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78화 (79/270)

서몽

# 돼지는 어디에 있어도 돼지일 뿐이다.

내가 인도네시아 CIA 요원을 만난 것은 이번에도 술집이었다.

"이반 부카드(Ivan Burkhard)라고 하네."

30대 중반의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상대는 키가 큰 거구의 백인 사내였다.

정보요원이라기보다는 전투 요원에 더 어울리는 체격이었다.

"여기서는 수이진(Shu Yijun) 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이반 부카드가 내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중국계인가?"

"본명은 아닙니다. 인도네시아에 입국할 때 쓴 여권 이름이죠. 그리고 설사 본명이라고 해도 이반 부카드 요원처럼 어디 출신인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내 말에 이반 부카드가 당황했다.

"미안하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곳 인도네시아에서 중국계 화교는 지위가 독특해서 말이야. 불쾌했다면 미안하네."

"아닙니다. 악의로 하신 말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말했다.

첫 대화치고는 성공적이었다.

대화의 주도권도 가져왔다.

무엇보다 상대에게 내가 중국계여서 과민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에이전트 에스팀을 위해서 현장에서 움직이는 요원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자네인가?

"현장에서 움직이는 요원이 아니라 팀의 다른 요원분들은 신분 노출을 극도로 조심하셔서 가장 나이가 어린 제가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저도 현장 요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맞군. 팀이나 자네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최근 여러 곳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특히 일본에서 말이야. 자네는 회사 그만두고 난 후에도 선거 전략가로 나서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겠어."

"저는 다른 팀원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메신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낸 것은 제가 아니라 일본 CIA 지부의 요원분들이고요."

"내가 들은 것과는 좀 다른데···. 뭐, 나야 그게 누구 계획이든 중요하지 않지만···.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것이 자네라는 것이 중요하지. 여기 인도네시아에서도 솜씨 좀 발휘해줬으면 좋겠어."

"지시를 받기는 했는데 여기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내가 곧바로 일에 관해 물었다.

상대는 사소한 잡담을 하는 것 같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이런 사소한 대화를 하면서 상대를 관찰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통해 상대를 파악하는 일은 요원의 교육 중 하나였다.

교육받았다고 다 제대로 해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반 부카드라는 사람이 그중 하나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사적인 대화는 피하고 되도록 일 이야기만 하는 것이 좋았다.

"일이라고 해봐야 뻔하지. 첫 번째 목표는 와히드 대통령을 밀어내는 거야. 그런데 작년부터 각종 흔들리면서도 안 넘어간다는 말이야."

와히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는 것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일부였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목표는 간단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촉발된 동아시아의 반미감정을 누르고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특히 2001년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직후에 발생한 하이난 사건으로 중국 견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목표는 CIA 아시아지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인도네시아의 와히드 대통령은 미국이 보기에 점점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2001년 초부터 와히드 대통령은 흔들리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화교를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중국의 춘절을 공식적인 휴일로 인정하고 지금까지 인도네시아에 금지되었던 중국 문화 상품의 수입을 허가하기도 했다.

"와히드 대통령은 대중적인 인기만 있던 필리핀의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과는 다르니까요."

"그렇기는 하지."

같은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에스트라다와 와히드는 그 위치가 달랐다.

"와히드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오래전부터 Nahdlatul Ulama(NU)의 지도자가 아닌가. NU는 단일 조직으로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 단체네. 조직원은 적게는 삼천만에서 많게는 육천만 정도라고 하더군. 현재 인도네시아의 인구가 이억 명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와히드는 적게는 인도네시아인 15%에서 많게는 30%의 지도자라는 의미지."

NU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다 와히드를 무작정 추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다른 종교 단체처럼 NU도 일반 정당보다 조직력이 강했다.

조직의 지도자인 와히드에 대해서도 강한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와히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하면 대안은 있는 것입니까? 와히드 대통령이 물러나면 지금으로서는 메가와티 부통령이 대통령이 될 것이 확실한데···. 와히드보다 미국에 그리 우호적이라고 보기 어려운데요?"

현재 부통령인 메가와티는 인도네시아의 국부라고 할 수 있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딸이었다.

