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거짓말쟁이는 도둑보다 나쁘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나는 한 법률회사에 들러 회사와 계좌를 꽤 여러 개 만들었다.
내가 자카르타에서 싱가포르로 온 이유 중에는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바로 조세회피처로 유명한 싱가포르에서 회사와 계좌를 만드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물론 이미 여러 개의 비슷한 목적의 회사와 계좌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이익을 숨기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특히 내년에 류오린을 나가게 되면 류오린이라는 방패를 잃게 된다.
그때를 대비해야 했다.
일을 처리하고 나는 다시 다른 여권을 이용해서 홍콩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돌아왔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일 년 남짓 머문 홍콩이 집처럼 편안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카이 황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팀장님. 홍콩에 돌아오신 겁니까?
카이 황은 내가 갑자기 어디 갔다 왔는지 묻지 않았다.
돌아왔는지만 물었다.
내가 리안이 아니라 카이 황에게 전화를 건 이유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예,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오늘 퇴근하고 리안과 함께 집에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을 모시고 찾아뵙겠습니다.
리안과 카이 황이 내 집에 온 것은 저녁 6시쯤이었다.
주식시장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온 듯했다.
"어서 와. 집사님도 어서 오세요."
리안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야, 너! 갑자기 갈 곳이 있다는 말만 하고 사라지면 어쩌자는 거야! 팀을 분리하면서 생기는 일은 누가 다 처리하라고···."
나는 리안의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부팀장?"
부팀장이라는 말에 리안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팀에는 아직 부팀장이라는 직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그 부팀장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부팀장? 이제 대놓고 나를 부팀장에 앉히고 부려먹겠다는 거야?"
"이제 팀이 독립도 했으니 부팀장도 있어야지. 그리고 우리 팀에서 부팀장을 맡을 사람은 너뿐이고 말이야. 왜? 브레이크가 부팀장을 했으면 좋겠어?"
"그건 아니지만···."
잠시 말을 멈췄던 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팀에 나하고 브레이크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 여기 카이 아저씨도 있잖아. 나이로 보나 팀 내 경력으로 보나 내가 아니면 브레이크보다는 여기 카이 아저씨가 해야지."
경력을 이야기하지만, 카이 황이나 브레이크나 팀에 있었던 시간은 별 차이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팀 자체가 분리된 지 오래되지 않았다.
나는 리안을 무시하고 카이 황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무직원은 뽑아놓았나요?"
"예!"
"새로운 직원이 업무파악을 잘하고 있고요?"
내가 다시 물었다.
"어차피 팀원이 얼마 되지 않아서 업무파악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카이 황의 대답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뭐···. 이제 굳이 카이 황 씨가 팀에 출근할 필요가 없겠네요. AAM 투자금 관리야 어차피 W&R 투자 방향을 따라 하는 것뿐이니 저나 리안 혹은 둘 다 바쁘면 브레이크가 해도 되니까요."
내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리안이 발끈하며 내 어깨를 잡았다.
"너, 뭔 소리야? 이제 카이 황 아저씨가 필요 없으니 자르겠다는 거야?"
리안은 나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어차피 카이 황 씨는 임시로 일하기로 한 것 아니었어? 사무직원을 구했으니 그만두셔야지."
내가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너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야."
나는 그런 리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야말로 카이 황 씨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뭐야?"
리안이 고개를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네가 카이 황 씨라면 온종일 네 옆에서 붙고 있고 싶겠냐? 아무리 친해도 결국은 고용주와 피고용인 관계라고···"
"그게 뭔 소리야! 아저씨와 나는 혈육 같은 사이라고!"
"그건 네 생각이고 고용인과 피고용인은 아무리 가까워도 혈육이 될 수 없어. 그리고 설사 혈육이라도 온종일 붙어 있으면 사이가 나빠지는 법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카이 황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저는 도련님과 함께 있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나는 카이 황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제가 불만이 있어요. 이건 팀원이 팀장보다 팀원에게 더 신경을 쓰니 눈꼴이 시어서 견딜 수가 없네요."
내 말에 잠시 말을 멈췄던 카이 황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도 조심한다고 하기는 하는데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이다 보니···."
카이 황의 말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에요. 부러워서 그렇죠. 그리고 팀에서 계속 잡일을 계속하기에는 카이 황 씨의 능력이 아까워 보이기도 하고요."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다니까요."
카이 황의 말을 자른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냥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에요. 앞으로 계획이 있습니다."
"계획 뭔데?"
리안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를 보니 지금 바로 말하기 싫어졌어. 저녁 식사 때가 됐으니 밥 먹고 하자."
나는 두 사람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리안은 평소보다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중국요리의 핵심은 탕 요리까지 마치 마시듯이 먹었다.
옆에서 카이 황이 말렸지만, 리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식사가 모두 끝나고 차를 나오자 리안이 입을 열었다.
"계획이라니 그게 뭐야?
"회사를 만들 생각이야."
나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회사?"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미 있잖아. 당장 팀에서 관리하는 회사만 해도 3개인데 무슨 회사를 더 만들어? 지금 당장 독립하려는 것은 아닐 것 아니야? 독립할 생각이면 팀 분리를 하려고 회사를 설득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솔직히 이번 일을 겪으면서 짜증이 많이 났어. 한 번도 아니고 걸핏하면 간섭하려고 하잖아."
