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85화 (86/270)

서몽

# 불을 끄는 데는 더러운 물로도 충분하다.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했다.

싱가포르를 거쳐서 오느라 무려 6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직항편이 저녁 9시에 있지만, 한시라도 빨리 필리핀을 떠나고 싶었다.

지난 일 년 동안 한 달에 몇 번이나 하는 일이었지만 여행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공항 면세점에서 한동안 인도네시아에 머물면서 사용할 물건들을 구매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사용할 전화기도 새로 구매했다.

보안을 위해서였다.

필리핀에서 조엘에게 전화를 걸 때 썼던 전화는 마닐라 공항에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귀찮네.'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운 신분증으로 전화기를 매번 직접 구매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인도네시아에도 현지 협조자를 구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자카르타 공항에서 호텔로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이반 부카드에 전화를 걸었다.

"수이진입니다."

-자네···. 무슨 일인가?

이반 부카드는 내 이름을 듣고 놀란 음성이었다.

내가 이렇게 빨리 다시 연락하리라 생각하지도 못한 듯했다.

"자카르타입니다.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싱가포르로 떠난 것 아니었나?

"처리할 남은 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온 것입니다. 작전 결과는 확인해야죠."

사실이 아니었지만, 이반 부카드는 진실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군.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이야기하세. 내가 주소를 불러줄 테니 오게.

이반 부카드가 주소를 불러줬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자카르타 남부에 있는 CIA 안가 중 하나네. 안전한 곳이니 안심하고 와도 되네.

CIA 안가···.

일반적으로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반 부카드에 안전한 곳이라고 해서 나에게도 안전한 곳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내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물론 예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안가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상대했던 단테 패트릭은 작전 요원이 아니었다.

어딘가 어설펐던 단테 패트릭과 작전 요원인 이반 부카드와는 조심해야 할 정도가 달랐다.

안가에 내 지문이나 DNA 정보 같은 것들이 남을 수도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지난번 술집에서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안가에서 만나면 안 되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내 역제안에 이반 부카드가 이유를 물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급한 일이 아니면 조직과 접촉은 최소화하라는 것이 팀의 내부규정입니다."

-그래? 뭐···. 팀장이 까다로운가 보군. 가끔 보안을 지나치게 따지는 요원이 있기는 하지. 알았네. 그럼 지난번 만났던 술집에서 보세.

"알겠습니다. 그럼 지난번 그 술집에서 뵙겠습니다."

면세점 구매한 모자와 안경으로 쓰고 지난번 술집으로 향했다.

조엘과는 달리 이반 부카드는 이미 약속장소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서 오게. 한동안 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그의 표정이 밝은 것으로 봐서는 일이 잘 진행되는 것 같았다.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고 떠났던 말을 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이반 부카드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오히려 자네가 다시 돌아와서 기뻐서 그렇지···."

"바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잠시 필리핀 쪽에서 도움 요청이 와서 마닐라에 들렀다가 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마닐라?"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예. 본부도 통하지 않게 개인적으로 도움 요청을 해서 갔는데···."

나는 슬쩍 말을 흐렸다.

"마닐라라···. 필리핀이면···. 설마 얼마 전 인질 문제로 자네를 부른 건가?"

"예···. 뭐···."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런 문제는 직접 지적을 하지 않을수록 효과가 있었다.

어쨌든 조엘은 나보다 CIA에서의 경력이 긴 요원이었다.

CIA가 나이나 연차보다 보안등급이나 직책이 더 중요한 곳이라고 해도 대놓고 선임 요원을 비난하는 것을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모기를 잡으려고 칼을 뽑아 휘두르는 것도 아니고 자네를 겨우 인질구출 사건에 불렀다는 말인가?"

이반 부카드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능력만 된다면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 기꺼이 도왔겠지만···. 저는 구출 임무는 훈련만 받았지 직접 해 본 적은 없습니다. 인질구출 협상도 마찬가지고요."

내 말에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 참 이상하군. 필리핀이면 엘만이 지부장인데···. 엘만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제가 만난 요원은 조엘이라는 분이셨습니다."

"조엘? 다른 지역에 온 요원인가? 처음 들은 이름인데?"

당연하지만 현장 작전 요원이라고 다른 요원에 대해서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같이 훈련을 받았거나 혹은 같이 작전에 참여하지 않는 이상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는 얼마 정도로 보였나?"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

"어디 다른 지역에서 실수하고 밀려온 요원인가 보군. 성과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제가 도울 수 있으면 도와드렸겠지만, 협상이나 인질구출은 제가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왜 내가 보기에는 자네는 협상이나 인질구출도 잘할 것 같은데···. 어쨌든 잘 왔네. 그렇지 않아도 의논할 일이 있었는데 말이야."

