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새로운 친구도 오래된 적도 믿어서는 안 된다.
"명분을 만든다···. 진압할 명분을 만든다···. 어떻게 말인가?"
조엘이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필리핀 현지에 도착해서 상황을 알아보고 여기 오기 직전까지 팀원들과 필리핀 상황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에이전트 에스팀의 다른 팀원들도 필리핀에 온 것인가?"
조엘이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같은 팀에 있기는 하지만 저도 다른 팀원분들을 직접 본 것은 몇 달 전입니다. 평소에 어디서 뭘 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냥 제가 경력도 짧고 하는 일의 중요성이 다른 요원들에 비해 떨어지다 보니 제가 움직이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이야기를 나눴다는 말인가?"
"정보화 시대 아닙니까? 저희 팀만 사용하는 비밀 대화방이 있습니다. 비밀 통신망이라서 보안도 안전하다고 하더군요."
그런 대화방이나 비밀 통신망이 있을 리 없지만 나는 조엘에게 거짓말을 했다.
내가 혼자 생각해낸 작전이라면 조엘이 그 작전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자네 팀에서는 어떻게 시위를 진압할 명분을 만들겠다는 이야기인가?"
"시위에 사람들을 투입해서 과격시위로 바꾸는 거죠."
"사람들을 말인가?"
"그렇습니다."
내 말에 한동안 말이 없던 조엘이 입을 열었다.
"여기 필리핀은 우리가 섣불리 나서기가 어려워. 필리핀 사람 중에는 반미 감정을 가진 자들이 꽤 많아."
필리핀 내에서 반미 감정은 당연하였다.
미국은 필리핀 최악의 독재자라고 불리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거의 끝까지 지지했었다.
1986년 부정선거로 세계 여론은 물론이고 미국 국내 여론까지 돌아서고 중간선거에서 불리하게 할 것 같아지자 그때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포기했다.
심지어 대통령에서 쫓겨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직접 하와이로 보낸 것도 미국이었다.
필리핀 내 많은 사람에게 미국은 곧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와 동의어였다.
이런 반미 감정 때문에 1990년 거의 19세기 초부터 있던 필리핀 내 미군기지가 필리핀 의회의 투표로 철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조엘이 인원 투입을 꺼리는 것은 그런 이유만은 아닌 듯했다.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필리핀이 좀 심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미국을 제외하고 반미 감정이 없는 나라가 어디에 있겠는가?
미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라는 영국에도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이 상당수였다.
"혹시 사람이 없는 것입니까?"
"뭐 그렇지."
조엘이 인정했다.
이러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는데···.
시위를 과격시위로 바꾸자면 그런 분위기를 유도할 사람이 필요했다.
"필리핀에 CIA 요원들은 얼마나 들어와 있습니까? 그중 현지 요원은 몇 명이고요?"
내가 물었다.
시위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면 우선 현지인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남부 유럽으로 보이는 조엘은 물론이고 당장 아시아계라는 나만 해도 시위대에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물론 조엘과 같은 요원들이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계획을 성공시키려면 아로요 현 대통령의 협조가 필요했다.
필리핀에 파견된 CIA의 요원 수는 아로요 정부에게 미국이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다는 몸짓이었다.
예전 마르코스 하야 과정에 추가 투입된 CIA 요원만 80명이었다.
그렇게 대규모 인원이 있었기 때문에 마르코스에게 믿음을 주고 그를 미국으로 망명시킬 수 있었다.
"80년대라면 모르지만 지금 필리핀은 미국과 CIA에 그렇게 중요한 나라가 아니네."
조엘이 말했다.
"결국, 요원이 얼마 안 된다는 말이군요."
"뭐···. 그렇지."
조엘이 대답했다.
그는 입가에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미국에서 필리핀의 중요성이 낮아진 데는 냉전 종식의 영향이 있었다.
과거 필리핀은 동아시아에서 베트남, 캄보디아 같은 공산권 국가를 견제하기 위한 최일선이었다.
여전히 아시아에 중국 베트남 북한과 같은 공산국가가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들 나라는 점차 경제를 개방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현재로서는 미국의 위협이 될 수 없는 국가들이었다.
여기에 클린턴 정부 시절 CIA 대규모 인력 감축과 조직 개편으로 어느 때보다 CIA는 요원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미 필리핀에 온 이상 CIA의 인력 지원이 없다고 작전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여기 필리핀의 정보기관이 국가정보조정부 (National Intelligence Coordinating Agency, NICA)던가요?"
"맞네."
