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임무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다.
홍콩에서 투자를 마친 이후 나는 도쿄에 와 있었다.
본부에서 내려온 새로운 지시 때문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단테 패트릭을 만났다.
다행히 이번은 지난번에 만났던 식당이 아닌 CIA의 비밀 안가였다.
이번에 내가 할 일은···.
"선거에서 하시모토가 총리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요?"
"맞네."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맡은 임무는 무려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특정 후보인 하시모토를 낙선시키는 일이었다.
여당인 일본 자민당의 총재로 선출되는 사람은 자연적으로 다음 일본의 총리가 된다.
한마디로 CIA의 지시는 일본 총리 선거에 개입하는 일이었다.
요 몇 달 동안 CIA의 지시를 받고 일을 하면서 조금 회의가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필리핀 인도네시아는 그렇다고 해도 일본은 미국의 최우방국 중 하나였다.
그런 일본 총리를 낙마시킨 것도 모자라 다음 총재 선거에도 관여하려고 하다니···.
내가 뭐 그리 도덕적인 인간은 아니었지만 이건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지시가 내려온 이상 따라야 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가능성 있을 때 이야기지 이번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게 가능한가요? 하시모토는 자민당 내 최대 계파인 다케시타파의 수장입니다. 지금 간사장인 노나카 히로무가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 사람이고요. 다른 계파 다 합쳐도 이기기 어렵습니다."
"그건 알지만, 하시모토가 다시 일본의 총리가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게 CIA의 입장이네."
"예전 총리 일 때 일들 때문입니까?"
"그게 아니면 뭐겠나. 하시모토는 임기 내내 미국과의 무역분쟁을 통해 인기를 유지했었네. 심지어 검은 화요일을 만든 당사자야. 아직도 본국에서는 그 일로 하시모토에게 이를 가는 사람들이 많아."
하시모토는 98년까지 자민당 총재이자 일본의 총리를 했던 사람이었다.
대장성 관료 출신인 하시모토는 일본 내에서 많은 개혁조치를 했고 나름이 성과도 있었다.
그렇지만 미국 정부나 미국 투자자들에게는 일본이 미국 국채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고 팔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 주장을 한 시점은 한창 아시아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7년 6월이었다.
직후에 다우존스는 하루 낙폭으로는 10년 만에 최대인 3%가 폭락했다.
당시에는 대폭락은 지금도 검은 화요일로 불리고 있었다.
"하시모토가 아니면 고이즈미를 자민당 총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인데···. 가능하겠습니까?"
현재 하시모토 외에 자민당 총재 출마를 선언한 다른 후보는 고이즈미 전 장관이었다.
고이즈미는 현재 총리인 모리 총리가 이끄는 모리파 내에서 소수 계파를 이끌고 있었다.
이미 예전에 하시모토와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엄청난 차이로 패한 적이 있었다.
그때와 지금은 계파 세력 분포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번 결과도 그때와 비슷하게 나올 가능성이 컸다.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그래서 자네들을 부른 것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도 자네 혼자만 온 것인가?"
"다른 팀원들은 각자 하는 일이 있고 무엇보다 외부로 신분을 노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저와는 연락하면서 작전을 진행할 것입니다."
나는 다시 거짓으로 꾸며내야만 했다.
이미 상대가 팀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라는 사실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겠네. 어때 방법이 없겠나? 선거가 바로 코앞이라서 시간이 없네."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나는 막막했다.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야 뭔가라도 할 것 아닌가?
모리의 경우는 사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총리에서 쫓겨나는 것이 당연한 지지율이었다.
내가 한 일은 그 일을 앞당긴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이번 일은 나와 단테 패트릭이 주도한 모리 총리 낙마와 이어지는 작전이었다.
만약 이번 일로 하시모토가 총리가 되고 예전 총리였을 때처럼 미국에 날이라도 세우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더구나 그때는 미국의 대통령이 나름 온건한 클린턴이었지만 지금은 강한 외교를 내세우는 부시 대통령이었다.
미국의 외교 정책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이번 하이난 사건 후속 처리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미국 정부는 중국이 정찰기의 승무원을 풀어주자마자 당장 이전 편지는 사과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정찰기의 조속한 반환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번 주에는 10여 년간 최대 규모의 무기를 대만에 팔겠다고 발표했다.
무기도 구축함이나 대공미사일 등등···.
누가 봐도 하이난섬과 그 인근의 남중국해에 대한 대만의 해군 군사력 강화를 위한 조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과 경제 분야에서 충돌한다면 동아시아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도 부담이 가중된다는 의미였다.
"자료를 주시면 제가 검토해서 팀원들과 대책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단테 패트릭이 탁자 위에 서류 가방들을 올려놓았다.
하나가 아닌 세 개의 서류 가방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준비해놨네."
단테 패트릭은 세 개의 서류 가방 중 하나씩 열어 보였다.
서류 가방들에는 서류가 가득 들어 있었다.
임무 상 필요해서 속독법을 배운 나로서도 부담이 가는 분량이었다.
"이게 다 관련 서류들입니까?"
"그렇네. 이번에 개정된 선거방법, 파벌 구성, 파벌 개인 의원들의 성향 분석, 연구기관의 예상 득표 조사 결과 같은 것들이네."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많네요."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적지는 않지."
