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84화 (85/270)

서몽

# 손님이면서 주인 행세를 한다.

홍콩 증시에 투자하자는 내 제안에 카이 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팀장님의 생각에는 찬성합니다. 홍콩에서 실제로 투자회사를 운영하려면 본진을 굳건히 다지는 것이 좋지요. 그럼 홍콩투자는 어떤 식으로 하실 생각입니까?"

카이 황이 투자 방법을 물었다.

"아무래도 선물이 낫지 않겠습니까? W&R의 직원을 뽑은 후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인력이 없는 상황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홍콩의 기업이나 부동산에 투자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내 감정과는 별개로 홍콩의 기업이나 금융시장에 대해서 별로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리안이나 카이 황은 홍콩 토박이였다.

하지만 개별 기업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면 W&R의 홍콩투자 주도권은 내가 아니라 카이 황에게 넘어가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카이 황이나 리안이 W&R의 주인처럼 보이는 것이 그들을 진짜 W&R의 주인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역시 매도 포지션으로 지수 하락에 투자하실 생각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야죠. 다만 홍콩은 다른 선물투자와는 다르게 할 생각입니다."

"다르게 하다니요?"

지금까지야 높은 수익률을 숨겨야 했다.

내가 외부로 드러나서 CIA가 나에 대해 자세히 알아내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W&R의 대표로 카이 황을 내세운 이상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카이 황이 W&R을 통해 홍콩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수록 내가 안전해질 수 있었다.

"아무래도 W&R에 대한 소문 내려면 레버리지를 다른 선물보다 많이 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많이라면 얼마나?"

"1000% 어떻습니까?"

이 정도 레버리지는 W&R을 세우기 전 내가 과거 처음 아무것도 모르고 투자했을 때나 사용하던 레버리지였다.

물론 그때는 거의 20배의 레버리지로도 투자하고 했었다.

잃을 것이 없으니 겁이 없던 시절이었다.

"10배나요?"

카이 황이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예. 조금 전 계획된 투자를 하면 W&R의 투자금 중에서 이천사백칠십육만 달러 정도가 남습니다. 이 중에서 이천만 달러를 항셍지수 선물에 투자하죠. 그리고 홍콩 금융가에 소문을 내려면 류오린이 아닌 다른 투자은행을 통해서 투자하는 것이 좋겠죠. 나머지 투자금은 증거금이나 만약을 대비해서 가지고 있고요."

류오린은 회사의 특성상 높은 수익을 올려도 외부에 소문이 퍼져 나가지 않았다.

류오린을 통해 투자하는 것은 정체를 숨길 때는 좋지만 이름을 알리려고 할 때는 오히려 방해될 뿐이었다.

"10배는 조금 많지 않겠습니까? 자칫 손해라도 나면···."

"좀 손해가 나면 어떻습니까? 손해가 나더라도 다른 투자에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습니다. 혹시 증시가 폭락해서 모자라면 제 개인 계좌에 있는 돈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아마 한 사백만 달러 정도는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포지션 청산을 당하면 안 되니까요."

내 말에 카이 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개인 계좌의 돈을 사용하실 정도로 결심이 확실하다면 따라야죠. 물론 개인 계좌의 돈을 쓸 일은 없을 것입니다."

카이 황이 단호한 목소리 말했다.

"그럼 수고해주세요. 그러나저러나 아쉽네요. 제가 돌아와서 보면 안 계시겠죠? 사무실에서 카이 황 씨를 만나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으로 생각하니···. 이런저런 생각도 들고요. 앞으로는 제가 W&R의 사무실을 자주 찾아가겠습니다."

"하하하···. 어서 사무실을 구하라는 말씀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W&R에 투자할 예정인 빌딩 중에서 가장 좋은 곳에 사무실을 열겠습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나는 리안에게 다시 자리를 비운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자리를 비운다고? 돌아온지 얼마나 됐다고?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내가 또 자리를 비운다는 말에 리안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야 할 일?"

나는 리안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무슨 관광 다니는 줄 알아. 아시아를 돌아다니면서 투자정보를 모으는 거야. 그렇게 정보를 모아서 이번에 인도네시아에 투자하는 거잖아."

