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44화 (45/270)

서몽

#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나는 지금 AAM의 사무실에서 CIA에 낼 보고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벌써 몇 주째 보고서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왕 웬준을 처리했고 경찰방문도 있었고 새로운 팀장이 된 웬 지하오와의 충돌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새로운 팀의 팀장이 되었다.

물론 지금은 팀원이라고 해봐야 세 명이 전부였지만···.

리안이 데려온 카이 황(Kai Hwang, ?煌)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능했다. 문제는 집사라서 그런지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이제 예전처럼 사무실에 도청기를 가져다 둘 수는 없는 것은 물론이고 CIA에 관련된 일은 여기 AAM 사무실에서 전부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새롭게 팀을 만들기는 했는데 마땅히 투자할 곳이 없어서 고민하던 중이었다.

미국 증시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전 세계 증시에서 주가가 하락하고 있었다.

지난주까지야 나스닥 하락에 말 그대로 내 개인 재산을 다 걸고 있었으니 주가 하락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정식은 아니지만, 팀장도 된 상황이었다.

실적이 필요했다.

특히 웬 지하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만한 그런 실적 말이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주머니에 든 블랙베리에서 메일이 왔다는 벨 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메일이 왔다는 알림에 나는 내용을 확인했다.

메일을 보낸 사람을 확인하고는 짜증이 났다.

보낸 사람을 보니 일본에서 단테 패트릭이라는 요원이 보낸 메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없는데 일본에서 만난 단테 패트릭이라는 요원은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메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지금은 AAM의 사무실에 있으니 망정이지 류오린에 있었다면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까지 와야 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또 뭘 물어보려나 할까 하는 생각에 무심코 메일의 암호를 해독하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박 정보였다.

"사람이 고생만 하라는 법은 없네. 사람이 노력하면 그 결과가 있어야지."

이제야 고생한 노력의 열매를 얻는 것 같았다.

***

몇 시간 전 일본 도쿄.

단테 패트릭이 사무실에서 나오자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직원들은 주일미국 대사관의 직원이면서 동시에 CIA 일본지부의 요원이기도 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일어난 직원들이 단테 패트릭을 향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에이메 마루가 침몰한 2월 9일부터 지난 한 달 반 동안 단테 패트릭은 인생 가장 바쁜 시간을 보냈다.

지난 한 달 반 동안의 고생이 모두 보답을 받는 순간이었다.

작년까지 CIA 지원본부 소속이었던 단테 패트릭으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 자네들도 수고했네."

단테 패트릭은 부하들의 인사를 받으며 대사관을 나와 CIA 일본지부로 향했다.

오전 내내 주일대사는 물론이고 CIA 일본지부장 심지어 사무실에 들어오기 직전에는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에게 직접 수고했다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말 그대로 CIA에 들어온 지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 중에서 최고의 순간이었다.

에이메 마루 침몰로 시작된 일본 모리 총리와의 신경전은 미국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겉으로는 총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다음날 자민당 총재직과 총리직에서 물러나기로 약속했다.

모리 총리의 항복 선언이었다.

다음 주에 일본 모리 총리는 미국을 방문해 금리 인하와 은행 개혁을 발표하기로 했다.

이 모든 것이 한 달 반 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낸 메일, 아니 그 메일을 통해 받은 에이전트 에스 팀 덕분이었다.

시작은 일본 국민의 비난을 사고 직후 잘못된 행동을 한 모리 총리에게 돌리자는 계획이었다.

모리 총리는 잇단 망언에도 일본 중앙 정치를 뜻하는 나가타초에서 살아남아 총리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반격을 했다.

그런 반격을 막을 수 있었던 계기는 도쿄지검 특수부를 이용해서 모리 총리의 측근은 전직 장관을 비리 혐의로 구속하게 시킨 것이었다.

이어서 외신을 이용해서 일본 경제 상황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이런 뉴스에 일본 증시는 최악까지 폭락했고 모리 총리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까지 떨어졌다.

일본 총리 역사상 가장 낮은 지지율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2월 9일 누구와 골프를 쳤는지 알고 있다는 정보를 자민당을 통해 흘렸다.

이 모든 작전은 에이전트 에스 팀과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완성한 것이었다.

일이 끝나고 모든 칭찬을 혼자 받는 상황이 되다 보니 단테 패트릭은 자신이 모든 공을 가로챈 것 같아서 미안했다.

단테 패트릭은 어떻게든 에이전트 에스 팀과 공을 나누고 싶었고 실제 처음 만난 에이전트 에스 팀의 막내 요원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적어도 CIA나 백악관에는 알릴 생각이었다.

단테 패트릭은 지난 한 달 반 동안 에이전트 에스와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진 진행 과정을 담은 보고서를 CIA 일본 지국장에게 제출했다.

CIA 일본 지국장은 보고서를 읽다가 고개를 들어 단테 패트릭을 바라보았다.

"자네 미쳤나?"

그리고는 에이전트 에스의 이름이 들어간 모든 부분을 검은색으로 지우기 시작했다.

"자네 은혜를 원수로 갚을 생각인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현장팀의 신원을 유출할 수 있는 정보는 이런 보고서에 쓰는 것은 그들을 사지로 내모는 짓이야. 당장 자네 보고서에 나온 만난 에이전트 에스 팀의 요원을 만난 날짜, 장소, 상대의 나이 이런 것이 다 그런 정보들이야."

단테 패트릭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CIA 일본 지부장은 현장 요원 출신이었다.