내가 말했다.
"그렇기는 하지."
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전 왕 웬준 팀장도 그랬고···. 웬 지하오 팀장은 지금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고···. 이번에는 부사장 선에서 예정된 팀 분리를 막은 셈이니까."
나는 리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나중에도 이런 일이 더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 당장 일 년 조금 넘게 남은 내 독립을 막으려고 하거나 막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나가기 전에 최대한 나를 이용하려고 하겠지."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립을 막으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 전에 너를 이용하려고 할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하겠네. 당장 나도 너와 지금과 같은 사이가 아니었다면 류오린의 대주주로서 어떻게든 너를 이용할 생각을 할 테니까."
류오린에서 나를 통해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탐욕은 인간의 본능이었다.
류오린은 그 목적이 무엇이든 투자회사고 투자회사는 바로 그런 탐욕이 극대화된 회사였다.
류오린이 나를 이용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바보짓일 뿐이었다.
"회사가 나를 다시 흔드는 일을 막으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해두어야 할 것 같아. 지금 투자금이 삼억 불 정도인 상황인데도 그런데 지금보다 투자금이 커지면 그때는 더 심해질 테니까."
"하긴 뭐 그렇지. 오기 전에 이번 주 투자 수익률을 계산해 보니 W&R은 7.6% 정도고 AAM은 11.4% 정도더라. 두 회사를 합치면 일주일 사이에 2천만 달러를 번 셈이지. 이대로라면 투자금이 몇 배로 불어나는 데 몇 달 걸리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서 다시 회사 때문에 흔들리는 일을 막으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해둬야 할 것 같아. 그 준비가 바로 새로운 회사를 세우는 것이고 말이야. AAM 투자금은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W&R은 그렇지 않으니까."
러시아에 투자하고 있는 회사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회사는 류오린에서 나갈 때쯤에 청산해서 이익을 투자자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다.
사실상 펀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네."
"투자금도 류오린에서는 적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점차 새로운 회사로 옮겨야지. 문제는···."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가 있죠."
옆에서 듣고 있던 카이 황이 말했다.
투자회사는 직원의 외부 주식 투자도 금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류오린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직원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따로 회사를 세워서 관리하고 있던 투자금을 점차 빼내는 일도 허용할지는 의문이었다.
류오린에서 W&R과 AAM의 소유 관계나 지분구조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외부 투자금이라고는 하지만 류오린도 이 투자금의 운용 방향을 내가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회사 모두 홍콩에 법인사무실이 있는 이상 류오린이 마음만 먹는다면 소유 관계를 조사하는 일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류오린은 홍콩 유력자들 상당수가 회사 절반의 주주이기도 했지만, 중국본토의 권력자들을 뒤에 있었다.
예를 들어 투자 결정을 내리는 것은 나라는 사실을 문제 삼을 수 있었다.
투자 결정이 내릴 수 있었던 자원이 류오린의 지원을 받아서 내린 것이라며 외부회사에서 얻은 이익을 류오린과 나눠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억지였지만 아주 불가능한 소송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이런 소송이 걸리면 자금이 묶이기 때문에 나도 합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카이 황을 설명을 듣고 난 리안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사실상 이름만 있었던 지금과는 달리 적어도 W&R에서 누군가 이런 일을 처리해야지. 능력이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말이야."
말을 마치고 나는 카이 황을 바라보았다.
"카이 황 씨가 그 일을 맡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맡아 주시면 3%의 지분을 드리겠습니다."
내는 최대한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지난주 W&R의 투자금은 2억 1천만 달러였다.
3%면 현금으로도 육백삼십만 불이었다.
하지만 이건 지금 가치일 뿐이었다.
애초에 W&R은 오십만 달러의 투자금이 시작이었다.
레버리지를 최대한 사용할 때처럼 폭발적인 수익률은 아니었지만, 리안의 말대로 당장 지난주 수익률만 7%였다.
실제 W&R의 지분 3%의 가치는 미래가치가 아니라 현재 가치로도 몇백만 달러 수준이 아니라 몇천만 달러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대가를 지급하고 카이 황을 영입하려고 하는 것은 그가 이런 일에 적합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본 카이 황은 뛰어난 회계 처리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재산을 숨기는 데 뛰어났다.
한때 나는 리안이 홍콩 내에 가진 재산이 얼마인지 조사해본 적이 있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재산이 많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조사해봐도 실체가 불분명했다.
나중에 리안에게서 그렇게 재산을 숨긴 사람이 카이 황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그러면서 리안은 화교 중에서 진짜 부자들은 포브스와 같은 잡지에 절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럴 일을 감당할 능력도 없습니다. 리안 도련님을 떠날 생각도 없고요."
카이 황은 딱 잘라 거절했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흔들릴 만도 한데 조금의 주저도 없었다.
놀랍기는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지금으로서는 W&R이 리안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이겠죠?"
"맞습니다."
카이 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리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말인데···. 너 W&R에 투자해라."
"투자?"
"지금 W&R의 투자금이 이억천만 달러 정도 되나?"
"오늘 아시아 증시 마감 기준으로 이억이천육백만 달러입니다."
카이 황이 대답했다.
"리안 너 이천이백육십만 달러만 투자해라. 그럼 W&R의 지분 10%를 줄게."
"진심입니까?"
이번에도 질문을 한 사람은 카이 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