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안다. (2)
이번 일을 같이 진행하면서 단테 패트릭은 에이전트 에스팀과 항상 암호문으로 메일을 작성해서 계획을 조율했다.
한두 번은 모르지만, 매번 의견을 교환할 때마다 이런 절차를 진행하는 일은 굉장히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었다.
시간을 다투는 상황에서 암호문을 작성하면서 짜증이 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답장도 메일을 보내고 서너 시간 정도가 지난 후에야 왔다.
지난번 도쿄에서 만났던 신참 요원이라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하도 짜증이 나서 메일의 아이피를 추적해봤지만 엉뚱하게도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정부청사에서 보낸 것으로 나왔다.
지부장의 말을 듣던 단테 패트릭은 지부장의 생각대로 진짜로 정보분석 요원들이 팀의 핵심이라면 CIA의 일본지부의 '자원'만 가지고도 에이전트 에스팀원들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전트 에스팀의 중심이 정보분석 요원이라면 추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에 조사 의뢰를 하면 보고서를 쓸 국가도 알 수 있으니 '회사'의 '자원'을 동원하면···."
"진짜 자네 때문에 미치겠군."
지부장이 단테 패트릭의 말을 잘랐다.
그는 단테 패트릭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자네 이제 더는 지원부서의 직원이 아니야. 현장에서 그런 생각으로 지휘를 하다가는 언제 자신은 물론이고 부하들과 조직 전체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네."
"···."
지부장의 사나운 기세에 단테 패트릭은 움찔했다.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안이야. 만약 누가 자네 정보를 조사한다면 그게 설사 같은 정보기관 사람이라도 가만두면 안 돼. 동료가 반역하지 않는 이상 동료가 감추는 비밀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되네. 이 세계에서는 말이야···. 남의 비밀을 알려고 하기 전에 자기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있어야 하네. 자네는 그런 각오가 되어있나?"
"죄송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지부장은 현장 요원 출신이었다.
자신이 필요 이상의 일을 알려고 할 때 지부장이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에이전트 에스팀을 추적해서 알아내면? 어떻게 할 건데? 그 정보를 어디에 쓸 수 있는데? 에이전트 에스팀의 정보수집 능력은 의심스럽지만 그들의 분석 능력은 진짜야. 자신들에 대한 추적이 시작된 것을 알게 된 팀이 잠수하면 그때는 어찌할 건데?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배를 가르는 것이 아니야."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단테 패트릭의 거듭된 사과에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는 에이전트 에스팀은 작년 조직개편으로 생겨난 파일럿 팀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작년 조직개편이 규모가 크기는 했죠."
CIA는 작년 대규모 조직개편을 했다.
그 핵심은 CIA의 네 본부 중 하나인 지원본부를 해체하고 남은 세 개의 팀이 그 조직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본부의 지원본부에서 일하던 단테 패트릭이 일본지부에 온 것은 지원본부의 해체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가 지원본부의 해체일 뿐 그 외에도 각 본부 내는 물론이고 지역 본부 역할 조정 같은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전부터 현장 요원들과 정보분석 요원들이 지금처럼 따로 떨어진 체계가 아니라 지역 본부를 중심으로 하나의 팀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말은 있었거든···. 그걸 시험하는 팀이겠지. 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동아시아에서 그 일을 시험해보는 것이겠지. 아시아 각국의 현황 보고서를 쓰는 것은 부수적인 일이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겠지. 그러니 지금처럼 기존 조직 내에서 따로 떨어져 나가서 활동하는 것일 테고···."
보안을 중시하는 현장 요원과 정보공유를 통해서 자료를 공유해야 한다는 정보분석 요원의 갈등은 CIA 초창기부터 있었다.
둘의 사이는 말 그대로 물과 기름이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나온 제안이 바로 둘을 하나의 팀으로 합쳐 운영하자는 제안으로 꽤 오래된 계획 중 하나였다.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에 동아시아 각국에 퍼져나가고 있는 반미를 내세운 포퓰리즘 정권에 대한 공작 아니겠습니까? 주된 공작이야 아시아 남미 본부 차원에서 하는 것이지만 그 공작을 보조하는 역할이겠죠. 실제 성과도 있고요. 필리핀에서는 이미 성공했고 인도네시아도 성공 직전이니 나름 성과는 확실한 셈이죠."
