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항상 최고의 상태를 유지하라.
자카르타 CIA 안가.
이반 부카드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복면을 괴한들이 서점에 침입해 책을 태우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숨겼지만, 그들은 구호와 피켓을 통해 자신들이 AKA, 즉 반공산주의 동맹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었다.
경찰의 진압은 소극적이었다.
AKA는 반공산주의를 내세운 극우단체들의 모임이었다.
그 단체들 대부분이 경찰들과는 사실상 협조하는 사이였다.
서점 전체를 태우는 것도 아니고 책 일부만 꺼내 태우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도 그리 크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뗀 이반 부카드가 부하직원에게 고개를 돌렸다.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큰 피해는 없습니다. 다만 오랜 세월 공산주의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태울 책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오랜 세월 공산주의에 언급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와히드 대통령이 공산주의에 대한 논의를 허용했다고 하더라도 관련 서적이 많을 리 없었다.
인도네시아에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 그러면 저기서 불타는 서적들은 뭔가?"
"불타는 책 대부분은 공산주의 비판 서적이나 유명 소설들 심지어 미국 책을 번역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같은 베스트셀러들입니다."
부하직원이 대답했다.
"그렇기도 하겠군. 얼마나 계속될 것 같은가?"
"이미 소문을 들은 서점 주인들은 이미 책방에 있는 책들을 서가에서 치우는 중이라서 책을 태우는 일 자체는 금방 끝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시위대 중 일부가 군소좌파 정당 정치인들의 집과 사무실을 향해 가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부하의 말에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나선 이상 불태울 책이 없다고 그냥 끝낼 리가 없지. 이미 계획에 있었던 일이야."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얼마 전부터 국회 내 최대 의석수를 가진 정당을 이끄는 메가와티 부통령이 사실상 와히드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있었다.
와히드 대통령이 권한을 일정 부분 메가와티 부통령에게 일임하고 일선에서 물러나는 제안을 거절한 이후였다.
이런 상황에서 와히드 대통령은 탄핵을 피하고자 군소좌파정당과 손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공산주의를 허용한 것은 중국도 중국이지만 바로 이런 개혁성향의 좌파정당들을 끌어들이려는 조치였다.
부하직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카르타 서점 일부만 피해를 봤을 뿐 사실상 아무런 성과가 없는 일 아닙니까? 와히드 대통령이 대놓고 좌파정당과 손을 잡는 것은 어려워졌을지도 모르지만···. 저러면 군소좌파정당들이 와히드 대통령의 편을 들 가능성이 오히려 커진 것 아닙니까?"
이반 부카드가 부하직원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게 와히드 대통령의 공산주의 허용을 막고 좌파정당들과 손을 잡는 것을 막기 위한 일로 보이나?"
부하직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닙니까?"
부하직원이 물었다.
"인도네시아에 공산주의를 허용한다고 지금에 와서 공산주의가 무슨 힘을 쓰겠나? 이미 소련도 망하고 냉전이 종식된 것이 언제인데? 그리고 군소좌파정당 따위 모여봐야 와히드 대통령 집안 탄핵을 막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나?"
"그렇기는 하죠. 그럼 이번 계획의 목표는 뭔지···?"
부하직원을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반 부카드가 입을 열었다.
"머리는 장식품이 아니야. 사람의 머리도 계속 써야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법이네."
"죄송합니다."
부하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부하직원은 에이전트 에스팀의 요원과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는 나이였다.
이런 계획은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계획이 실행되면 그 영향은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자네 각종 부패혐의에도 와히드 대통령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야 와히드 대통령이 NU의 지도자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NU가 그렇게 강력한 조직이라면 진작에 수하르토 정권을 무너트리고 와히드 대통령이 정권을 장악했겠지."
NU는 1920년대 초에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80년간 와히드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정치에 이렇다 할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아···."