"그럼 부족한 인력은 필리핀 국가정보조정부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조엘이 필리핀 국가조정부의 도움을 받자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필리핀 국가정보조정부가 그걸 할 수 있겠나? 이슬람 반군 때문에 몇 번 같이 일을 해본 적이 있는데···. 별로 믿을 수 있는 조직은 아니네."
"당연히 그걸로는 안되죠. 추가로 현재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정치인 중 일부를 매수해야 합니다. 되도록 과격파로요."
믿을 수 없는 정치인과 손을 잡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과격파?"
"예. 본래 이런 민중 집회는 매파인 과격파가 주도권을 잡는 법입니다. 그중 한두 명만 적당한 이권을 주는 조건으로 매수해서 시위를 과격시위로 바꿔야 합니다. 아로요 대통령을 하야시키자고 강하게 선동하는 것입니다."
지금 시위의 구호는 반 아로요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목표는 단순한 에스트라다 석방에서 에스트라다를 대통령으로 복귀시키자는 것까지 다양했다.
심지어 참석자 중에는 에스트라다 탄핵에 찬성했던 의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이 쉽게 넘어오겠나?"
"2주 후에 선거가 있습니다. 제가 알아보니 시위 주동자 중 상당수가 이번 선거에 출마했더군요. 그들의 진짜 목적은 진짜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아니라 본인들의 선거를 위해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국민에게 인기 있는 에스트라다를 이용하려는 것이 참가한 목적이죠. 선거나 선거가 끝난 후에 도움을 주겠다고 하면 넘어오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정치인들에게 선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는 하지."
"그렇게 아로요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면서 시위대를 대통령궁으로 이동시키면 계획은 거의 다 마무리된 셈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궁으로 말인가?"
조엘은 조금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그게 핵심입니다."
"너무 위험한 계획 아닌가? 필리핀 국민은 이미 1986년과 올 초에 비슷한 시위에서 모두 정권을 무너트렸네. 이번에도 아로요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어. 그러다가 에스트라다가 다시 돌아오면 우리로서는 최악이네."
"대통령궁으로 시위대를 이동시키는 이유는 바로 시위대가 현재 있는 에드사(EDSA)를 스스로 떠나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현재 군과 경찰은 모두 아로요 현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시위를 그냥 두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시위대가 에드사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자네 생각이군."
조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1986년과 올 초에 있었던 '피플 파워' 모두 에드사 성당과 거리가 중심이었습니다. 필리핀 민주주의의 상징이죠. 아무리 아로요 대통령이 군이나 경찰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에드사에 있는 시위대를 진압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시위대가 대통령궁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그런 상징성을 스스로 버리는 거죠. 시위대를 대통령으로 행진시키고 그 과정에서 방화나 약탈이 발생하면 시위를 진압할 명분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때는 더는 정당한 시위가 아니라 폭동이 되는 거죠. 그 후에 아로요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경찰과 군은 동원해서 해산시킬 명분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조엘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는 여전히 조금 위험한 계획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물론 우리도 폭동을 유발해서 진압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야. 하지만 섣부른 작전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져올 수도 있어. 아까 말한 대로 아로요 정권이 무너질 수도 있네. 자네도 알다시피 아로요 대통령은···."
"미국의 친구죠."
아로요 대통령의 아버지인 마스파갈 대통령은 미국에서 공부한 친미파 정치인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미국 정보기관이 개입했다는 것은 일부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건 아로요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아로요 대통령은 의원 시절 열정적으로 개혁 법안도 내놓았지만, 그녀가 낸 법안 중에는 외국 기업들을 위한 법안도 상당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광산업에 대한 법안이었다.
필리핀의 광산을 외국 기업들이 100% 소유할 수 있게 만든 법안은 미국 기업들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른바 필리핀 10대 재벌 중에서 아로요 가문과 가장 친한 가문은 바로 미국계인 라존 가문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네. 작전이 잘못되면 미국의 친구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어."
조엘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니죠."
나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말했다.
"1986년이나 올해나 정권을 무너트린 것은 정말 필리핀 국민이 말하는 것처럼 피플파워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네는 그게 아니라는 말이군."
"예. 두 번 모두 정권을 무너트린 것은 피플 파워가 아니라 미국과 필리핀의 엘리트 기득권층이죠. 어차피 미국과 필리핀의 엘리트층에 이익이 되지 않는 이번 시위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자네는 이번 시위는 어차피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는군. 그럼 굳이 요원들을 투입해서 방화나 약탈을 벌이고 시위를 주도하는 정치인을 매수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
조엘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죠. 시위가 길어지고 필리핀 정국의 혼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중국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릅니다. 제가 제안한 계획의 핵심은 최대한 빨리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작전대로라면 된다면 시위는 작전이 시작되고 곧바로 끝낼 수 있습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조엘을 바라보았다.