몇 년 전 아시아 외환위기는 경제위기를 겪은 아시아 국가들에게도 큰 피해를 줬지만,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경제위기를 겪은 아시아 국가에 빠르게 반미 감정이 확산한 것이다.
그 영향으로 동아시아 주요국에서 비교적 미국에 호의적이던 정권이 무너지고 반미나 자주를 내세우며 대중을 기반으로 포퓰리즘 정권이 탄생했다.
당연히 미국으로서는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CIA는 아시아 남미 지부의 지휘를 받아 해당 국가의 지부를 중심으로 포퓰리즘 정부에 대한 견제 또는 전복을 시도하고 있었다.
예전 60년대나 70년대 남미에서 한 것처럼 군부를 동원한 쿠데타를 지원하기에는 시대가 바뀌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국민 사이에 여론을 악화시켜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유도하고 퇴진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단테 패트릭은 그 과정에서 에이전트 에스팀도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계기는 거의 모든 외신이 탄핵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 필리핀의 에스트라다 정권이 반정부집회로 무너지리라 예측한 보고서였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일은 이번 모리 요시로 총리에 대한 공작과 목적이나 방법 면에서 작전의 큰 틀에서는 완전히 같았다.
"통합팀 자체는 나쁜 생각이 아니지 하지만 지금처럼 운영되는 것은 문제야. 정보기관이 정권이 바뀌는 것에 지금처럼 영향을 받으면 어쩌자는 거야?"
지부장이 갑자기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단테 패트릭은 조금 전 잃었던 점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지부장의 의견에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죠. 지금은 에이전트 에스팀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 아닙니까? 저런 팀이 있으면 수행하는 작전은 비밀로 하더라도 어떻게 연락할 방법은 알려줘야지요. 지금은 같은 조직 내에 있는 팀인데도 일방적으로 요청을 하고 상대가 채택해주기를 기다리는 상황 아닙니까?"
올해 들어서 아시아 지부들 사이에 에이전트 에스팀에 대해 조사 의뢰를 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당장 다음 주 국가의 정치 경제 상황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CIA 지부로서는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아주 컸다.
하지만 요청을 한다고 다 보고서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요청을 하고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면 보고서가 나오는 시간은 아주 짧았다.
겨우 며칠 만에 보고서가 나왔다.
"저도 갑작스러운 공화당으로의 정권 변화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에이전트 에스팀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겨우 몇 달 정도 아닙니까. 아마 팀 창설을 주도했던 사람 중 상당수가 지금은 CIA를 떠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게 말이나 되는 상황이냐고···."
지부장은 CIA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단테 패트릭은 말없이 그런 지부장을 조심스럽게 바라만 보았다.
"어쨌든 결론은 말이야···."
불만을 털어놓던 지부장이 고개를 들어 단테 패트릭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보고서에서 에이전트 에스팀에 관한 이야기는 다 빼게. 자네가 주도한 것으로 위에도 이미 보고했네."
"하지만···."
단테 패트릭은 공을 가로채는 것 같아서 꺼림칙했다.
"뭘 하지만이야? 그게 진짜 에이전트 에스팀을 도와주는 일이네. 자네가 에이전트 에스팀에게 고맙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들을 위험에 빠트릴 일은 하지 말아야지."
"알겠습니다."
단테 패트릭이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지부장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우길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에이메 마루의 침몰과 일본 내 반미 감정은 정권 초기 새롭게 취임한 대통령에게 닥친 가장 큰 외교적 사안이었다.
그 일을 해결을 주도한 공을 자신에게 몰아준다는 데 왜 반대하겠는가?
단테 패트릭은 지부장이 자신에게 공을 몰아준다고 해서 그 공을 혼자만 독차지할 생각은 없었다.
지부장이 에이전트 에스팀의 이름을 보고서에서 빼는 것이 에이전트 팀을 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현장 요원 출신이기는 했지만 단지 현장 요원 유능하다고 해서 CIA 전 세계 지부장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일본 지부장이 될 수는 없었다.
어느 조직이든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능력만으로는 부족했다.
그 시기가 되면 이른바 정치적 감각이 필요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지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지부장의 속내는 아마도 CIA 일본지부가 이번 이를 해결했다는 공을 독식하려는 욕심도 있을 것이다.
'내가 혼자 공을 독차지하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지부장과도 나눠야겠군. 아마 지부장도 그걸 바라고 있을 테니까.'
