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는 없다. (2)
류오린은 보수적인 금융회사였다.
선물이나 옵션 투자에 관한 내부 규정을 바꾸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할지도 고민해야 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리안에게 팀장직을 넘기거나 AAM에 투자하거나 정 안 되면 회사를 그만둘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게 좋은 방법인지는 의문이었다.
내 걱정을 눈치챘는지 리안이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정 안되면 카이 아저씨에게는 최후의 수단이 있으니까. 이런 일에 써먹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확실한 방법···."
"그 방법이 뭔데?"
내가 물었다.
리안이 카이 황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카이 황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저씨가 말하지 말라네. 그냥 그런 방법이 있다고만 알아둬."
'이 사람들이··· 한껏 궁금하게 하고 그냥 넘어가는 거야?'
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지만 단호한 표정을 보아서는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특히 카이 황의 표정이 그랬다.
"회사에 규정변경에 대한 말을 하려면 실적이 조금이라도 높은 게 낫겠지."
리안의 화제를 돌렸다.
"그렇지."
"그런 면에서 나도 천만···달···"
"도련님!"
"천만··· 홍콩달러를 나스닥 선물에 투자할게."
리안은 아무래도 처음에 천만 달러를 투자한다고 하려고 했던가 카이 황의 말에 홍콩달러로 말을 바꾼 것 같았다.
홍콩 달러라고는 하지만 천만 홍콩달러면 미국 달러로도 백삼십만 불이 조금 안 되는 거액이었다.
"저도 삼백구십만 홍콩달러를 투자하겠습니다."
카이 황이 뒤이어 말했다.
삼백구십만 홍콩달러면 달러로는 오십만 불 정도였다.
나는 카이 황이 투자한다는 액수에 많이 놀랐다.
이번에 내가 선물에 투자하는 금액만 삼천만 불이었다.
리안의 투자한다고 하는 천만 홍콩달러, 즉 백삼십만 불도 내 삼천만 불에 비하면 4%가 조금 넘는 금액에 불과했다.
오십만 불 자체는 그보다 적은 금액이었다.
액수 자체로는 그리 많은 금액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카이 황은 리안 가문의 집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오십만 불을 예금 같은 즉시 찾을 수 있는 현금성 자산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오십만 불을 곧바로 투자할 정도라면 실제 재산은 그보다 훨씬 많다고 봐야 했다.
억만장자라고 해도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경우는 적었고 특히 홍콩 부자들은 부동산이 재산의 중심인 경우가 많았다.
리안의 지인들을 중심으로 투자를 받는 회사에 리안의 아저씨들인 홍콩 부호들이 투자하는 금액이 오십에서 백만 불 정도였다.
물론 그 부호들이 가지고 있는 현금을 모두 투자할 리가 없지만, 카이 황도 오십만 불이 가지고 있는 현금 전부는 아닐 것이다.
'적어도 한 달 사이 선물 옵션으로 대박이 나기 전 나보다 훨씬 부자라는 말이잖아? 아니 그런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집사 일을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기는 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카이 황의 말에 별로 놀라지 않는 것을 봐서는 그도 카이 황이 그 정도 투자할 재산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도대체 리안 집안은 얼마나 부자인 거야?'
내가 알기로는 리안 집안의 대부호이기는 하지만 홍콩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부자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내가 아는 것보다 리안의 가문에는 재산이 많은 것 같았다.
***
수요일 도쿄 주식시장이 끝나고 난 후에도 긴장한 채 미국 주식시장을 열리기를 기다렸던 우리 팀은 새벽에 선물을 모두 처분했다.
모든 거래를 끝내고 리안이 가져온 포도주를 나눠 마셨다.
"이번 투자도 대성공이네."
어제 일본 닛케이 255지수는 일주일 사이 10.6%나 올랐다.
이번에도 리안이 선택한 기업들의 주가는 주가지수를 뛰어넘는 수익률을 얻었다.
무엇보다 기쁜 사실은 매매수수료를 제외하고도 AAM의 투자금은 드디어 원금이었던 이천만 불을 넘었다는 점이었다.
이미 내 개인계좌에 있는 잔액을 합치면 이미 도이치뱅크에서 빌린 돈을 갚고도 남았지만 그래도 파생상품이 아니라 투자만으로 원금을 만회한 것은 기분이 달랐다.
부담감을 벗을 수 있었다.
AAM의 투자 수익률이 마음의 위안을 줬다면 나스닥 선물 수익률은 금전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
단 3일 사이에 나스닥 지수는 6.2%나 폭락했다.
일본 증시는 아직 오를 여유가 있어 보였기 때문에 처분하지 않았지만 일단 나스닥 선물은 모두 처분했다.
내가 그 3일 사이에 선물로 얻은 이익은 삼천삼백만 불이 넘었기 때문에 일단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수익률로만 따지면 110%가 넘는 수익률이었다.
리안과 카이 황도 100%가 넘는 수익률을 얻었다.
"아깝네. 천만 달러 투자했으면 천 백만 달러 벌었을 거잖아."
리안은 천만 불을 투자하지 않은 것을 아까워했다.
"죄송합니다."
카이 황이 그 모습에 사과했다.
"아니야. 그래도 아깝기는 하네. 천만 달러 더 있으면 루카스 아저씨도 집 파셨을 거 아니야. 그럼 코디 그 자식도 옆집에서 쫓아낼 수 있었을 텐데···. 아저씨도 알잖아요. 코디 그 자식이 매일 밤 양아치 같은 놈들 데려와서 파티해서 동네 분위기 다 흐리는 거···."
