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서툴더라도 계속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나스닥 시장이 끝나자 나는 기지개를 켰다.
밤새 굳어있던 몸이 조금은 이완되는 느낌이 들었다.
창밖을 보니 여전히 어두웠다.
눈을 위로 올려 벽에 주르르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뉴욕은 오후 4시 30분 홍콩은 오전 5시 30분 새벽이었다···.
밤을 꼬박 새웠다.
예전처럼 내 투자금액이 적었다면 어제 오후에 나스닥 선물에 투자하고 퇴근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전과 달리 지금은 금액이 커지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나스닥 선물 시장은 이론적으로는 하루 23시간 거의 온종일 거래되는 시장이었다.
그렇지만 나스닥 선물 시장의 기반이 되는 나스닥 시장이 열리지 않는 시간에 거래되는 선물 거래량은 하루에 많아야 2000건에서 1000건 정도였다.
거래금액이 몇천 만 불에 불과하다 보니 리안이나 카이 황은 말할 것도 내가 가진 투자금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에 비해 나스닥 시장이 열렸을 때 거래량은 평균 십만 건 정도였다.
하루에 최소 200억 불 가까운 나스닥 선물옵션이 나스닥 시장이 열리는 동안 거래되었다.
우리는 어젯밤 나스닥 시장이 개장되자마자 빠르게 매도 포지션의 선물 즉 나스닥 지수 하락에 돈을 투자했다.
이때만 해도 모니터 앞에서 밤을 새울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선물에 투자하고 얼마 후에 기업들의 실적이 줄줄이 발표되었고 그에 따라 나스닥 지수가 하락하고 선물지수도 따라서 하락했다.
점점 떨어지는 지수를 지켜보다 보니 밤을 새우게 된 것이다.
옆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던 리안이 나를 보며 말했다.
"에드릭, 너 무슨 신기(神氣) 같은 것 있는 거 아니야? 어떻게 나스닥 선물 하락에 투자하자마자 나스닥 지수가 하루에 3.6%나 떨어져?"
"신기라···."
나는 리안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신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생각해도 주식투자에 꽤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실력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스닥의 가격이 요동칠 때 운 좋게 멋모르고 투자를 시작해서 선물과 옵션에서 말 그대로 대박을 터트린 덕분이었다.
나는 여전히 매매 시점을 잡는 것이 리안은 물론이고 카이 황보다 미숙했다.
지금 슬쩍 리안의 거래 창을 보니 나보다 조금이지만 수익률이 높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간단한 팬케이크와 커피를 준비해놓았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카이 황이 회의용 테이블 위에 간단한 음식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옆에서 같이 일하고 있던 것을 봤었다. 그런데 인기척도 없이 언제 저런 준비해놓은 것이다.
"이 시간에 팬케이크를 어디서 구해온 거예요?"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팬케이크를 보며 말했다.
"집에 전화를 걸어서 준비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주방장을 호텔에서 몇 달 교육해서 먹을만 하실 겁니다."
카이 황의 말을 들으며 나는 팬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리안은 피곤한지 팬케이크를 한 손에 들고는 긴 소파에 그대로 몸을 뉘었다.
카이 황이 그런 리안의 모습에 보며 약간 얼굴을 찡그렸다.
아마 내가 없었으면 리안에게 한소리 했을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리안을 도와줄 겸 카이 황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호텔에서 먹던 것보다 맛있는데요?"
내 칭찬에 기분이 좋았는지 카이 황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다행이군요. 입맛에 안 맞으시며 어쩌나 했는데요. 커피도 좀 드셔보시지요."
거품이 가득한 에스프레소였다.
그렇다.
우리 사무실에는 에스프레소 기계도 있었다.
심지어 내가 일주일 자리를 비운 사이에 한쪽에 작은 전자레인지까지 있었다.
직원 중 한 명이 오븐을 들여놓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는데 그게 리안이 아니면 카이 황인지는 불확실했다.
나는 카이 황의 말에 따라 에스프레소를 마셔보았다.
에스프레소에서 약간의 단맛과 함께 술맛이 느껴졌다.
"이건···."
"카페 코레토(Caffe corretto)입니다. 밤을 꼬박 새우셨으니 잠시라도 피로를 풀라는 의미로 준비해봤습니다."
카페 코레토는 이탈리아어로 '적절한 커피'라는 뜻이었다.
뭔가 의미가 있어 보이는 선택이었다.
'평소와 다른 커피를 그것도 '적절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커피를 준비한 것이 우연인가?'
카이 황의 표정만 보아서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카이 황의 말을 들으며 조금 더 마셔보았다.
"내가 아는 카페 코레토와 맛이 조금 다르네요?"
"카페 코레토에 그라파가 아니라 삼부카를 넣었습니다."
삼부카를 넣은 것도 뭔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
카페 코레토를 준비한 데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한번 생각했더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났다.
잡념을 없애기 위해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고개를 돌리던 내 눈에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는 리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리안이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그런가 보네요. 이런 곳에서 잠드시면 안 되는데···."