"내 개인적으로는 조금 위험한 방법 같기는 한데···. 가서 필리핀 정부 측과 협상을 해보겠네."
조엘은 내 시선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받아들일 거면서 빼기는···.
내 제안을 승낙한 조엘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진행 상황을 현장에서 볼 생각이 있으면 우리 쪽에서 적당한 기자 신분증을 구해줄 수 있네."
조엘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따로 건물 같은 곳에서 지켜보겠습니다."
조엘이 무슨 생각으로 물어본 것인지는 짐작이 가지만 나는 시위 현장에 가까이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조엘의 말 그대로 시위대가 몇만이었다.
하나하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번 작전은 결국에는 시위대를 군과 경찰로 진압하는 끝내는 것이었다.
나는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혹시 모르니 일이 끝날 때까지 필리핀에 머물러 있게."
"알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엘에게 덧붙였다.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서 다시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요."
돌아온 이후 나는 계속 리코에게서 시위 진행 상황을 들으며 뉴스에 집중했다.
바로 다음 날 밤.
시위대가 대통령궁으로 가는 순간 일은 순식간에 끝났다.
아로요 대통령은 시위대를 폭도라 규정하며 군과 경찰을 투입해서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시위와 진압과정에서 4명이 죽고 꽤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내가 아니어도 저런 시위에서 희생자가 나오지 않는 것은 어려웠다.
나는 마닐라를 떠나기 전에 리코를 거실로 불러서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번에 제가 한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리코의 얼굴에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 일은 어떻게 마무리됐지만 저나 회사나 필리핀의 상황이 금방 나아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리핀 주식 시장에서 한동안 발을 뺄 생각입니다."
"아, 예···."
내가 지난번에 한 말을 다시 확인시켜주자 리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본인 일 해볼 생각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리코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철수를 이야기하던 내가 갑자기 본인 일을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물으니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주식투자 대신 필리핀에 직접 투자를 해보려고 합니다."
"직접 투자요?"
"그렇습니다. 필리핀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바로 영어를 사용한다는 점과 교육수준이 높다는 점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죠."
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리핀의 최대 수출품은 바로 인력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필리핀의 젊은이들은 동남아시아는 물론이고 중동 심지어 유럽이나 미국까지 가정부나 노동자로 살길을 찾아 떠나고 있었다.
"혹시 비즈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business process outsourcing; BPO)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글쎄요?"
"필리핀 정부가 꽤 오래전부터 육성하려고 하는 분야입니다. 쉽게 말해서 필리핀의 경우는 콜센터죠. 미국이나 유럽 기업들의 콜센터를 필리핀에 두고 운영하는 것입니다."
"콜센터라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마닐라에도 여러 곳이 있기는 하죠."
비즈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는 아웃소싱의 일종으로 기업들이 비용 절감 차원에서 기업 내에서 처리하던 총무나 인사 경리 고객 서비스 같은 분야를 외부 기업에 맡기는 것을 말한다.
그중에는 고객과 상대하는 콜센터도 포함된다.
콜센터는 어차피 단순 업무에 가까우므로 미국이나 유럽의 기업들이 굳이 비싼 임금을 주고 현지 인력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미국과 유럽의 기업들이 가장 선호하는 나라가 바로 국민 다수가 영어에 익숙한 인도와 필리핀이었다.
필리핀의 경우 대학졸업자를 싼 임금으로 부릴 수 있었다.
"그 콜센터를 해보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제가요?"
리코가 되물었다.
"제가 리코 씨를 알게 된 지 얼마 않았지만, 꽤 유능하신 분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특히 사람이나 조직 사이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능숙하다고 들었습니다. 어차피 콜센터라는 것이 결국에는 사람을 관리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리코 씨가 잘하는 분야죠. 만약 하실 마음이 있다면 저와 회사가 투자하겠습니다."
"···."
리코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하는 일은 바로 그만둘 수 있는 성격의 일도 아니었고 자기 일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생각하실 시간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만약 하실 결심이 서시면 홍콩으로 연락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나는 리코가 연락할 것으로 생각했다.
지난번에도 처음에는 돈을 거절했지만 결국에는 돈을 계속 받으며 나에게 정보를 전해주었다.
내가 리코에게 투자를 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물론 콜센터가 필리핀에서 전망 있는 사업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CIA에서 받는 지시가 점점 내가 혼자서 하기에는 버거웠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안정적으로 사람들 동원해야 할 필요가 생길 것 예감이 들었다.
현재 나와 리코와의 사이는 돈으로 엮인 얄팍한 살얼음과 같은 관계였다.
좀 더 안정적인 관계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