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우리는 모두 짊어질 십자가가 있다.
팀 사무실에는 새로운 얼굴이 있었다.
인도네시아로 가기 전 카이 황에게 채용을 지시한 사무직원이었다.
"여기는 며칠 전부터 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카렌 왕이라고 합니다. 중국 이름은 왕리리라고 하고요. 3년 전부터 류오린에서 근무한 직원입니다. 사무처리 능력도 탁월하고 상사와 동료들 모두에게 평판이 좋습니다."
카이 황이 여직원을 나에게 소개했다.
"카렌 리리 왕입니다. 편하게 카렌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여직원이 인사했다.
이름은 처음 듣지만, 얼굴은 지나가다 봐서 익숙한 직원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햄스터가 연상되는 인상이었다.
"팀장을 맡은 에드릭 손이라고 합니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카이 황 씨가 며칠 안에 그만둘 예정입니다. 그 일까지 하려면 카렌 씨가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겁니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카이 황 선생의 빈자리를 잘 메울 수 있을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카이 황 씨가 잘 알아서 뽑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한가지 말하자면 저는 일에 대한 보상은 확실히 하는 성격입니다. 일만 제대로 처리하면 보상은 팀에 들어오면서 기대하신 만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카렌이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돈에 관해 이야기를 하니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한 시간 후에 투자 회의를 할 계획이니 준비해 주세요."
나는 카렌에 회의 준비 지시를 내리고는 브레이크의 자리로 향했다.
그는 어느새 업무를 집중한 상태였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내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걸음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살펴보았다.
브레이크는 중앙에 있는 모니터에 러시아 주식시장인 RTS 차트를 띄워놓은 채 러시아 기업들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잠시 내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브레이크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말입니까?"
"지금이요."
브레이크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브레이크와 함께 내 자리에 와서 그에게 한쪽의 빈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서 이야기하죠."
브레이크가 앉자 내가 입을 열었다.
"들으셨겠지만 카이 황 씨가 W&R의 대표라 가게 됐습니다."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대답하는 브레이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W&R의 투자자분들이 얼마 전 류오린에서 팀 분리 때문에 논란이 생긴 것을 듣고 마음에 드시지 않았나 봅니다. 그분들이 투자하실 때는 팀이 분리될 결정된 다음이었다. 분리를 예상하고 투자하셨는데···. 이번 일로 류오린에서 나중에라도 투자에 간섭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카이 황 씨를 영입해서 W&R을 사모펀드 형식의 투자회사로 전환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주 많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W&R의 투자자인 나로서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투자로 얻은 이익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출근하면서 예전 팀원들의 반응을 보니 이런 생각은 더더욱 확실해졌다.
예전 팀원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게 내가 그런 부당한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말은 아니었다.
내 탓에 보너스를 받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팀이 분리됐다고 화를 내다니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된 일이군요."
브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매우 아쉬운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W&R이 사모펀드 형식의 투자회사가 된다는 것은 우리 팀이 하던 투자 결정을 직접 한다는 의미였다.
수수료가 낮아지는 것도 낮아지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지금 브레이크가 가지고 있는 러시아 투자에 대한 결정권을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다.
"W&R이 투자회사가 되더라도 당장 모든 투자금을 회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대안이니까요. 한동안은 지금과 큰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내 말에 브레이크가 조금 안심하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한동안이라면 시간이 가면 투자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브레이크는 내 말이 의미하는 바로 알아챘다.
"맞습니다."
브레이크의 말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역시···."
브레이크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더욱 짙어졌다.
"브레이크 씨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브레이크 씨가 만약 원하시면 지금 맡은 러시아와 동유럽 투자를 계속 맡기실 생각이시니까요."
지금 자신이 관리하는 투자금을 계속 맡긴다는 말에 브레이크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요. 브레이크 씨가 수익률이 높으니 계속 맡기시는 것이죠."
브레이크의 투자가 최고의 수익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브레이크의 러시아와 동유럽 투자 수익률은 높았다.
물론 브레이크의 수익률이 높은 이유는 러시아 증시가 빠르게 경제위기에서 회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브레이크가 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에드릭 팀장님이 말씀을 잘 해주시지 않았다면 투자자분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브레이크가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어떻게 알기는 내가 투자자니 아는 것이지.'
나는 손을 빼며 브레이크를 부른 본격적인 용건을 꺼냈다.
남자에게 손을 잡히는 것은 조금 거북했다.
그렇지 않아도 리안과 나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나고 있다지 않은가?
새로운 여직원이 온 상황에서 쓸데없는 소문은 사양이었다.
"이미 말한 것처럼 W&R의 투자자분들은 브레이크 씨를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브레이크 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습니다."
"제안이라니요?"
브레이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시 W&R로 이직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만약 브레이크 씨가 이직하신다면 투자자분들은 지금 팀에서 맡은 러시아와 동유럽 투자를 맡길 생각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당연히 류오린보다는 기본급이나 인센티브 모두 높은 조건입니다."
내 제안에 브레이크는 선뜩 대답하지 못했다.