"와히드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물론 NU도 NU지만 수하르토가 이끌었던 골카당이 와히드가 물러나고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네. 와히드에 씌워진 부패혐의라고 해봐야 골카당이 보기에는 애들 장난이지."
와히드가 받는 횡령이나 회계 부정은 적게는 몇백만 불에서 몇천만 불 수준이었다.
수하르토는 집권하는 동안 적게는 200억 불에서 300억을 횡령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당연히 골카당 의원들 상당수는 와히드의 부정부패는 대통령에서 물러날 정도의 큰 죄로 느끼지 않았다.
이건 일부 와히드 지지자와 인도네시아 국민도 마찬가지였다.
부패에 무감각해진 것이다.
더욱이 와히드가 물러나면 다음 대통령은 오랜 세월 수하르토의 정적이었던 수카르노의 딸 메가와티가 될 가능성이 100%였다.
지난 대선에서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골카당은 와히드를 지원했다.
"공산주의를 허용한 것은 사실 큰 문제는 아니야. 이미 공산주의의 생명은 끝난 셈이니까. 그렇지만 수하르토는 공산당을 학살하면서 정권을 잡아서 독재자가 된 인물이야. 지금도 골카당이 내세우는 가장 큰 목표는 반공산주의지."
"하지만 와히드 대통령이 공산주의를 허용한다고 발표한 이후에도 골카당은 큰 반발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공산주의를 허용해봐야 별 의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머릿속으로만 받아들일 때와 지금은 다르지. 사람들은 보고 경험하지 않으면 정부가 어떤 정책을 발표해도 느끼지 못하네. 서점에서 공산주의 관련 서적을 불태우는 것은 그런 정책을 눈으로 보여주는 것이지. 더 나아가 공산주의에 싫어하는 것은 단지 골카당 뿐이 아니거든···. 바로 와히드 대통령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NU 지도자들 상당수가 공산주의라면 치를 떨지. 그들 대부분은 젊은 시절 수하르토와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원을 학살하는데 가담한 사람들이거든···."
"그러면 오히려 가해자들 아닙니까? 오히려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은 말이야. 나이가 들면 자신의 과거 행동을 정당화하게 마련이네. 공산당 학살에 가담한 일을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공산당은 당연히 학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거든···."
이반 부카드의 말에 부하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님 말대로라면 이번 일로 와히드가 크게 흔들리겠네요."
"크게 흔들린다고? 그 정도가 아니야. 이건 게임의 규칙을 바꾼 거야. 이전에 와히드 대통령에 둘러싼 세력이 메가와티의 수카르노 세력과 와히드와 골카당의 연합세력이었다면···. 그리고 이전 프레임이 부패와 반부패였다면 이제는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로 프레임이 변화된 거야. 무엇보다 그곳에는 와히드를 도와줄 사람이 없지. 와히드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지."
골카당은 그 태생부터 반공을 이념으로 내세운 정당이었다.
이제 와서 와히드 편을 들면 그렇지 않아도 정권을 잃은 이후에 흔들리는 지지층이 등을 돌릴 가능성이 컸다.
골카당으로서는 싫어도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두고 봐야 할 상황이었다.
예전에 공산주의에 동정적인 세력은 와히드보다는 차라리 메가와티였다.
메가와티는 실제로 아버지 수카르노 대통령 때부터 인연이 있는 공산주의 국가들과 인맥이 있었다.
이런 성향을 생각하면 이념 프레임 전쟁으로 들어갔을 때 와히드 대통령을 도와야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와히드가 물러나면 대통령이 될 사람은 메가와티 본인이었다.
직접 와히드를 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알아서 와히드를 제거해준다는데 그걸 왜 막겠는가?
무엇보다 메가와티는 대선에서 와히드에 자신의 대통령직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에이전트 에스팀이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단했다.
단지 책을 태우는 것만으로 인도네시아 정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무엇보다 자카르타에 온 지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한 일이었다.