나는 서류를 둘러보면서 대답했다.
"일단 서류를 읽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단테 패트릭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시간이 없네. 빨리 검토해서 팀원들과 대책을 의논해서 알려주게. CIA 일본 지부는 우리대로 준비를 해두겠네."
나는 고개를 들어 단테 패트릭을 노려보았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서류 더미를 알려주고 시간이 없다니···.
이게 할 말이라는 말인가?
단테 패트릭이 간 후에 안가에 남아서 나는 서류를 검토했다.
가장 중점적으로 본 것은 현재 파벌 분포와 그 파벌을 구성하는 의원들에 대한 정보였다.
기본적으로 일본 총재 선거는 파벌 간의 담합으로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서류를 읽어보고 내가 느낀 점은 파벌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이 당내 파벌이지 일본의 파벌은 정당 내 또 하나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민당 내 파벌은 크게 보면 세 개의 파벌로 구분되어 있고 그 역사는 자민당 시작부터라고 할 수 있었다.
파벌이 세 개인 이유도 자민당이 본래 세 당이 합쳐진 정당이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하시모토는 경세파라고도 불리는 다케시타파를 이끌고 있었다. 미국과 통상분쟁을 일으켰지만 기본적으로 다케시타파는 자민당 내에서는 경제와 주변국과의 중요시하는 온건파라고 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고이즈미가 속한 모리파는 일명 청화회라고 불리는데 군대창설을 위한 헌법개정을 주장하는 강경파라고 할 수 있었다.
모리와의 사이는 좀 틀어지기는 했지만, 예전부터 미국과 가장 미국과 가까운 파벌이었다.
문제는 강경파이다 보니 주변국과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리 총리는 총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한 바로 그날 일본의 침략을 부인하는 왜곡 교과서를 통과시킨 것으로 한국과 중국의 강한 항의를 받고 있었다.
심지어 한국은 주일 일본대사를 소환하기까지 했다.
"어째···. 고이즈미가 자민당 총재가 되고 일본 총리가 되면 중국이나 한국과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내가 한국계이고 지금 있는 곳이 홍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하시모토가 총리가 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CIA의 요원이었고 고이즈미의 당선 정확하게는 하시모토의 당선을 막으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명령을 따라야 했다.
현재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자 하시모토가 속한 다케시타파는 1970년대부터 모리 이전까지 거의 30년간 일본을 지배해온 파벌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선거를 치른다면 당연히 하시모토의 완승이었다.
언론도 하시모토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나마 7월에 있는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하면 그때는 고이즈미에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언론의 전망이었다.
나는 서류를 읽고 또 읽으면서 한 가지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패배가 확정된 지금보다는 희망이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다음 날 단테 패트릭을 안가로 불렀다.
"방법을 찾았나?"
기대에 찬 눈빛으로 단테 패트릭이 물었다.
"파벌 싸움으로 가면 100% 지는 게임입니다."
내가 말했다.
단테 패트릭은 이해가 가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파벌이 속한 의원들이 자민당 총재를 뽑는데 파벌 싸움으로 가면 진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단테 패트릭이 질문을 쏟아냈다.
"게임의 규칙을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현재 고이즈미는 모리 총리의 파벌이니 한 자릿수 지지율은 모리 총리 지지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고이즈미가 파벌을 탈퇴하고 게임을 다케시타파 대 모리 파의 구도가 아니라 파벌로 대표되는 구정치와 파벌을 벗어난 새 정치의 구도로 바꿔야 합니다."
"···."
잠시 내 말을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던 단테 패트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여전히 파벌의 열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단테 패트릭이 물었다.
"이번부터 총재 선거 선출 방법이 바뀐 것은 아십니까?"
"알고 있네. 이번에 처음으로 국회의원들만이 아니라 47개 지역의 대의원 3명에게도 투표권을 주는 제도로 바뀌지 않았나. 지역 대의원들 대부분은 어차피 각 지역 국회의원들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고···."
단테 패트릭은 내 말에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물론 대의원들이 각 지역 국회의원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 표를 공략하면 역전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의원들의 표를 장악했다고 생각하는 하시모토는 대의원들에게는 관심을 가질 리가 없으니까요."
"자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 표를 다 합쳐도 전체 투표수 487표 중에서 겨우 141표에 불과하네. 여전히 국회의원들의 표가 절대적이라는 말이지."
단테 패트릭의 말에 내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의원 투표결과가 의원들 투표 전에 발표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듣기는 했지만···."
"만약 그 투표에서 고이즈미가 압승을 거둔다면 어떻게 될까요? 의원들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 아예 없는 방법은 아니군. 아니 그 방법밖에는 없겠어. 그런데 고이즈미가 대의원들을 설득할 수 있겠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역 대의원들이라면 일본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단순히 개혁이라는 명분만으로 자신들의 보스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원들을 배신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국에 흩어진 대의원들을 설득하려면 조직과 돈이 있어야 합니다. 마친 그런 조직이 일본에는 있지 않습니까?"
"설마··· 자네···!"
"예, 야쿠자요. 마침 우리 모리 총리께서는 야쿠자와 아주 친하시죠. 그리고 CIA 일본 지부도 야쿠자와 친한 것은 마찬가지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