"의논한 문제요?"

이반 부카드의 말에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자카르타로 온 것은 필리핀에서 지원 요청을 거부에 대한 명분과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반 부카드도 엉뚱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자네 계획대로 AKA를 사주해서 공산주의 서적을 태운 작전은 꽤 성공적이었네.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와히드 대통령 지지진영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 올라오고 있네."

"잘됐네요."

내가 계획하기는 했지만, 성공을 자신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와히드를 끌어내리는 데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 며칠 만에 와히드 진영이 균열이 생기고 있다니···.

조금 뜻밖이었다.

"모두가 자네 덕분이네."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아닙니다. 제 계획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와히드의 지지기반이 이미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를 대통령을 만든 세력들조차 와히드에 진절머리를 내고 지지를 철회할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거기에 지지를 거둘 명분을 제공한 것뿐이죠."

나는 되도록 자세를 낮췄다.

나중에 필리핀의 조엘을 누르려면 이반 부카드가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아무리 와히드 지지자들이 와히드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다고 해도···. 그걸 해낸 것은 자네의 작전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야.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반 와히드 진형의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우리 CIA가 왜 그동안 못했겠나."

"아닙니다. 와히드 대통령을 몰아내자는 여론을 만든 인도네시아 지부의 노력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제가 한 일이라고는 약간의 양념을 첨가한 것뿐입니다."

"사람 참···. 계속 이야기해봐야 같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으니 그만하지. 아직은 여전히 와히드가 대통령이니 말이야. 하지만 와히드가 쫓겨나면 그때는··· 내 자네 공을 잊지 않겠네."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지금 와히드 진영이 분열되고 있다면 의논하실 일이 있다는 것은 그럼?"

"와히드 진영의 균열이 생겼으니 다음 단계로 가야 하지 않겠나?"

이반 부카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죠."

"이제 다음 단계는 국회에서 와히드에 대한 탄핵을 끌어내야지. 그러자면 야당들 사이에 탄핵합의안을 먼저 만들어 내야 하고 말이야."

와히드 대통령이 공산주의를 허용한 이유 중 하나는 군소좌파정당까지 끌어들여서라도 국회에서 자신에 대한 탄핵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서 와히드에 대한 탄핵이 국회에 상정됐을 때 군소좌파정당이 와히드 진영에 서기는 어려웠다.

와히드 대통령의 공산주의 허용으로 자카르타 시내에서 반공산주의 시위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반공산주의를 내세우는 원내 제2당인 골카당이 그런 행동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군소좌파정당이 와히드 탄핵에 공개적으로 반대한다면 그건 골카당에 오히려 명분을 주는 일이었다.

"인도네시아 법에 따르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바로 진행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선 탄핵을 위한 투표를 언제 할 것인지를 국회에서 결정해야만 하고 말입니다. 인도네시아 법에 따르면 탄핵 투표 결정이 내려지고 실제 탄핵투표일까지는 보통 두 달 정도 유예기간이 있으니 와히드가 물러나려면 최소 두 달 이상 걸리겠군요."

"뭐···. 탄핵 투표 결정을 위한 의원정족수와 탄핵에 필요한 의원정족수는 큰 차이가 없네. 쉽게 말해서 투표일 전에 알아서 물러나라는 정치적인 유예기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아직 메가와티 쪽에서는 소식이 없습니까?"

와히드 대통령의 탄핵에서 가장 결정적인 핵심 인물은 당연히 메가와티 부통령이었다.

그녀는 탄핵 투표가 결정되는 인도네시아 의회 최대 다수당의 대표일 뿐 아니라 와히드가 탄핵을 당하면 대통령으로 취임할 부통령이기도 했다.

이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메가와티 부대통령은 지난 1년 동안의 반 와히드 시위에도 자기 뜻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섣불리 나섰다가 대통령이 되기 위한 욕심을 부린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메가와티 부대통령으로서는 시간이 지나고 때가 오기를 기다린 셈이었다.

지난 1년간 와히드의 회계 부정을 폭로하고 반 와히드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 일이나 내가 기획한 공산주의 서적을 불태우는 조직적인 목표는 한가지였다.

