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사람은 실수보다 고립을 더 두려워한다.
도쿄 CIA의 안가.
나가노현에서 도쿄에서 돌아온 나는 단테 패트릭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의 작전 결과는 성공적이었네."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고이즈미의 탈계파 선언과 개혁적인 공약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 같습니다. 자민당 지지자 중에서도 계파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많았는데 고이즈미의 공약이 그런 사람들에게 효과를 발휘한 거겠죠."
내가 말했다.
단테 패트릭은 이런 결과에도 얼굴이 좋지만은 않았다.
"처음보다는 고이즈미의 단선 가능성이 커지기는 했지만, 이런 국민의 지지와 자민당 총재 선거 결과는 별개네. 자민당의 총재 선거 방식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선거인단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 자민당의 대의원들이니 말이야."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단테 패트릭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국민 여론을 선거인단의 표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다음 작업이 필요합니다."
"다음 작업이라니? 어떤 작업을 말하는 것인가?"
단테 패트릭이 물었다.
"바로 일본에 있는 여러 여론조사 기관을 동원해서 고이즈미 대세론을 만드는 것이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지지율이 높다고 알려진 후보에게 투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밴드웨건 효과'를 말하는 것인가?"
밴드웨건 효과는 미국 정치학계에서 나온 이론이었다.
인간은 승자 편에 서고 싶어 하고 자신의 표가 죽은 표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심리에 기반을 둔 이론이었다.
"밴드웨건 효과도 있지만 다른 이론이 있죠. 바로 1972년 독일의 학자인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은 주장한 '침묵의 나선'이라는 이론입니다."
"침묵의 나선 효과?"
"예.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사회적으로 우세하고 다수 의견에 속하면 자신 있게 겉으로 표명하고, 소수의견에 속하면 침묵한다."라는 주장이죠. 한마디로 시간이 흐를수록 다수 의견이 점점 많아져서 소수의견은 점점 적어진다는 이론입니다."
"음···. '밴드웨건 효과' 든 '침묵의 나선'이든 두 가지 모두 여론조사 결과는 다수 의견이 실제보다 더 높게 나온다는 점에서는 같군."
단테 패트릭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가 목표는 일본 국민이 하시모토보다 고이즈미를 총리로 더 원한다는 여론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내 말에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효과가 있겠나?"
"다른 때라면 이런 전략이 먹히지 않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당장 7월에 일본인 상원인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모리 총리가 쫓겨난 가장 큰 이유도 참의원 선거가 몇 달 안 남은 상황에서 지지율이 한자리까지 떨어졌기 때문이고요. 선거를 앞에 둔 상황에서 자민당 선거인단이 국민적 지지가 높은 후보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하죠."
여론조사를 이용한다는 내 제안에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군.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이 그렇듯 일본의 여론조사 기관들도 미국의 영향력이 깊이 침투해 있지."
"그렇습니까?"
내가 물었다.
"일본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여론조사가 처음 시작된 것이 바로 미 군정 시기야. 더구나 일본 여론조사 기관을 이끄는 사람들 대부분이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이지. 한마디로 친미적인 사람들이 여론조사 기관을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네."
"그게 전부는 아니겠죠?"
"당연히 개별적인 포섭도 있지. 미국의 친구가 될 자격은 주는 것이지."
"미국의 친구요?"
"그래. 미국의 친구···. 미국은 어지간해서는 도움을 준 사람을 잊지 않지. 최악의 순간에도 보호해주려고 노력한다는 말이야. 이 세상에 그보다 더 든든한 보장이 어디 있겠나?"
"그런 이야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여론조사를 여러 번 하자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데 그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내가 물었다.
이런 여론조사는 일본 전역을 대상으로 하므로 한 번 할 때마다 들어가는 자금이 최소 천만 엔이 넘었다.
"이미 현 총리인 모리와 이야기를 끝냈네. 당연히 자신들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자금은 그쪽에서 대야지."
"아···. 모리 총리와 손을 잡다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리를 총리에서 끌어내린 것은 바로 CIA였다.
그리고 그런 사실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리 총리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상 다음 총리를 뽑는 선거에서 CIA와 협조하다니···.
"그게 정치 아니겠나. 그리고 어차피 선거를 돕는 일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계파 보스인 모리 총리와 당사자인 고이즈미는 그 사실을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총리로 있는 내내 미국과 협조할 것이고 말이야."
"그렇겠죠."
이번 작전은 사실 대단한 위험을 안고 하는 작전이었다.
만약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하시모토가 당선된다면 그리고 나중에 CIA가 고이즈미 당선을 위해서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여파는 엄청날 것이다.
물론 하시모토가 당선되어 일본 총리가 된다고 해도 CIA가 총재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외부로 밝힐 가능성은 없었다.
그건 일본 총리인 자신을 미국이 불신한다는 의미고 그건 본인이 총리로서의 권위를 무너트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총리로 있는 내내 전보다 더 미국과 각을 세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실패한 단테 패트릭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어쩌면 CIA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나는 홍콩에 머물고 있고 단테 패트릭이라면 모르지만 내가 드러날 가능성은 작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위험부담이 있다면 아무리 본부에서 지시를 받았다고 해도 이런 일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에 고이즈미가 당선되었을 때 미국이 얻을 이익은 엄청났다.
"성공하기만 하면 서기관님이 고이즈미 당선의 일등 공신이 되는 셈이군요."
"뭐 그렇지."
단테 패트릭의 함박웃음을 지었다.
"고이즈미는 총리에 당선된다고 해도 미국과 각을 세울 가능성도 없고요. 최대 계파인 하시모토의 다케시타파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할 테니까요."