"구테레즈의 집에 직접 들어갔다고?"
이반 부카드가 부하직원에게 물었다.
"수이진이라는 자 말입니까? 예! 단숨에 담을 뛰어넘더군요. 안에 있는 경호원 2명을 제압하고 구테레즈와 직접 대화를 나눈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변에 있던 경찰력을 잠시 철수시켰지만 대단한 실력입니다. 에이전트 에스팀 막내라는데 도대체 그 팀에는 어떤 괴물들이 있는 것인지···?"
말을 하면서 부하직원이 혀를 내둘렀다.
"나는 그 자가 팀의 막내라는 말을 믿지 않네. 무슨 정보조직이 나이순으로 줄 세우는 곳도 아니고 그런 실력을 갖춘 자가 막내일 리가 없지."
"그럼···?"
"나이는 어릴지 모르지만, 팀의 정예요원이겠지. 단지 팀의 막내라서 직접 움직인다고 하기에는 너무 말이나 행동이 거침이 없거든···."
부하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겠죠. 사실 저보다 어려 보이는 요원의 활약을 보고 조금 자괴감이 들었었거든요."
"실제로는 자네보다 어리지 않을지도 몰라. 우리와 만났을 때 변장을 한 것처럼 보였고 무엇보다 아시아계는 본래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경우가 많지 않나."
"그렇겠죠?"
이반 부카드의 눈에 부하직원이 안도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하긴 자기보다 어린 요원이 이런 큰 작전을 계획하고 직접 실행까지 하는 모습을 봤으니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CIA 지부 중에서는 변방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전 요원이라는 것 자체가 전 세계 정보요원 중 손에 꼽히는 엘리트라는 의미였다.
"싱가포르로 출국했다고?"
"예."
"그 후 행적은?"
"싱가포르 공항에 사람을 대기시키기는 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은 확인했지만 공항에서 놓쳤다고 합니다. 명령대로 그 이상의 추적은 하지 않았습니다."
부하직원이 대답했다.
"그 이상 추격하면 싱가포르 정보당국도 이상하게 생각할 테고···. 자칫 상대도 눈치챌 수가 있네. 당장 와히드가 물러날 때까지는 계속 협조해야 하는데 감정이 상하면 안 되지."
"그래서 중지시켰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에이전트 에스팀 대단하네요. 정보력도 있고 팀원들 실력도 대단하고 구테레즈에게 돈을 준 것으로 봐서는 팀 자금도 꽤 풍족한 것으로 보이고요···."
부하직원의 말에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 부카드는 잠시 자신의 부하직원과 에이전트 에스팀에서 왔다는 수이진이라는 비교해보았다.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자신의 밑에 그런 부하가 있었다면 진작에 인도네시아를 벗어나 유럽이나 미국본부로 영전했을 것이다.
"예산이라···. 그게 이상하다는 말이야. 에이전트 에스팀이 존재하는 것은 맞는데···. 도대체 본부에서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는 말이야. 일단 조직이 있으면 예산이 지원돼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다고 하더군."
"그렇습니까?"
"그래."
어떤 조직이든 그게 정보조직이라도 국가의 조직은 예산 없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에이전트 에스팀은 그런 예산을 배정받은 흔적이 없었다.
"자체적으로 돈을 벌고 있는 것 아닐까요? 무기 밀매나···. 마약 밀매 같은 것으로요."
CIA가 무기 밀매나 마약 밀매에 관여해서 돈을 버는 일은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다.
특히 아프리카나 남미 지부 중에는 그런 일을 벌이다가 대대적인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게 이상하다는 말이야. 물론 아시아에도 그렇게 돈을 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일을 하는 새로운 조직이 나타나면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거든···. 그런데 없어."
무기 밀매나 마약 밀매만큼 영역 싸움이 치열한 곳이 없었다.
소문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에스(S)가 Secret의 약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부하직원이 말했다.
이반 부카드는 부하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