단테 패트릭도 일본지부에서 경력을 마감할 생각은 없었다.
본부로 올라가서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었다.
이번 일은 그런 야망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대사관으로 돌아온 단테 패트릭은 보고서를 새로 쓰기 전 메일로 작전 결과에 대해서 에이전트 에스팀에게 알려주었다.
'결과 정도는 알려줘야지.'
이미 에이전트 에스팀에 대한 미안함은 단테 패트릭의 머릿속에서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보안이라는 말과 지부장의 지시라 두 가지 단어는 에이전트 에스팀에 대한 미안함을 상당 부분 잊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
리안이 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열었다.
리안은 무슨 약속이 있었는지 꽤 잘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평소 회사에 입고 다니던 옷과는 달리 한눈에도 꽤 고가의 원단으로 만들어진 맞춤 양복이었다.
특히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는 3만 불이 넘는 바셰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의 스포츠 모델인 오버시즈(Overseas) 모델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동안 쉬었으니 이제 이제 일을 해야지."
내가 말했다.
리안이 그런 나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퇴근한 사람을 다시 불러들여?"
리안과 함께 일을 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지만 퇴근한 다음에 다시 사무실로 불러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에야 동등한 파트너였으니 명령을 내리지 못한 것이지. 이제 내가 팀장이잖아. 바로 네가 억지로 맡긴 팀장!"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내 발등을 내가 찍은 셈이네. 그래 이번에는 어디야?"
"일본 닛케이 255···."
일본이라는 말에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본?"
"응."
"지금 최악이라는 일본에 투자하겠다는 거야?"
"맞아. 내일 일본 도쿄 증시가 열리면 빠르게 매입해야 하니 미리 준비를 맞춰 줘."
"하···. 이런 엉뚱한 팀장님을 봤나. 팀장이 되고 처음부터 야근을 시키네. 그렇게 갑자기 일본 증시에 투자하겠다는 이유가 뭔데?"
리안이 물었다.
"지금 일본 경제나 증시가 최악이잖아. 특히 은행 부실이 최악이지. 대책이 나올 때가 됐어."
"그건 그렇지만 그게 언제 나올지 알고?"
경기가 안 좋아지고 증시가 나빠지면 어느 나라 정부든 활성화 대책을 발표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언제일지는 내부 관계자가 아닌 이상 알 수 없었다.
실제 일본 증시는 작년부터 계속 나빴지만, 일본 정부는 시장이 만족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다음 주 월요일에 일본의 모리 총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책을 발표할 것 같아. 대책이 발표된다면 일본 은행개혁이 중심이 되겠지."
"미일 정상회담이 그런 정책을 발표하기에 좋은 시점인 것은 맞고 미국도 좋아할 정책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모리 총리의 돌출 행동들을 봐서는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어?"
리안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모리가 돌출 행동을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 지지기반이 있을 때지. 이번 주 발표된 일본 국민의 모리에 대한 지지율이 한자리야. 쫓겨나더라도 그나마 모양 좋게 쫓겨나려면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런 발표를 하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미·일 정상회담보다 더 좋은 무대가 어디 있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나는 좀 더 강하게 설득했다.
"알았어. 결국, 은행권 개혁이 발표되면 수혜를 입을 주식을 분석해서 내일 최대한 많은 많이 오를 것 같은 주식을 사들이라는 거지?"
"맞아."
내가 말했다.
리안은 자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파티는 다 갔네."
잠시 후 사무실 문이 열리고 다른 직원이자 리안 가문의 집사인 카이 황이 가방 하나를 든 채 사무실로 들어왔다.
"슈트케이스 가져왔습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시지요."
카이 황은 들고 있던 가방을 리안의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불편했는데···."
리안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이 황은 슈트케이스 가방을 열고는 서 있는 리안의 옷을 갈아 입혔다.
나는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며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너희 집이냐? 회사에서 옷 정도는 혼자 갈아입는 것이 어때?"
"아··· 미안···."
리안은 그제야 나를 바라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카이 아저씨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카이 황은 순식간에 리안의 옷을 갈아입힌 다음이었다.
카이황은 리안이 입고 있던 양복을 슈트케이스에 넣었다.
그가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밤에 드실 야식을 주문해 놓았습니다."
일을 알아서 처리하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조금 전 본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되도록 빨리 다른 사람을 구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