그리고 수카로노 대통령의 딸이라는 것이 그녀의 최대 정치적 자산이었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바로 CIA가 수하르토의 쿠데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제거한 인물이었다.

각종 논란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의 마르코스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지원으로 정권을 유지했다.

아마 소련이 붕괴하고 냉전이 종식되지 않았다면 수하르토는 여전히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직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는 외환위기 당시 미국이 등을 돌리자 곧바로 정권을 잃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메가와티 부통령에 대해서 잘 몰라서 하는 말이네."

"메가와티 부통령에 대해서 특별한 비밀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메가와티는 십수 년 전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인도네시아 정계의 거물이었다.

아마 지난 대선에서 여당이었던 수하르토의 골카당이 와히드를 지지하지 않았다면 대통령이 되는 것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지금도 인도네시아 의회 최대 정당을 장악하고 있었다.

"메가와티는 수카르노의 딸이지. 그게 최대 정치적 자산이고···. 하지만 그게 전부야."

"그게 전부라니요?"

내가 물었다.

"메가와티 부통령은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독선적인 인물이고 능력도 언변도 그리 뛰어나지 않아."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런 인물이 어떻게 그 오랫동안 수하르토 대통령의 정적이···."

수하르토 대통령은 메가와티가 의원에 당선된 이후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서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했다.

수하르토가 독재자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랜 세월 독재자의 정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부인 수카르노 대통령의 딸이니까. 그리 길게 말하지 않아도 권위가 있지. 어떤 점에서는 와히드 대통령과 비슷한 점이 있지. 와히드 대통령이 자신의 집안이 만든 NU의 지도자가 된 것처럼 메가와티 부통령도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럼 현재 보여주는 모습은?"

"위장이지. 메가와티는 좋게 말하면 애국심이 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인도네시아를 아버지가 만든 집안의 재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군. 수하르토에게 빼앗겼던 인도네시아를 자신이 되찾아야 한다는 목표 때문에 지금이야 성격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지만 글쎄···. 대통령이 된 후에도 지금처럼 대중 친화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 본부의 판단이네. 대통령이 된다고 미국에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거야. 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공산국가와의 인맥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과는 또 가깝다고 보기 어렵고 말이야."

한마디로 무능하고 독선적이라서 대통령이 되더라도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인도네시아로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미국으로서는 최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이 무능한 것이 나쁠 것이 없었다.

"어떻게 와히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방법이 없겠나?"

이반 부카드의 질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약간 과격한 방법이어도 됩니까?"

"과격한 방법? 희생자가 많으면 곤란해.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네. 수하르토가 1998년 벌인 화교에 대한 약탈 때 우리도 관여됐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건 절대 아니야."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는 화교를 상대로 한 대규모 약탈이 발생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촉발된 경제위기로 벌어진 반정부시위가 화교에 대한 약탈로 바뀐 데는 당시 수하르토의 배후조종이 있었다.

1965년 반공산주의 반화교 탄압으로 집권한 수하르토의 기획이었다.

그렇지만 1998년은 1965년이 아니었다.

미국은 외면했고 국제사회의 비난만 받은 무리수였다.

오히려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화교가 대거 싱가포르로 빠져나가면서 인도네시아의 경제 상황만 나빠졌을 뿐이다.

"그것보다는 조금 온건한 방법을 쓸 생각입니다. 중국에는 오래전에 분서갱유라는 사건이 있었죠. 그걸 이용한 작전입니다."

"분서갱유?"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부패보다는 치안 불안이 사람들에게 더 와 닿는 법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돼지를 이용해 볼까 합니다."

"돼지?"

"예, 돼지는 고향을 떠나도 돼지일 뿐이죠."

***

다음 날 저녘.

유리코 구테레즈(Eurico Guterres)는 바람 소리에 침대에서 눈을 떴다.

침대에서 일어나 보니 방 창문이 열려 있었다.

일어나 방 창문을 닫던 구테레즈는 방 안에 자신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

소리를 치려던 구테레즈는 명치에 강한 충격을 받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상대는 결코 작은 체격이 아닌 구테레즈를 번쩍 들어 침대 끝에 앉혔다.

