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51화 (52/270)

서몽

# 오리는 오리다.

투자계약서를 본 웬 지하오는 칠천만 불이라는 금액에 놀란 듯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일주일 결근한 것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된 것 같은데요? 아닙니까?"

"무슨 말인지는 알겠네. 수고했네. 하지만 이런 큰 계약은 사전에 팀장인 나와 이야기를 해야···."

"같은 이야기를 계속하시네요. '명목상' 팀장일 뿐 아닙니까? 더구나 이야기하면 팀장님이 뭘 하실 수 있는데요? 지난번에도 이야기했지만 여기 팀장님께서 일하던 상하이가 아닙니다. 팀장님은 팀을 신경 쓰십시오. 우리 팀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웬 지하오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눈빛을 본 순간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야 할 것 같았다.

웬 지하오의 사무실을 나와 우리 팀의 사무실로 가기 위해서는 예전 근무하던 팀 사무실을 지나야 했다.

돌아가는 길에 아직 퇴근하지 않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모였다.

지난 며칠 동안 웬 지하오가 워낙 난리를 친 덕분이었다.

그들에게는 나와 웬 지하오의 다툼을 일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여흥 거리였다.

팀원들은 갑자기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팀장 자리를 꿰찬 웬 지하오를 싫어했다.

하지만 지하오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못지않게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른 직원들이 나를 싫어하는 데는 내 잘못이 있었다.

작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보스였던 에디 미첼의 사망 소식을 듣기 전까지 다른 팀원들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처음 류오린에 왔을 때만 해도 나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혹시 누가 내 정체를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직원들과 거리를 두었다.

그런 내 행동이 다른 직원들에게는 거만하고 자신들을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어쩌면 리안의 말대로 평소 내가 거만하게 보였을 수도 있었다.

은연중에 다른 팀원들을 무시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면 나를 속이는 일이었다.

아마 이런 내 생각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겉으로 드러났고 다른 직원들도 그런 내 생각을 엿본 것인지도 모른다.

팀원 중에서 나의 행동에 반감을 느끼지 않은 유일한 직원이 있다면 그건 리안이었다.

내 행동에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는 내가 자신들보다 낫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리안이 보기에 나나 다른 직원이나 그게 그거였을 것이다.

결론은 기존 팀원들에게는 나나 웬 지하오나 모두 비호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둘이 싸우는데 팝콘을 먹으며 볼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할 것이다.

한 사람만은 조금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바로 장 샤오이였다.

그녀는 나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팬이라는 말처럼 나에 관한 호의가 느껴지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장 샤오이의 미소에 순간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치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순간적으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몸을 돌렸다.

지난번 제안을 거절한 이후 장 샤오이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거리를 둔다고 해서 내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해서 기분이 상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리안과 닮은 점이 있었다.

뭐라 말하기 어려운 미묘한 눈빛이었다.

리안이나 장 샤오이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네가 어디까지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직은 내가 자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당연히 이런 느낌은 내 착각일 수도 있었다.

'오늘따라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럽네.'

리안과 카이 황이 있는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나중에 사무실을 옮길 기회가 있으면 옮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리안과 카이 황이 퇴근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웬 팀장이 뭐래?"

리안이 물었다.

"뭐라고 하기는···. 갑작스러운 투자유치에 당황하는 것 같더라."

"칠천만 불이면 놀랄 만하지."

나는 내 자리로 가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자에 앉자마자 양손을 머리 뒤로 뻗어 깍지를 꼈다.

그리고 등을 의자에 기대며 고개를 젖혔다.

잠시 그 자세로 몇 분간 있던 나는 깍지를 풀고 책상 위에 손을 얹었다.

"아무래도 웬 지하오를 류오린에서 치워버려야 할 것 같아."

모니터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다.

"치워버리다니? 웬 팀장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차피 팀이 나눠질 때까지만 기다리면 다 해결되는 것 아니야? 굳이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리안이 말했다.

"아니. 이대로 두면 두고두고 문제가 될 것 같아. 그리고 나를 먼저 건드린 것은 웬 팀장이야."

왕 웬준과 웬 지하오와의 일을 겪으면서 내가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어설프게 봉합하고 넘어가면 나중에 탈이 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할 것은 없잖아. 아무래도 웬 지하오가 홍콩으로 와서 팀장이 되니 의욕이 넘쳐서 한 행동 같은데?"

리안은 내가 분란을 만드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미국에 있을 때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어. 오리처럼 보이고 오리처럼 걷고 오리처럼 말하면 그것은 오리다. 웬 지하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나를 적대하고 계속 내 일을 물고 늘어지면 그게 적이지 뭐겠어."

나도 만약 내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사이가 나쁘고 귀찮다고 해도 웬 지하오를 치워버릴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여러 가지 약점이 있었다.

우선 내가 관리하는 AAM의 최초 자금 출처는 에디 미첼이 도이치뱅크에서 빌린 이천만 불이었다.

어떻게 대출을 받았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완전히 합법적인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의 법인은 아무런 자산도 기술도 없는 이름뿐인 회사였다.

어떤 식으로든 불법 또는 편법이 동원됐을 가능성이 컸다.

에디 미첼이 사망한 이상 도이치뱅크 쪽에서 영국 회사에서 AAM에 이르는 자금흐름을 추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류오린 내에서는 에디 미첼과 AAM의 관계를 아는 간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웬 지하오가 연결된 중국 쪽 간부도 있었다.

AAM을 통해서 자금흐름을 역추적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류오린에서 한 일은 도이치뱅크로서는 배임 횡령이었다.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 거래에 깊이 연관된 왕 웬준과는 달리 웬 지하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미친 척하고 고발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무엇보다···.

