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자기방어는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다.
홍콩에서 마닐라는 직항편으로 2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홍콩과 마닐라는 시차가 없다.
시차가 없어 시계를 따로 맞출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4월의 마닐라는 여전히 더웠다.
봄이 막 시작된 홍콩과는 달랐다.
매번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달라지는 날씨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마닐라 공항은 시골의 버스정류장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정도로 낙후되었다.
공항에서 리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리코가 깍듯이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네요. 4개월 만인가요?"
내가 그에게 다달이 5천 불씩 4개월 동안 준 돈이 2만 불이었다.
내게는 그리 많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필리핀의 작년 일 인당 국민소득이 1천 불이었다.
퇴직한 전직 경찰에게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무엇보다 지난 4개월 동안 리코가 한 일은 거의 없었다.
정기적으로 필리핀의 정보를 보내기는 했다.
그렇지만 필리핀은 적어도 나에게는 투자가치가 제로인 국가였다.
리코가 내 가방을 받아 옆에 있는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차를 준비해뒀습니다."
나는 리코가 준비한 차를 타고 마닐라 남쪽 고급 주택가로 향했다.
공항에도 느꼈지만, 마닐라 전체가 한산했다.
4월은 필리핀 관광 성수기인 건기의 막바지였다.
보통이라면 관광으로 공항은 물론이고 마닐라 시내가 온통 관광객이 뒤덮일 정도의 시기였다.
덕분에 비교적 정치가 안정된 태국 관광 사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2층 고급 주택이었다.
필리핀 현지 협조자인 리코가 임대한 주택이었다.
나는 호텔에서 묵는 것을 선호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숙박 기록이 남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마중은 나온 니코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입국한 여권도 차명 여권이었다.
요즘 마닐라 상황이 어수선해서 그런지 문 앞을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지키고 서 있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요즘 마닐라 상황은 어떤가요?"
"별로 좋지 않습니다. 현재 성당을 중심으로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 마닐라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차이라면···.
그때는 대통령인 에스트라다에게 물러나라는 시위였다.
이번에는 에스트라다를 지지하는 시위라는 점이다.
3개월 정도가 지났는데 같은 곳에서 시위대가 전혀 반대 주장을 하는 셈이었다.
이 시위의 시작은 아로요 정부가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체포한 것이 시작이었다.
"아로요 정부는 도대체 왜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체포한 겁니까?"
내가 물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대통령 궁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자신이 합법적인 대통령이라면서 법원에 소송도 제기하고 각종 문제를 일으켜서 문제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2주 후면 선거가 있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이렇게 선동을 하는 것을 가만두면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니코가 말했다.
"결국, 선거 때문이라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니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트라다가 쫓겨나는 것은 비자금 문제와 연이어 나오는 스캔들로 인한 지지율 추락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필리핀의 '국민 배우'라고 불릴 정도로 대중적 인기가 있었다. 더구나 배우 생활을 하면서도 꽤 오랫동안 정치를 함께한 관록 있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아로요 대통령으로서는 폭탄과 같은 인물이었다.
선거에서 반 아로요 진영을 이끌게 되면 선거에서 꽤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정부 방침은 뭡니까? 혹시 아는 것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니코는 경찰을 그만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찰에 끈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니코를 만난 계기가 바로 소매치기들과 충돌이 있고 난 이후에 그 해결을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마닐라 경찰들과 소매치기와 같은 범죄조직을 넘나들며 활약하는 일종의 '해결사'였다.
경찰 더 나아가 공무원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위치였다.
"그게 조금 곤란한 상황입니다. 아시겠지만 당시 부통령이었던 아로요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바로 1월에 있었던 '피플 파워' 덕분입니다. 지금에 와서 자신을 반대한다고 시위를 진압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로요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1월에 있었던 이른바 피플 파워 덕분이었다.
당시 아로요는 그 시위를 민주주의와 국민의 힘이라고 평가했었다.
그런데 겨우 4개월이 되지 않아 자신을 물러나라고 하는 시위를 탄압할 명분이 없는 것이다.
"자기모순 또는 딜레마네요."
"뭐 그렇죠."
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로요와 에스트라다는 필리핀에서 엘리트와 서민을 대표한다는 상징성이 있었다.
리코는 아로요나 에스트라다 둘 중 누구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리코의 경우는 확고한 신념이나 이상이 없어 보였다.
이런 경우 대부분 자신의 이익을 따르기 마련이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봐 주십시오."
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별로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잠시 말을 멈추고 리코가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왜 이런 일들을 조사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말씀하시기 곤란하시면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리코가 말했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내가 시위 상황이나 시위에 대한 정부 방침을 알아봐달라고 하는 것을 의심하는 태도였다.
아무래도 경찰 출신이다 보니 나에 대해 의심을 하는 듯했다.
"혹시 지난번 투자했을 때 마닐라 종합주가지수가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내가 물었다.
"글쎄요. 지금보다 높았던 것은 확실한데 정확하게는···."