그리고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침대 앞에 놓고 앉았다.

구테레즈의 눈에 상대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는 것이 들어왔다.

벌컥 겁이 났다.

구테레즈의 머릿속에 자신이 한 짓이 떠올랐다.

자신이 동티모르에서 벌였던 학살과 약탈 같은 일들이었다.

구테레즈는 얼마 전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한 동티모르에서 민병대를 이끌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지시를 받고 동티모르 독립을 막기 위해 무자비한 살인과 폭력을 행사했다.

지금은 그때 일로 가택연금을 받는 상태였다.

그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은 그가 죽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았다.

"복수···."

큰소리를 치려던 순간 목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이런 죄송하네요. 소리가 나면 곤란해서···."

상대의 입에서 담담한 말이 흘러나왔다.

영어였다.

"혹시 경호원들을 부르려고 소리치려는 것이면 소용없습니다. 지금 다 잠들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만약 누가 온다면 저는 방아쇠를 당길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의 목소리에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복수하러 온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로···."

구테레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을 좀 맡기려고요."

"일이요?"

구테레즈가 되물었다.

"반공산주의 연맹(Anti-communist alliance, AKA)의 의장인 구테레즈 씨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요."

AKA는 구테레즈가 얼마 전 인도네시아의 30개의 우익단체와 이슬람 단체를 모아 만든 단체였다.

수하르토가 몰락하고 동티모르가 독립한 이후 목표가 사라진 구테레즈가 만든 조직이었지만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사실 유명무실한 단체라고 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었다.

한때 인도네시아의 공산당은 당원 수만 300만 명으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당원이 많은 정당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당원 300만 명 중에서 100만 명 정도를 학살한 사람이 바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었다.

당연히 그 배후에는 CIA의 지시와 방조가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구테레즈가 반공산주의 연맹을 조직한 이유는 최근 와히드 대통령이 공산주의에 대한 금지령을 철폐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인도네시아에 공산당은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공산당은 한때 인도네시아 최대 정당이었다.

지금도 그때 공산당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신과 가까웠던 골카당이 내세우는 이념이 여전히 반공산주의였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호소의 일종이었다.

"그런 일이면 낮에 찾아와야지 밤에···."

구테르즈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밤에 찾아오면 밤에 찾아올 이유가 있었겠죠. 안 그렇습니까?"

상대의 말투에서는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

구테레즈가 뭐라 대꾸할 말을 하지 못하는 사이 상대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오늘 방문한 이유는 AKA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요."

"할 일이라니요?"

"요즘 자카르타 서점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불온서적이 많이 팔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AKA가 그런 일을 막아야죠. 그런 책은 모아서 불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산주의 서적이요?"

"꼭 공산주의 관련 서적이 아니라도 상관없죠. 그런 명분으로 서적을 태운다는 행동이 중요한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죠."

상대의 말에 구테레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구테레즈는 동티모르인이었다.

동티모르는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한 상태였다.

하지만 당연히 구테레즈는 동티모르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근거지를 잃고 인도네시아에 있는 이상 뭔가를 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줄 필요가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동티모르에서처럼 살인과 약탈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상대가 제안하는 공산주의 서적을 불태우는 일은 명분과 실리 모두 괜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을 동원하려면 자금이···."

구테레즈가 사내를 보며 말했다.

구테레즈가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냥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약탈이라면 모르지만, 단순히 책을 불태우는 것은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대가가 있죠. 첫 번째는 여기서 구테레즈 씨를 살려주는 것이고···. 다음은 앞으로 있을 재판에서 적당한 사면···. 마지막으로···."

말을 하던 사내가 무언가를 꺼내 자신을 향해 던졌다.

순간적으로 놀라 구테레즈는 몸을 피하려는 순간 뒷덜미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충격에 구테레즈는 그대로 침대로 쓰러졌다.

구테레즈가 깨어난 것은 아침이었다.

순간 어젯밤 일이 꿈이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맡에는 미국 백 달러 뭉치가 어제 일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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