"바로 그거지."
단테 패트릭이 맞장구를 쳤다.
"나중에 출세하시면 저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럴 리가 있겠나. 이번 일에 일등 공신은 내가 아니라 자네인데···."
알기는 아는군.
"말이라도 그렇게 이야기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말에 단테 패트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이번 기회에 아예 우리 지부로 오는 것은 어떤가? 내가 자네를 책임지고 키워 주겠네."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그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 사람이 누구를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하던 작전이 끝나지 않아서 곤란할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다.
단테 패트릭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언제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하게. 외부 팀이라서 좀 힘들지도 모르지만 내가 지원팀에 오래 있어서 본부에 아는 사람이 꽤 많네. 이번 일만 성공하면 어느 정도 아시아 쪽에서는 발언권도 생길 테고 말이야."
단테 패트릭이 말했다.
나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조금 힘들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다리겠네."
나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일본에서 할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으면 이제 팀에 복귀했으면 하는데요···."
"벌써 말인가?"
"예.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한창 작전 중에 온 것이라서···."
"이런 선거 결과를 보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저도 그렇습니다."
"작전하던 중이라니 어쩔 수 없지. 그럼 가보게."
단테 패트릭이 복귀를 허락했다.
말은 아쉽다느니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일이 마무리되니 이제 내가 더 굳이 필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믿고 따를만한 사람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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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홍콩으로 돌아왔다.
손에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에서 빅토리아 하버를 내려다보았다.
돈을 쓸 시간이 없다 보니 내 생활은 예전 재산이 몇십만 달러였던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단 한 가지 달라진 것이 바로 새로 산 집에서 내려다보는 빅토리아 하버의 야경이었다.
홍콩섬 중앙에 있는 산꼭대기에 있는 이른바 '더 피크'에서 내려다보는 빅토리아 하버의 야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센트럴에 있는 고층 호텔에서 보던 모습과도 높이가 다른 만큼 완전히 달랐다.
내가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벨이 울렸다.
누군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집이 몇 채 없는 더 피크의 주택가에서 나를 찾아올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항상 같이 다녔다.
바로 리안과 카이 황이었다.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리안이었다.
문을 열자 얼마 후 리안이 카이 황과 함께 들어왔다.
"언제 돌아온 거야?"
리안이 물었다.
"얼마 안 됐어. 몇 시간 정도? 이제 막 샤워하고 식사를 막 끝내고 커피 한 잔 마시던 중이었지."
"온다면 온다고 미리 말 좀 하지."
"어차피 월요일에 출근할 텐데 뭐···. 그 전에 일요일에 볼 수도 있고···."
내가 대답했다.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이 시간에 우리 집에는 왜 온 거야?"
내가 물었다.
"그냥 집에 들어가다가 거실에 불이 켜졌기에 들어와 본 거지."
덕분에 마음에 드는 집을 산 것은 좋았다.
무슨 리안과 내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이런 경우는 좀 불편했다.
그렇지 않아도 회사에서도 같이 근무하는데 집도 옆집이다 보니 출근을 같이할 때가 많았다.
그나마 퇴근할 때는 서로 밤에 술집에 가거나 파티에 참석하느라 따로 했다.
"특별히 할 말이 없으면 그만 가지? 나 거의 열흘도 넘게 출장을 갔다가 바로 돌아왔거든···."
나는 대놓고 그만 가라는 이야기를 했다.
"혹시 네가 한 거야?"
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오늘 들으니 웬 팀장이 추진하던 일본 공장 인수가 어려워졌다고 하던데···. 네가 한 거냐고?"
"했으면 어떻고, 안 했으면 어때."
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웬 지하오에 대한 일은 자민당 총재 선거 과정에 끼워 넣은 작은 조각일 뿐이었다.
"진짜 궁금해서 그런데···."
"물어봐."
"왜 그렇게 웬 팀장을 신경 쓰는 거야? 별로 중요한 인물도 아니잖아."
"왜 그래.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니! 그래도 아직 명색이 우리 상사이지 팀장이야."
나는 리안의 질문에 웃으며 말했다.
"명목상이지. 그나마도 얼마 안 남았고···. 우리 팀이 아니 정확하게 네가 움직이는 자금이 러시아에 투자한 금액을 합치면 2억 불이 넘어. 그리고 계속 늘어나는 중이고···. 예전에도 상대도 안 됐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렇고."
리안이 내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게 홍콩 부호의 자식인 너와 내가 살아온 인생의 차이겠지."
"무슨 말이야?"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는 누구에게 무시당해 본 적 없지. 너보다 잘하는 것이 없는데도 그냥 너를 무시하는 사람?"
"그야···."
리안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나는 미국에서 많이 만났어. 그리고 그런 놈들이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
"그게 뭔데?"
"가장 눈에 거슬리는 놈을 박살을 내놓는 거지."
"웬 팀장이 그렇다는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웬 지하오 그 인간은 그냥 짜증이 나는 인간일 뿐이야."
"그럼 그냥 치워버리면 되잖아. 내가 해줄까?"
리안의 질문에 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이라면 조금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나도 충분히 치워버릴 수 있어. 하지만 짜증이 나는 인간이지만 짜증 나는 인간은 그 나름의 쓸모가 있는 법이야."
"쓸모라니?"
"말하기는 그렇고 쓸모없는 사람은 없는 법이야."
웬 지하오는 지금은 정말 박살을 내야 할 인간이 나타날 때까지 내 마음속의 칼날을 예리하게 만들 도구 같은 거였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웬 지하오마저 없다면 나는 긴장을 풀고 마음이 풀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여전히 내가 CIA 요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 어떤 일이 닥칠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