리안은 뭔가 많이 아쉬워하는 듯했다.
"아, 아저씨 원망하는 거 아니에요. 아저씨에게 이런 일로 원망하면 제가 정말 개새끼죠."
분위기를 보니 리안이 이걸로 카이 황을 크게 원망하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계좌 잔액을 바라보았다.
AAM의 계좌에 든 투자금과 합치면 계획했던 일억 불을 벌어들인 셈이었다.
내 생각보다 너무 빨라서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돈을 버는 것이 이렇게 쉬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작 일억 불을 벌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특히 지난번에 카이 황이 이야기했던 류오린 내부 규정이 생각났다.
이대로라면 류오린이 내부 규정을 이유로 나에게 간섭할 가능성은 작아졌다.
그렇지만···.
CIA는···?
미국 정부는···?
미국 정부의 다른 기관이 그러하듯 CIA에도 주식투자에 관한 내부 규정이 있었다.
정보기관의 종사자가 임무 중 취득한 정보로 주식투자를 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내 경우는 위장 임무 중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 규정에 해당하는지는 정확하지 않았다.
에디 미첼의 경우만 봐도 어느 정도 재량권이 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런 판단을 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CIA라는 사실이었다.
일억 불을 벌었다고 내가 이대로 CIA를 그만둔다면 당연히 CIA는 그 이유를 알아내려고 할 것이다.
내부 정보를 이용한 것으로 CIA가 판단한다면 내가 번 돈 전부를 미국 국고에 몰수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다른 투자는 그렇다고 해도 이번에 한 투자는 CIA 일본 지부를 통해서 받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제야 선물투자에 내 개인계좌로 투자한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만약 AAM의 계좌만을 사용했다면 변명할 거리가 있었지만 내 개인계좌는 성격이 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적어도 CIA 일본 지부는 나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CIA나 류오린을 내 행동을 귀찮게 하는 제약으로만 생각했다.
에디 미첼의 사망 이후 CIA는 뜬금없이 조사지시를 내리고는 했다.
갑자기 출장을 가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마 다른 CIA 요원들이 내 불평을 들으면 너무 편해서 불평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도 머릿속으로는 내 상황이 다른 CIA 직원들과 비교하면 아주 편하고 좋은 환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임무를 위해 몇 날 며칠을 잠복하거나 오지에서 고생하는 현장 요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당장 나도 CIA에서 정보분석 요원으로 처음 일할 때는 말 그대로 어두운 골방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자료를 읽고 보고서를 쓰고 또 읽고 보고서를 쓰고는 했다.
어떤 때는 컴퓨터 앞에서 암호를 풀기 위해 일주일을 넘게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내 상황은 다른 지부에 배치된 정보분석 요원과 비교하면 훨씬 나은 경우였다.
정보학교에서 다른 정보분석 요원들에게 들은 말에 따르면 아시아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 배치된 정보분석 요원의 상황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지부 정보분석 요원은 보고서를 쓰고 그 보고서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역본부에 속한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보고를 준비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그렇지만 '모든 말이 자신의 짐이 가장 무겁다고 느낀다.'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이 가장 힘들게 느껴지게 마련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요원들은 나처럼 투자로 단기간에 1억 불을 벌 능력이 없지 않은가?
이런 이유로 나는 며칠 전까지 1억 불을 벌면 CIA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작 1억 불을 벌자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지난번 일본에서 만났던 CIA 일본 지부의 단테 패트릭과 만났을 때 대화가 떠올랐다.
단테 패트릭은 CIA 요원이면서 주일 미국대사관의 서기관이었다.
CIA 일본 지부장은 아니겠지만 CIA 일본 지부에서도 꽤 높은 지위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나에 대해서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에이전트 에스라는 에디 미첼이 나를 장난스럽게 부르던 이름을 내가 속한 팀의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반 동안 그와 모리 총리에 대한 작전을 의논하면서 알아낸 정보로는 CIA 일본 지부장조차 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사실상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에디 미첼의 죽음으로 라인이 붕괴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정권 교체 과정에서 CIA를 그만뒀을 수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CIA에서 내 상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소수거나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CIA를 그만둘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CIA를 그만두면 내가 그만둔 이유에 대한 조사가 진행될 테고 그만둔 이후에도 한동안 나에 대한 밀착 감시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내 투자에 대한 조사도 있을 것이다.
중국 사자성어 중에 타초경사(打草驚蛇)라는 말이 있다.
섣부른 행동으로 화를 자처한다는 의미였다.
지금 CIA를 그만두는 일이 바로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CIA를 그만두기 전에 흔적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
내가 막 결정을 한순간 옆에서 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무슨 생각을 해! 계좌에 든 숫자만 봐도 정신을 못 차리겠어?"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니 어느 사이에 리안과 카이 황이 다가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팔천오백만 불이 넘네요. 듣자니 오십만 불로 한 달 조금 넘는 시간에 번 돈이라는 데 사실인가요?"
카이 황이 물었다.
"대충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숫자에 불과했지만, 저 숫자는 내 능력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얼마 전까지 나는 아무리 노력하고 능력을 증명해도 미국의 유리천장을 뚫지 못하고 아시아에서 온 제법 능력이 있는 이민자 2세에 불과했다.
저 숫자는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카이 황이 옆에서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세금을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세금이라는 말에 나는 카이 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