"인도네시아 같은 투자하기 까다로운 곳은 좀 피해달라고···. 알았어. 잘 갔다 와."

나는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여행 가방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앞으로 여행 가방은 되도록 가지고 다니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주 여행을 가다 보니 이제 매번 여행 가방을 싸는 것조차 귀찮았다.

그냥 현지에 가서 돈으로 사는 것이 편했다.

그렇게 필리핀에 도착한 나는 상점에서 핸드폰을 샀다.

그리고 지난번 만났던 CIA 필리핀 지부 요원인 조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산티아고입니다."

나는 지난번 조엘에게 이야기했던 가명을 이야기했다.

-어딘가?

"마닐라입니다."

-그래? 벌써 왔나? 지금 당장 지난번 만났던 술집 밀실에서 오게.

조엘의 목소리에서 내가 온 것을 기뻐하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내가 오기를 기다린 듯했다.

나는 지난번 조엘을 만났던 술집을 찾아갔다.

이번에도 바텐더에게 조엘의 이름을 말하자 예전 그 밀실로 안내해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밀실에 아무도 없었다.

밀실에서 잠시 기다리자 조엘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급하다는 이야기밖에 없던데요?"

나는 조엘이 앉자마자 바로 물었다.

내가 온 것은 CIA 본부 통해서가 아니라 조엘에게서 온 연락 때문이었다.

급하다고 해서 오기는 왔지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잠시만···. 숨 좀 돌리세."

조엘은 잠시 후 종업원이 가져온 술을 단숨에 마셨다.

숨을 돌린 조엘이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필리핀 남동부에 있는 팔라완주 도스 팔마스 휴양지에서 미국인 3명과 17명의 관광객이 이슬람 반군에게 납치되었네. 관광객은 대부분 중국계 필리핀인이고 말이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조엘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저런 이야기를 왜 나에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조엘은 내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필리핀의 이슬람 반군에게 미국인이 납치됐다고 이야기했네만···?"

조엘도 내 표정과 반응에 당황한 듯 보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필리핀의 납치문제는 심각하죠."

필리핀에서는 납치사건이 자주 발생한다.

작년 정보학교에서 배운 것에 따르면 이슬람 반군은 작년 4월에도 독일인 3명과 말레이시아인 9명을 합쳐 21명을 납치한 사건이 있었다.

심지어 작년 여름에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정신이 나간 미국인 제프리 실링이라는 자가 술루섬의 아부사야프 캠프에 자진해서 찾아갔다가 인질로 잡힌 사건도 있었다.

8개월 동안 잡혀있던 제프리 실링이 탈출한 것이 지난 달이었다.

대도시에서도 돈을 노린 납치사건이 자주 발생하는데 특히 범행대상은 주로 중국계였다.

매년 적게는 90건에서 많게는 100건이 넘는 중국계를 대상으로 한 납치사건이 발생하는 사건이 필리핀이었다.

중국계가 주로 납치사건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만큼 중국계가 필리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내가 필리핀을 방문했을 만났던 소매치기들도 나중에 리코에게 듣기로는 나를 중국계라고 생각하고 대상으로 삼은 것이었다.

"제가 이해를 못 하는 것은 다른 부분입니다. 필리핀에서 3명이 납치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게 저를 부른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급하다면서요? 그래서 저는 지난번 제가 필리핀에서 한 일과 관계된 일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나는 조엘을 보며 물었다.

말을 끝내고 조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납치사건을 해결하는데, 자네 도움이 필요해서 부른 거지."

조엘의 대답에 나는 당황했다.

"도움이라면 무슨 도움을 말하는 것인지?"

CIA에는 인질 협상 전문가나 구출 작전 전문가가 따로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려면 그런 전문가를 요청해야지 나를 왜 요청한다는 말인가?

"미국인이 납치됐으니 인질 협상도 해야 하고 필리핀 정부에서 구출 작전을 하려고 하면 그 구출 작전을 살펴볼 필요도 있어. 필리핀 놈들은 이런 구출 작전에 대한 경험이 부족해서 자칫 큰 인명피해가 날 가능성이 크네."

조엘이 말했다.

"···."

나는 조엘의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자네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나? 미국인이 인질로 잡혀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조엘이 따지듯 물었다.