웬 지하오가 나에 대해 가지는 관심 그 자체가 문제였다.

지금이야 단순히 무단결근을 추궁하는 정도지만 사이가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나를 조사할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CIA 요원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기는 어렵겠지만 내 정체에 대한 의심을 둔다면 그건 엄청난 위협이었다.

내가 웬 지하오를 류오린에서 쫓아내려는 이유였다.

생각 같아서는 왕 웬준처럼 처리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 왕 웬준 살인 사건으로 조사를 받은 상황에서 웬 지하오까지 사망한다면 홍콩 경찰의 강도가 높은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웬 지하오가 내 뒤를 캐는 것을 막기 위해서 경찰 조사를 받을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이건 작은 일을 오히려 키우는 일이었다.

요원이 가장 피해야 할 하는 일이 바로 현지의 경찰 조사를 받는 일이었다.

"어떻게 웬 팀장을 회사에서 치워버릴 건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웬 팀장 뒤에는 중국 본토의 권력자들이 있어."

리안은 전체적으로 내 생각에 부정적이었다.

리안이 말을 이었다.

"본토의 홍콩에 대한 영향력은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 일이 없어. 장쩌민 주석이 2년 후에 주석직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상하이방의 권력이 단기간에 사라질 리도 없고···. 상하이방 인간들이 짜증이 나기는 하지만 대부분 기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간들이라서 꽤 유능해. 계파의 뿌리가 없다 보니 계속 지속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 15년에서 20년간은 어느 정도는 권력을 유지할 거야."

말을 하는 리안의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그러고 보니 리안의 가족이 캐나다에 이민을 간 이유가 상하이 방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라고 했지.'

리안의 말을 듣다 보니 리안은 남고 리안의 아버지가 홍콩을 떠난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리안은 상하이 방이 몰락한 20년 후를 기약할 수 있지만, 리안의 아버지는 그럴 수 없어서 떠난 것 같았다.

리안의 아버지가 홍콩에 있더라고 재산이 있으니 풍족한 삶을 살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그냥 돈만 많은 졸부의 삶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리안이 류오린에서 주식투자를 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홍콩의 부호들은 부동산이나 유통업 금융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홍콩의 4대 천왕이라면 일반인들은 유덕화, 여명, 곽부성, 그리고 장학우를 떠올리지만, 홍콩 경제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의미가 있다.

현재 홍콩의 경제를 움직이는 4대 가문은 부동산개발사 청쿵 부동산을 소유한 리카싱 일가, 부동산기업 헨더슨 랜드(Henderson Land)화를 소유한 리샤우키 일가, 순훙카이 부동산(新鴻基)의 궈더성 일가, 그리고 신세계개발(New World Development)의 정위퉁 일가를 가리킨다.

이들이 소유한 기업은 홍콩 증시 상장 기업 중에서 시가 총액의 3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리안은 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에도 부동산 사업이나 유통업을 하지 않고 류오린에서 주식을 사고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리안은 가문의 돈이 아니라 지인들의 돈을 조금씩 투자받아서 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리안이 류오린에서 하는 일은 그에게는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직업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란 집안과 사이가 나쁜 상하이방 사람들일 것이다.

그나마 최근 조금씩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설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부탁을 받아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대지만 나와 함께 투자회사도 차렸고 나를 따라 자신의 돈으로 나스닥 선물에 거금을 투자하기도 했다.

아마도 장쩌민 주석의 임기가 2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영향일 것이다.

리안은 앞으로 15년에서 20년간 상하이방의 권력이 유지될 것이라고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권력이 줄어드는 속도를 늦추기 위한 과정일 뿐 주석직을 차지하고 있을 때와 같을 수는 없었다.

나로서는 좋은 변화였다.

"네 말 대로 웬 지하오가 가진 힘은 중국 본토에서 나오겠지. 나도 웬 팀장을 홍콩에서 어떻게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여기서 치고받고 해봐야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내일 상하이로 가보려고···. 상하이에 가서 웬 팀장에 대해서 조사하다 보면 뭔가 나올 수도 있잖아. 웬 지하오의 힘이 중국 본토에서 나온다면 중국 본토로 가서 그 끈을 끊을 방법을 찾아봐야지."

여전히 리안은 내 말에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 너는 너무 극단적으로 인간관계를 생각하는데···. 굳이 적으로 돌릴 필요 없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도 있어. 어차피 누군가가 기르는 개일 뿐이야. 먹이만 주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를 향해 짖지 않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아."

"그럴지도···. 봐서."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나는 웬 지하오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내가 본 웬 지하오는 하나를 주면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그런 인간이었다.

나는 리안과 대화를 끝내고 내 앞에 놓인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안이 물었다.

"퇴근 안 해?"

"오늘 투자금을 새로 받았는데 투자를 해야지."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투자? 어제오늘 주가 다 박살이 나던데? 설마 너···."

리안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맞아! 낮에 확인해보니 어제 나스닥이 다시 하락하기 시작하더라고···. 이제 세금으로 왕창 뗄 걱정도 덜었는데 본격적으로 해야지."

내 말에 리안이 옆에 있던 카이 황을 바라보았다.

카이 황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일도 있고 그래서··· 저도 이번에는 할 말이···."

지난번 카이 황의 만류로 리안이 금액을 줄였다가 아쉬워한 일 때문인 것 같았다.

"좋았어! 그래 넌 이번에 얼마나 투자하려고?"

리안이 물었다.

"칠천만 불 전부···는 좀 그렇고 사천만 불 정도만 할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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