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미래는 지금껏 보아온 것과는 분명 다르다.
'최선을 기대하라, 하지만 최악을 대비하라.'
좋은 말이었다.
가능할 때는 말이다.
이 결심을 실행할 여유도 없이 나는 내게 위기가 닥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쩌민 중국 주석이 홍콩을 방문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장쩌민 주석은 1997년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할 때도 홍콩을 방문했었다.
일주년이 되는 1998년에도 방문했다.
그래서 이번 방문도 그런 연례 방문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단순히 그런 방문이 아니었다.
바로 다음 주에 홍콩에서 Fortune Global Forum이 열리고 장쩌민 주석도 그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Fortune Global Forum이 홍콩에서 열리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WTO 가입이었다.
Arthur Andersen, Applied Materials; Bank of China; EDS; Goldman, Sachs & Co; Nortel Networks and SAS, British Telecommunications PLC (BT), Dell Computer Corporation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도 참석하는 큰 행사였다.
올해 중국의 WTO 가입을 위해 중국 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대규모 국제회의였다.
심지어 류오린에서도 꽤 많은 사람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나도 당연히 참석할 생각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정말 포럼에 참석하지 않을 거야?"
리안이 물었다.
"나는 그런 자리는 좀 불편해서···."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생각 없이 참석했다가는 큰일이 날뻔했네.'
3일간 계속되는 회의 일정을 보던 나는 참석자 중 한 명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절대 이 회의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참석자 중에는 기업인만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이름도 있었다.
예를 들어 태국의 총리인 탁신이라던가 하는 현역정치인도 있었지만, 전직 국가원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바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클린턴 전 대통령이었다.
얼마 전 퇴임한 바로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다.
나는 그를 실제로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워싱턴에서 CIA 정보분석 요원으로 일하던 시절 현역 대통령이었다.
심지어 나는 클린턴 대통령이 있던 백악관에서 매일 보고되던 일일 정보브리핑에도 참석한 적이 있었다.
물론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내 이름이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은 작았다.
하지만 미국의 전직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비밀경호국의 경호를 받는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경호원 중에는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참석할 때는 그냥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괜히 포럼에 참석했다가 사진이라도 찍혀서 조사가 들어갈 수도 있었다.
비밀경호국은 CIA 직원이었던 내가 왜 홍콩에 있는지 조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CIA가 내가 여기에 왜 있고 여기에서 뭘 하는지를 알아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CIA를 그만두려는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어지간하면 참석하지 그래? 회사에 투자하신 어르신들이 이번에 너를 만날 수 있다고 기대하고 계셔."
리안이 다시 한번 권했다.
러시아에 투자하고 있는 회사 투자자들은 나도 이번에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리안의 지인인 투자자들은 홍콩에서 가장 큰 부자들은 아닐지는 모르지만 큰 영향력이 있는 부호들이었다.
그들의 영향력은 단순히 홍콩뿐 아니라 중국 본토는 물론이고 동남아에 걸쳐 있었다.
알아두면 내게 많은 도움이 될 사람들이었다.
"죄송하다고 네가 전해드려. 나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이야."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알았어.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지."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열리는 동안 집에 머물렀다.
나는 출근도 하지 않았다.
내가 회사에 출근도 하지 않자 저녁에 리안이 찾아왔다.
"뭐 하느라고 집에만 있는 거야?"
"외국에서 사람들이 많이 와서 북적거리기는 하는데 경찰들이 쫙 깔려서 분위기는 또 살벌하잖아."
지금 홍콩 시내에는 무려 만 명이 넘는 경찰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현직 중국의 국가주석과 몇 달 전까지 미국의 대통령이 참석하는 회의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다는 뉴스를 보고 놀랐던 나로서는 아직 홍콩 경찰을 보는 것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 온 비밀경호국 사람들을 만날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미국에서 나를 알던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다.
이번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당연히 대학 때 나를 알던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홍콩에 있는 이유를 뭐라고 할지 난감했다.
리안이 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간 쓸데없는 걱정은···. 그럼 요 며칠 집에서 뭐 하고 있었어?"
리안이 물었다.
"다음 주 투자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 그리고 그 이후의 장기적인 계획도 생각하고 있었어. 언제까지 지금처럼 운이 좋을지 모르잖아. 며칠간 집에서 지내면서 생각해보면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지금까지는 운이 좋은 편이었더라고···."
"운이라고? 얼마나 운이 좋아야 너처럼 돈을 벌 수 있는데···?"
리안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단기간에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시장이 극도로 불안했기 때문이잖아."
"그 기간이 다른 투자자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겠지. 그런데 너는 돈을 벌었잖아."
