가에만 투자하잖아. 가끔 나스닥에 투자하고···. 그걸 장기적으로는 러시아나 남미 쪽까지 확대해 볼 생각이야."

"하···. 지금도 일이 많은데 러시아에 남미라니···. 누굴 과로로 죽일 일 있어!"

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생각만 해도 질린다는 듯 굳어졌다.

"그러니 사람을 더 필요하다는 말이야. 너 전에 유럽 쪽 팀에 있었다면서 그 팀에서 데려올 사람 없어?"

"생각해 둔 사람이 있기는 한데···. 아 물론 우리 회사 사람은 아니고 다른 회사에 다니는데 러시아에서 유학해서 동유럽 국가 사정에 밝아. 지금도 그쪽에 주로 투자하고 있고."

"그럼 데려와야지. 연봉 두 배 준다고 하고 데려와."

"얼마나 받는 줄 알고 연봉 두 배래. 그리고 돈만 준다고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만나서 설득해야지."

돈으로 데려올 수 없다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리안과 비슷한 집안 출신인 것 같았다.

"그럼 언제 약속 한 번 잡아봐. 만나보고 마음에 들면 내가 설득해볼게."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해볼게."

"다른 사람은 없어?"

"글쎄···. 사람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데려오고 싶은 사람들은 조건들이 까다로워서···. 굳이 그 조건 들어주면서 데려올 가치는 없어. 뭐 나중에 독립하면 그때는 모르지만 말이야. 어차피 지금은 딱히 할 일도 없잖아?"

어차피 앞으로도 중요한 투자 결정은 내가 직접 할 생각이었다.

유능한 인재를 데려와서 무조건 내가 마음대로 결정을 내린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리안의 말대로 따로 독립한 다음이라면 재량권을 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시기상조였다.

"그래도 단순 작업할 사람도 필요해."

사무실을 운영하는 이상 이런저런 잡무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그런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럼 류오린에서 경력 짧은 직원을 팀원으로 영입하거나 아니면 새로 공고를 내서 뽑든지. 에드릭 네 마음대로 해."

"뭔 소리야. 나는 언제 출장을 갈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너랑 더 오래 있을 텐데···. 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뽑아야지."

내 말에 리안이 뭔가 생각하는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면 내가 한 사람 데려올게.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저런 사소한 일을 맡기기에는 정말 좋은 사람이 있기는 하지."

리안의 말에서 뭔가 수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그냥 넘겼다.

내가 팀장이 된 이유는 리안 자신이 팀장이 되면 팀원이 될 나와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리안의 말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팀장이 되기는 했지만, 실제 팀장은 리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어차피 리안이 쓸 사람이니 리안에게 맡긴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나는 후회해야만 했다.

"너에게 맡기는 했는데 하지만 이건 좀···."

사무실에는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리안과 그 옆에서 차를 따르는 중년 사내가 있었다.

"우리 집안에서 집사를 하시는 분이야. 세계 최고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의 버틀러 집사학교를 나오신 그야말로 잡무의 달인이시지."

리안의 말에 나는 말 그대로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자신을 바라보자 중년 사내는 병을 내려놓았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저는 잠깐 밖에서 일을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중년 사내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리안에게 다가갔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가문의 집사를 투자회사에 데려오면 어쩌자는 거야?"

"우리 집사 아저씨는 네덜란드의 버틀러 집사학교만이 아니라 미국 코넬 대학에서 경영학도 전공하셨어. 지금은 홍콩에 있는 내 재산도 관리하고 있고···. 류오린의 어지간한 직원보다 능력도 뛰어나고 홍콩은 물론이고 아시아 어지간한 나라에 대해서다 잘 알아. 뭐가 문제야?"

"하···.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리안 네가 문제인 것 같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집사와 두고 일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회사 내에서 우리 팀을 '도련님 팀'이라고 부르는 상황에서 집사를 회사에 데려오다니···.

내가 리안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았다.

'분명 반년 동안 옆에서 같이 일할 때는 뛰어난 투자자로 보였는데···.'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맞지만 평범한 부잣집 도련님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 돌려보내?"

리안이 물었다.

문득 내 눈에 먼지 하나 없는 책상이 들어왔다.

책상 위도 모든 물건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사무실을 둘러보니 청소는 물론이고 어제와는 책상 배치도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기저기 물건도 늘어나 있었고 벽 한쪽에는 차나 커피도 준비되어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딘지 을씨년스럽던 사무실 분위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어차피 지금쯤은 리안이 집안의 집사를 데려온 것이 회사 내에 다 퍼졌을 것이다.

며칠 더 일하게 한다고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계속 일을 하게 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았다.

"일단 당분간만 출근하시라고 해. 집안의 도련님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실 텐데···."

리안이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당분간이라···. 글쎄, 과연 그럴까? 우리 집사 아저씨 일하는 것 보면 나중에 계속 일해달라고 매달리게 될걸."

"그럴 일은 없으니 헛소리 마."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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