"1665포인트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440포인트에요. 3개월간 무려 14% 이상 떨어진 셈입니다. 이놈의 정치 불안 때문에 날린 돈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나는 투자 핑계를 댔다.
물론 나는 1월에 투자해서 14% 주가가 상승했던 이후로 필리핀에 투자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리코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손해를 많이 보셨나 보네요?"
"이번 위기를 어떻게 넘기더라도 필리핀의 상황이 단기간에 나아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필리핀 주식시장에는 투자를 보류할 생각입니다."
"그렇습니까?"
리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로서는 내가 매달 주는 돈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필리핀에서 완전히 철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대신 다른 투자를 할 생각인데···."
내가 필리핀에서 완전히 철수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하자 리코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그가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을 짓자 나는 말을 멈추고 시계를 봤다.
"이런 저녁 약속을 맞추려면 지금부터 샤워하고 식사를 해야겠네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죠."
나는 말을 마치고 리코를 바라보았다.
샤워를 해야 하니 그만 나가보라는 의사표시였다.
"그럼 내일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리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가기 전 문 앞에 서 있는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필리핀에 있는 동안 수행할 운전사 겸 경호원입니다. 나름 운동을 해서 쓸만할 것입니다."
문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데릭이라고 합니다."
"샤워하는 동안 일하는 분께 식사 준비 좀 부탁해요."
나는 사내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샤워하고 나와 식사를 했다.
약속 시각이 되자 나는 데릭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마닐라 시내로 향했다.
마닐라 시내 술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다음이었다.
약속 장소였다.
나는 차에서 내려며 데릭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술집에 들어가 바텐더를 찾아갔다.
"조엘이라고··· 찾으면 알 거라던데?"
바텐더가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조엘 씨 찾아온 손님이시다. 안내해 드려."
나는 종업원을 따라 바 안으로 향했다.
바 안에 마련된 밀실에서 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명성이 자자한 에이전트 에스팀의 요원을 드디어 보게 되는군. 자네가 소문으로 듣던 팀의 얼굴마담인가 보군?"
나는 상대의 환대에 잠시 당황했다.
"아, 예···. 산티아고라고 불러주십시오."
"산티아고? 같은 요원을 만나서도 가명을 쓰는 건가?"
"죄송합니다. 팀장님이 워낙 엄하셔서···."
"뭐 어쩔 수 없지. 얼마 전 에이전트 에스팀의 보안등급이 올랐더군. 이 세계에서는 보안등급이 높은 사람이 상사지."
"그렇게까지야···."
"여기 상황은 알고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은 알아봤습니다. 친 에스트라다 성향의 시위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요?"
"뭐 꼭 그렇지도 않아. 물론 시위대 대부분은 에스트라다를 지지하는 마닐라의 빈민층이지만 시위를 이끄는 자 중에는 에스트라다 탄핵에 참여했던 자들도 꽤 있어. 시위지도부의 목표는 지난번에 에스트라다를 무너트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아로요 정권을 무너트리는 것이지."
"그렇군요."
조엘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내가 질문을 던졌다.
"본부에서 지시를 받아서 오기는 했습니다만 정확히 제가 뭘 해야 합니까?"
목표를 알아야 뭘 할지를 정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필리핀 정국의 안정이지."
"그게 가능은 한 것입니까?"
필리핀은 근본적으로 대표적으로 마르코스, 아키노, 아로요 이 삼 개 가문을 정점으로 각 지방의 유력가문들 사이에 권력이 나눠진 나라였다.
상원의원과 시장을 그런 가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가문들이 하나로 뜻을 모으거나 아니면 그 가문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필리핀의 정국 안정은 불가능했다.
"당장은 지금 점점 커지고 있는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거지. 자네도 알겠지만 얼마 전 하이난 사고 이후 본국과 중국 사이 관계가 아주 안 좋은 상황이네. 얼마 전에는 국방부에서 중국과 모든 군사협력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가 번복할 정도니 말을 할 필요가 없지. 필리핀 해군이 있으나 마나 하는 존재지만 지금처럼 정국이 불안해지면 중국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네."
조엘이 말했다.
한마디로 필리핀 정국 안정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의미였다.
하이난 사건이 일본에 이어 필리핀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필리핀 아로요 정부는 뭐라고 합니까?"
"골치 아파하지.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그러면 자신들이 집권한 명분을 잃게 되느니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
조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답답한 표정이었다.
"본국에서는 빨리 조처하라는데···. 어때 무슨 방법이 없겠나? 자네 팀이 일본에서 꽤 활약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일본에서의 일이 여기까지 알려진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만두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그냥 정보 수집 임무만 맡았는데 이제는 작전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맡긴 일을 거부할 수도 실패할 수도 없었다.
임무를 거부할 명분도 없을 뿐 아니라 실패하면 책임을 지고 실패이유를 간부들 앞에서 소명해야 한다.
에이전트 에스는 실체가 없으니 당연히 책임질 사람도 소명할 사람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맡은 일을 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간단합니다. 시위를 진압할 명분이 없다면 진압할 명분을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