카이 황이 리안을 깨우려는 듯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급히 리안에게 다가가는 카이 황의 팔을 붙잡았다.
"잠시 그냥 자게 두죠.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려면 꽤 시간이 남은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던 카이 황이 책상 밑에서 작은 담요를 꺼냈다. 그리고 리안에게 덮어주고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번에는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항공권이었다.
"어제 말씀하신 상하이행 캐세이퍼시픽 항공 368편입니다. 9시 출발하는 항공편이니 맞춰서 가시면 됩니다."
"예약만 해놓으면 제가 그냥 공항에서 찾으면 되는데···."
이야기해놓기는 했지만 밤새 항공권을 예약하고 찾아오게 할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지요."
카이 황이 미소를 지으며 쪽지 하나를 더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건 상하이에 도착하면 마중 나올 사람의 전화번호입니다."
"마중 나올 사람이요?"
갑작스러운 말에 내가 물었다.
"상하이에 가시더라도 웬 지하오 팀장을 조사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겁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왕 웬준 팀장이나 웬 지하오 팀장이나 모두 BJ인베스트먼트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BJ인베스트먼트의 주인은 바로 중국 ’10대 원수’의 한 명인 천이(陳毅) 전 부총리의 셋째 아들인 천샤오루(陳小魯)입니다. 상하이에 대해서 잘 아는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아···."
그렇지 않아도 어디서부터 조사해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민간조사업체인 힐앤어소시에이츠 (HILL & ASSOCIATES, H&A)에도 근무한 경력이 있고 상하이 사정에 밝습니다. 꽤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리안이 알면···. 리안은 제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던데요?"
내가 물었다.
"리안 도련님이 조심스러운 것은 몇 년 전 가족이 캐나다로 떠날 때 기억 때문일 것입니다. 리안 님께 아버님 즉 가주님은 어릴 때부터 존경한 거목이셨습니다. 그런 가주님께서 권력에 밀려 홍콩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쫓기듯 가신 일에 큰 충격을 받으셨죠. 그 후로 어지간한 하면 권력과 맞서거나 엮이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카이 황의 표정에서 리안에 대한 걱정과 연민을 읽을 수 있었다.
거대 권력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나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속한 CIA는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힘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사하는 곳이었다.
당장 요 몇 달 CIA가 한 것으로 추측 또는 관여한 일만 해도 필리핀의 대통령을 갈아치웠고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은 탄핵 직전까지 끌고 갔으며 심지어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는 일본 총리를 굴복시켰다.
물론 앞선 두 가지는 내 추측일 뿐이고 일본의 모리 총리는 우리가 아니더라도 언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기는 했다.
하물며 미국보다 훨씬 강압적인 중국의 권력에 몰려 가족이 흩어진 상황이라면 리안이 권력과 되도록 엮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했다.
"리안의 행동을 이제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겠네요. 그런 일을 당했다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네요."
카이 황이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리안 도련님의 저런 행동을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죠. 그렇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 지도부의 성격을 봤을 때 가주 어르신께서 홍콩을 떠나신 것으로 이미 대가를 치른 셈입니다.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리안 도련님께 해를 끼칠 가능성은 작습니다. 그건 항복한 상대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니까요."
카이 황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무슨 일로 리안 집안이 중국 상하이방과 척을 지게 됐는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리안이 그대로 홍콩에 남겨 놓은 것으로 봐서는 사생결단을 낼 만큼의 일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체면에 관한 일이고 카이 황의 말대로 리안의 다른 가족이 이미 홍콩을 떠남으로써 항복을 한 셈이었다.
"리안은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내가 물었다.
카이 황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알고는 계시죠. 다만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올해 들어서 에드릭 님과 어울리면서 많이 바뀌셨습니다."
나는 카이 황의 말에 그가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가 웬 지하오를 처리하는 모습을 리안에게 보도록 하시려는 것이군요?"
내 말에 카이 황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십니까?"
"도와주시는데 기분이 나쁠 리가 있겠습니까? 아예 저 대신 웬 지하오를 치워주셨으면 더 고마웠을 텐데 그건 좀 아쉽네요."
카이 황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거 아니죠. 웬 지하오는 리안 님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데 제가 뭐하러 손을 쓰겠습니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웬 지하오를 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로군.'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이미 카이 황은 웬 지하오에 대해서 거의 모든 것 알고 있는 듯했다.
어제 했던 말과는 달리 카이 황은 웬 지하오의 가장 윗선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은 상하이 도착한 순간 사실로 밝혀졌다.
"카이 후이라고 합니다."
마중을 나온 사람은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거구의 남성이었다.
이름만 말하지 않았더라도 카이 황과 혈족이라는 것 알 수 있을 만큼 닮아 있었다.
나이를 차이를 보면 동생이거나 사촌 형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명함을 보니 나도 이름을 들어본 중국 최대 법무법인 중 하나인 진두(金杜)의 율사, 즉 변호사였다.
힐앤어소시에이츠에서 일했다고 해서 무슨 조사원인가 했던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