"팀장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저한테까지 제안했다면 팀장님도 당연히 제안을 받으셨을 텐데요?"
브레이크가 내 거취를 물었다.
"저는 사정이 있어서 내년 6월 말까지는 류오린을 떠나기 어렵습니다."
"정말 떠나지 못하시는 겁니까?"
브레이크가 다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계획대로 내년에 CIA를 그만두려면 이직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내 대답에 잠시 생각하던 브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팀장님과 함께 내년 7월 이후에 거취를 결정하겠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아마 그는 내가 내년에 류오린과의 계약이 끝나면 W&R로 옮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내심 지금 당장 브레이크가 W&R로 옮기기를 바라고 한 제안이었다.
자주 가보기는 하겠지만 카이 황만 W&R에 보내는 것은 불안했기 때문이다.
브레이크와 나는 그리 오래된 사이가 아니었다.
우리 둘은 이야기도 많이 나누지 못했다.
CIA 일로 바빠서 회사를 비우는 날이 많았다.
이런 둘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인센티브 그리고 새로운 회에서 시작부터 함께한다는 조건이라면 브레이크가 당연히 이직하리라 생각했다.
"혹시 저 때문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사람이 필요해서 브레이크 씨에게 제안했지만 일 년 후에도 같은 제안을 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때는 다른 사람이 동유럽 투자를 책임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번은 좋은 기회입니다."
나는 다시 한번 설득했다.
"좋은 기회라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 년 후에 자리가 없다고 해도 팀에 남고 싶습니다."
"내가 일 년 후에 그만두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을 텐데요? 내가 류오린을 그만두면 이 팀이 해체될 수도 있습니다. 말한 대로 그때는 W&R에 자리가 없을 수도 있고요."
"그래도 남고 싶습니다."
브레이크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브레이크가 손을 앞으로 모으며 입을 열었다.
"팀장님 때문입니다."
"나요?"
"예."
브레이크가 대답했다.
브레이크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금 당황스럽네요. 리안과는 예전부터 잘 알던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리안 때문이라면 모르지만, 저와 브레이크 씨는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 따로 개인적 친분을 가진 적도 없고요?"
내가 물었다.
"가봐야 소용이 없으니까요. W&R이 저를 스카우트하려는 이유는 러시아와 동유럽 투자 수익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를 W&R에 영입하려고 하는 이유는 브레이크의 수익률이 낮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 이천만 달러를 투자하고 추가로 육백만 달러를 투자했으니 투자원금은 이천육백만 달러였다.
오늘 기준으로 그가 관리하는 투자금은 약 삼천삼백이십만 달러였다.
투자 수익률은 27.7%이었다.
W&R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어느 회사라도 서로 모셔가려고 할 수익률이었다.
"다른 회사로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못 가는 것입니다. 제 수익률을 보고 데려가 봐야 다른 곳에서는 이런 수익률을 낼 수 없으니까요."
"그게 무슨···?"
"제가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투자 방향을 결정할 때는 가장 중요하게 참고하는 정보가 바로 팀장님이 투자를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미국과 아시아 두 시장에 대한 투자 방향을 듣고 나면 러시아와 동유럽에 투자 방향을 정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죠. 각국의 개별적인 국지적 정치 경제 상황만 참고하면 되니까요."
"···."
나는 브레이크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비슷한 방법으로 투자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먼저 결정하는 투자는 미국의 나스닥 선물 포지션이었다.
나스닥에 가장 큰 금액인 일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주식시장이 다른 국가에 주식시장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나스닥의 흐름을 큰 흐름으로 보고 각국의 개별적인 정치 경제적 상황을 참고해 다른 투자를 결정했다.
브레이크도 근본적으로는 나스닥을 제외한 다른 시장에서 내가 투자 결정 방법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셈이었다.
"그랬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레이크의 투자 방법을 알아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러시아와 동유럽에 투자해야 한다.
홍콩 증권 시장과 러시아 동유럽 증권 시장이 열리는 시차를 생각하면 리안이 러시아와 동유럽 투자까지 맡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내가 투자를 맡을 수도 없었다.
내가 낮에 아시아 시장에 투자하고 밤에 남아서 러시아까지 남아서 투자하려면 그냥 혼자서 투자하고 말고 뭐하러 팀을 만들고 팀원들에게 투자를 맡기겠는가?
"제가 팀을 떠나지 않는 것은 다른 곳에 가봐야 팀에 남아 있는 것만큼 수익률을 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투자 수익률이 낮은데 옮긴 곳에서 수익률의 인센티브가 높아 봐야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팀장님께 배울 것도 많고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팀에 남겠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말씀이 끝나셨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브레이크가 인사를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브레이크를 W&R에 보내는 것을 일단 포기했다.
내가 W&R의 실제 소유자라는 것을 밝히고 회사를 옮기도록 해도 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어제 카이 황에게 브레이크도 함께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그렇지만 본인이 가지 않는다는데 내가 어쩌겠는가?
카이 황의 능력이라면 혼자서도 잘 해낼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없으면 알아서 구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