현장 요원 출신들이 보안에 극도로 민감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현장에서 작전에 참여한 것은 처음이라···."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나? 지원본부 소속이라면 더욱 정보의 중요성을 잘 알아야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더 중요한 것?'

단테 패트릭은 긴장한 상태로 지부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에이전트 에스 팀이라는 이름만 들었지 정체를 모른다는 거야."

"예? 그게 무슨···."

단테 패트릭은 지부장의 말에 당황했다.

CIA의 일본 지부장이라면 CIA의 지부장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리였다.

그런 사람도 정체를 모르다니?

"에이전트 에스라는 이름으로 CIA에 아시아 각국에 대한 보고서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은 작년 7월부터야. 문제는 CIA의 아시아 지부에서 누구도 에이전트 에스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이지."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의 매주 혹은 늦어도 격주에 한 번씩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데 누군지 모른다는 말입니까?"

에이전트 에스라는 팀이 단순히 외부 팀이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CIA에 아시아 각국의 경제와 정세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 올리는 팀이었다.

아시아에서 분명한 활동을 하는 팀인데도 CIA 일본 지부장조차 정체를 모르다니···.

단테 패트릭을 지원본부 소속이기는 했지만, CIA에서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이런 일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다른 지부장들에게 물어봤는데도 모르더군. 공개된 조직표에 나온 CIA의 조직이 아닌 것은 분명해. 정식 조직이라면 그렇게 여러 국가에 대한 보고서를 쓰지 않겠지."

"정말요?"

"내가 자네에게 왜 거짓말을 하겠나?"

"아니 1월 하순에 에이전트 에스 팀에 일본에 대한 조사를 맡기셨잖아요?"

단테 패트릭으로서는 지부장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자신이 에이전트 에스와 접촉하게 된 계기가 된 일본에 대한 보고서는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지부장의 의뢰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의뢰를 맡긴 당사자가 에이전트 에스 팀에 대해 모른다니···?

"그랬지. 하지만 자네가 쓴 이 보고서를 읽기 전까지는 에이전트 에스가 한 사람인지 아니면 팀의 이름인지도 몰랐다는 것도 사실이네. 아마 작년에 있었던 조직개편으로 명령체계에 혼선이 생긴 것 같은데···. 이걸 제대로 조사하려면 지부가 아니라 본부에서 해야지."

"팀이겠죠. 제가 만난 에이전트 에스의 팀원은 나이가 어렸습니다. 꽤 똑똑하기는 하지만 혼자서 그 모든 보고서를 쓰기에는 경험이 적어 보였습니다."

단테 패트릭의 말에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는 에이전트 에스가 베테랑 현장 요원과 정보 분석 요원으로 이뤄진 네 명 정도의 소규모 정예 팀이라고 예상하네. 팀의 중심은 베테랑 정보 분석 요원이고 말이야."

"네 명이 하기에는 너무 범위가 넓지 않습니까? 지난 9개월간 보고서를 쓴 국가만도 십 개국이 넘습니다."

"인원이 많을 필요가 없지. 솔직히 말해서 에이전트 에스 팀의 정보수집 능력은 보잘것없네. 보고서에 나온 첩보라고 써놓은 내용 대부분은 공개된 자료에 있는 내용이지. 작년 7월에 처음 보고서가 CIA 데이터베이스에 올라왔을 때 신경 쓴 사람이 거의 없었던 이유도 별다른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지."

"첩보 자체는 그렇죠."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CIA를 비롯한 정보기관의 활동은 DADA로 요약할 수 있다.

정보기관이 Data-Analysis-Decision-Action의 단계로 정보를 모으고(Data), 분석하고(Analysis) 해서 정보소비자 즉 정부부서나 백악관에 보내면 정책결정자는 분석된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면(Decision) 실행이 되는 것이다(Action).

에이전트 에스 팀의 보고서는 이 중에서 첩보(Data)의 깊이 면에서 많이 부족했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첩보 면에서는 많이 부족하지. 하지만 지금은 아마 아시아 CIA 간부 중에서 에이전트 에스 팀 보고서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지."

"그렇죠."

단테 패트릭은 이번에도 지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공개된 정보만으로 어떻게 정확히 정치나 경제 외교를 분석하고 결과를 예측하는지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에이전트 에스 팀은 공개된 정보들을 통해 정보 이면의 사실을 추측해서 분석해 내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데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에이전트 에스 팀은 지난 구 개월 동안 스물두 개의 보고서를 썼다.

그중 예측이 빗나간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거의 예언자 수준이지.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안다(The tree is known by its fruit.).'라는 말이 있다.

에이전트 에스 팀도 보고서와 그 보고서에 나오는 예측의 정확성으로 몇 달 사이 빠르게 CIA 내 아시아 요원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에이전트 에스 팀 정도의 정확성은 아니지만, CIA 내에는 그런 일을 하는 부서가 있었다.

바로 정보분석본부(DI)였다.

"맞네. 그래서 내가 에이전트 에스 팀의 중심이 정보분석 요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현장 요원이 중심이라면 저런 허접한 내용을 첩보라고 보고서에 쓸 생각을 하지 못했겠지."

지부장의 말을 듣던 단테 패트릭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부장 같은 현장 요원이 보안을 생명처럼 여긴다면 상대적으로 정보분석 요원은 정보를 공개해서 CIA 조직 내부에서 공유하는 것을 선호했다.

아마도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보고서를 써서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는 것도 그런 생각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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