바로 메가와티 부통령에게 이제 당신이 나서도 된다는 확신을 주기 위한 신호를 보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곧 결단을 내릴 것이라는 소문이야. 특히 자네가 한 일로 골카당이 와히드 대통령을 더는 지지할 수 없게 만든 것이 컸어. 골카당만 아니면 의회 내 와히드 지지자들로서는 표 대결에서 메가와티의 결정을 막을 수 없지. 늦어도 열흘 안에 결정될걸세."

열흘은 너무 늦었다.

조금 앞당길 필요가 있었다.

"조금 더 확실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더 확실하게?"

이반 부카드가 되물었다.

"예."

"어떻게 말인가?"

"골카당에서 유력한 정치인 한 명을 메가와티 부통령에게 보내서 골카당이 와히드 탄핵에 협력하겠다고 약속하는 거죠."

"골카당 정치인을?"

"예."

내 말에 이반 부카드가 입을 열었다.

"알겠지만 골카당 현 대표이자 국회의장인 악바르 탄중(Akbar Tandjung)은 1999년 대통령 선거에서 와히드를 지지한 장본인이야. 아무리 돌아가는 상황이 와히드가 탄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고 해도 메가와티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을 거야. 메가와티도 악바르 탄중이 아주 싫어하고 말이야."

와히드를 쫓아내는 것이 CIA의 목표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나는 인도네시아에 대해 여러 가지 조사를 했다.

가장 자세히 조사한 것이 바로 골카당이었다.

골카당이 와히드를 쫓아내는데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수하르토가 쫓겨난 이후 골카당의 대표인 악바르 탄중은 나름 당을 잘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악바르 탄중이 당의 대표라고 해도 예전의 수하르토처럼 당을 완벽히 장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대표인 악바르 탄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골카당 내에는 나름 자신의 세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존재했다.

그중에는 CIA가 포섭하기에 딱 알맞은 사람이 있었다.

"유수프 칼라 (Jusuf Kalla)는 어떻습니까? 골카당 내 세력도 있고 작년에 교통통신부 장관에서 쫓겨나서 와히드에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골카당이 대선에서 와히드를 지지했다.

와히드는 당선 이후 몇 개의 장관직을 골카당 출신을 임명했다.

유수프 칼라는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작년까지 교통통신부 장관이었다.

하지만 작년인 2000년 와히드는 갑자기 유수프 칼라를 포함한 2명의 장관을 해임했다.

이유는 비리를 발견해서라고 하지만 그 비리에 대한 증거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았다.

"유수프 칼라라···. 괜찮기는 한데···. 그가 악바르 탄중을 설득할 수 있을까?"

"아시겠지만 유수프 칼라는 칼라 그룹의 실질적인 총수입니다. 그가 왜 장관을 했겠습니까? 그만큼 정치적 야망이 크다는 의미죠. 그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악바르 탄중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당내 장악력이 높은 악바르 탄중을 뛰어넘으려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고요. 미국은 또 은혜를 잘 잊지 않죠."

"유수프 칼라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자는 말인가?"

유수프 칼라는 대단한 능력을 갖춘 사업가이자 정치가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직원이 한 명밖에 없던 아버지의 사업을 넘겨받은 유수프 칼라는 그 사업을 인도네시아 유수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기업가로 성공하고도 유수프 칼라는 정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정치적 야망이 크다는 의미죠. '회사'라면 그를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적당한 때 악바르 탄중의 비리 정보를 넘긴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당장 와히드는 어차피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메가와티가 탄핵 일자를 결정하자고 하면 골카당이 그런 와히드 편을 들 리가 없고요. 유수프 칼라에게는 손해날 것이 없는 일이죠."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이반 부카드가 입을 열었다.

"계획은 좋군. 어때? 자네가 직접 유수프 칼라를 만나서 설득해 보는 것은?"

"제가요?"

내가 파악한 유수프 칼라라면 내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이반 부카드로서는 굳이 나를 보내서 공을 나눌 이유가 없었다.

"그래. 필리핀 정부 성향을 보면 며칠 내에 인질구출 작전을 실행할 거야. 당연히 실패할 테고 말이야. 그럼 조엘이라는 자는 자네 팀에 책임을 떠넘기려고 할 텐데···. 자네 아니···. 에이전트 에스팀이 조엘이라는 요원의 도움을 거절할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순간 몸에 소름이 끼쳤다.

이반 부카드는 내 상황을 놀랄 정도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일은 잘 진행되고 있지만 내 마음은 무거웠다.

이반 부카드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CIA 요원들이 모두 일본의 단테 패트릭이나 필리핀의 조엘 같은 바보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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