"그게 운이지. 특히 나스닥이 급등락을 반복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선물과 옵션을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정도의 돈을 벌지는 못했을 거야. 하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운이 좋다는 보장이 없잖아."
내가 말했다.
투자 종목을 선택하고 주가 흐름을 예상한 것이 전부 운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흐름을 예상한다고 해서 항상 이런 대박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별 기업의 주가와는 다르게 주가지수는 보통은 한 주에 1%나 2% 정도 오르거나 내리면 큰 변화였다.
리안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나는 작년 정도의 나스닥 대폭락은 모르지만, 올해 정도는 내년까지는 계속될 것 같은데?"
"글쎄···. 미국의 야구 선수 중에 요기 베라라는 선수가 있어. 요기 베라의 명언 중에 '미래는 지금껏 보아온 것과는 분명 다르다.'라는 말이 있지. 미래는 과거처럼 희망적이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하더군."
내 말에 리안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요기 베라를 모를 것 같아. 내가 한때 홍콩 야구대표팀 선수까지 하고 요기 베라 자서전까지 읽은 사람이야."
"그래? 몰랐네. 언제 같이 야구나 한 게임 할까?"
"너도 야구를 했었어?"
"왜 이래. 내가 고등학교 때 야구와 풋볼 모두 주 대표까지 뽑힌 적이 있어."
내가 야구로 주 대표까지 했다는 말에 리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리안이 잠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까 한 말을 뭐로 들었어. 한때라고 했잖아, 한때···. 야구공이나 배트 잡아본 지가 언제인지?"
나는 리안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한때라고 하기에는 지금도 나이가 많지 않은 것 아니야?"
미국과 홍콩의 야구 수준차는 컸다.
리안이 홍콩의 야구대표팀이었다고 해봐야 미국의 중학교 수준도 안 될 것이다.
"내가 한가지 진실을 이야기해주자면···."
리안이 말을 돌렸다.
"요기 베라는 자신이 자서전에서 조금 전 네가 한 말에···. 그거 본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더군."
"그래? 뭐 그럼 그런가 보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실제로 하지 않았는데도 유명인이 했다고 알려진 말은 많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내 상황에서는 적어도 수익률에 관한 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요기 베라가 그런 말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 몇 달간의 급등락은 닷컴버블이 붕괴하고 그 붕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생긴 예외적인 일이라는 거야. 내 생각에 이런 급등락은 빨라야 10년에 한 번 오는 일이었어. 뭐···. 10년 후쯤에 또 이런 급등락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없을 테고 말이야."
"그래서 이런 급등락이 끝난 이후를 걱정하고 계셨다?"
내 말을 듣던 리안이 되물었다.
"바로 그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보던 리안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에드릭, 네가 그런 미래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그건 무슨 말이야?"
내가 물었다.
리안의 태도에서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 회의에 웬 지하오 팀장이 참석한 것은 알고 있지."
"알지. 요즘 웬 지하오 팀장이 기분이 들떠서 돌아다녔잖아."
웬 지하오는 상하이방 소속이고, 상하이방의 중심은 장쩌민 주석이었다.
이번 회의에도 상하이방 소속 거물들이 대거 참여했다.
"오늘 보니 새로운 후원자를 구한 것 같더라고···. 상하이방 소속 기업인인 것 같은 데 차우 칭낭가이(Chau Ching Ngai)라는 자야. 뉴 낭카이 글로벌 인베스트먼트(New Nongkai Global Investments)라는 곳의 대표라고 하더군. 제대로 된 후원자를 구했으면 웬 팀장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걸? 투자를 방해하지는 않겠지만 이런저런 괴롭힘은 있을 거야."
리안이 말했다.
"차우 칭낭가이?"
이상한 이름이었다.
"유명한 사람이야?"
내가 물었다.
"그게 문제야···. 분명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상하이방 쪽 거물들과 꽤 친한 것 같더라는 말이지. 어디서 분명 본 얼굴이고 차우 칭낭가이라는 이름도 가명인 것 같은데···. 누군지를 모르겠다는 말이야."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도 모르겠다고?"
리안이 비록 상하이방과의 알력으로 몸을 숨기고는 있지만, 홍콩 내에서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었다.
홍콩에서 활동하는 기업인에 대해서 누군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장쩌민 주석도 참여하고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도 참여하는 회의라서 보안이 보통 철저해야지. 차우 칭낭가이라는 자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것도 같고 말이야. 일단 아저씨에게 알아봐 달라고는 했으니 곧 알아내기는 할 거야."
"그렇다는 말이지···. 잠시만···."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상하이로 전화를 걸었다.
중국 최고 법률회사인 다청 소속일 뿐 아니라 상하이에서 일하면서 홍콩 사정에도 밝은 사람···.
내가 전화를 건 사람은 다청의 임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