"얼마나 어이가 없으면 이 상황에서 헛웃음이 나오겠습니까? 조엘 요원은 에이전트 에스팀을 뭐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아시아에서 CIA 공식조직에서 따로 떨어져서 정보수집과 공작을 하는 독립팀으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조엘 요원 당신이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처리해주는 해결사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고요?"

내가 말했다.

당연히 내 표정이나 말투는 차가웠다.

이런 내 말과 표정에 놀랐는지 조엘이 점점 더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있겠나! 다만 이번은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네. 자네 팀 능력이라면 이런 일도 충분히 도와줄 수 있는 일 아닌가?"

조엘이 변명을 늘어놓았다.

"에이전트 에스팀의 주요임무는 점점 미국 안보에서 중요해지는 동아시아 정보분석입니다. 최근 일본이나 필리핀, 태국, 최근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직접 작전에 참여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작전이 팀의 정보분석과 관련된 정보전이나 심리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인질구출을 위해 부를 수 있는 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을 마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일은 본부와 CIA 필리핀 지부에 엄중히 항의하겠습니다."

"아니 잠시만···!"

조엘이 당황해서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고는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조엘 요원이 관여된 작전에서 우리 에이전트 에스팀은 지원을 거절하겠습니다."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는 사람이 류오린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미친 것도 아니고 인질구출 작전에 관여하라니···.

그것도 상대는 종교로 무장한 무장반군이었다.

협상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 일에는 끼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조엘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나를 부른 것은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최근 아시아 지부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한 에이전트 에스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밀실을 나왔다.

"잠시만 기다리게! 내가···."

뒤에서 조엘이 나오며 무언가 이야기했지만 무시했다.

조엘의 목소리를 들은 밀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조엘 씨가 잠시 기다리라고 하잖아!"

술집 자체가 조엘의 필리핀 현지 협조자인 듯했다.

나는 사내를 무시하고 그대로 출입구로 향했다.

내가 자신을 무시하고 나가려고 하자 사내가 손으로 나를 잡으려고 했다.

사내는 자신의 체격을 믿은 모양이지만 내가 이런 곳의 술집 경호원에게 당할 리가 없었다.

풋볼을 할 때는 이런 사내보다 훨씬 운동신경도 뛰어나고 근육으로 뭉쳐진 상대 선수들의 태클을 수없이 받아본 나였다.

나는 사내의 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몸을 돌려 사내의 뒤로 가서 무릎 뒤를 강하게 차서 균형을 무너트렸다. 그리고 균형이 무너진 사내를 강하게 밀어 쓰러트렸다.

거구의 사내가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술집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재빨리 술집을 빠져나왔다.

여기서 소동에 휘말릴 수는 없었다.

술집에서 빠져나온 나는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진흙탕에서 겨우 빠져나온 나는 잠시 공항에서 티케팅을 하기 전에 고민했다.

조엘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면서 인질에 대한 문제는 에스팀의 주요임무가 아니라는 이유을 댔다.

그렇지만 에스팀이라는 것 자체가 없으니 당연히 에이전트 에스팀의 주요임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더구나 조엘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을 보면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인질 협상이든 구출 작전이든 말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슬람 반군이 무슨 요구를 하든 그걸 지금 아로요 정부가 들어줄 리가 없었다.

아로요대통령이 최근 총선에서 예상보다 좋은 득표를 했다. 하지만 정작 아로요대통령은 선거를 통해서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이자 여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슬람 반군의 요구 조건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슬람 반군이 순순히 인질을 풀어줄 리가 없었다.

미국인과 중국계 필리핀인···.

둘 다 이슬람 반군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럼 남은 것은 구출 작전뿐이었다.

필리핀군의 구출 작전능력을 생각했을 때 피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조엘은 어떤 식으로든 내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할 것이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진짜로 에이전트 에스팀이 있다면 이런 것은 윗선에서 간단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에이전트 에스팀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내가 나설 수도 없었다.

나를 대신해서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행 티켓을 구매했다.

인도네시아는 내가 조엘에게 말했던 정보전과 심리전에 딱 맞는 국가였다.

무엇보다 와히드 대통령이 쫓겨나기 전까지 이반 부카드에게는 내가 필요했다.

이반 부카드는 나에게 기꺼이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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