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
리안이 집으로 찾아온 카이 황을 보며 말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그러게요. 겨우 며칠인데 굉장히 오래전인 것 같습니다."
카이 황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에드릭에서 W&R의 대표 제안을 받고 집사직을 그만두고 곧바로 이사했다.
어차피 W&R의 대표직을 수락한 순간 집사 일은 그만두는 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리안의 일정과는 별개로 카이 황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전처럼 리안을 돌볼 수가 없었다.
또한, 한 회사의 대표가 다른 집안에서 집사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리안이 집에서 나와 지금은 센트럴 중심에 있는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오랜 세월 카이 황 자신이 살아온 집을 손님으로 방문하는 것은 색다른 경험일 것이다.
리안의 집에서 그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색해하는 사람은 단지 카이 황뿐이 아니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가 집사 카이 황이 아니라 손님 카이 황을 낯설어했다.
"진작에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고 싶었는데···. 제가 십 년이 넘도록 못 한 것은 에드릭이 몇 달 만에 해냈네요."
리안은 카이 황이 독립해서 한 회사의 대표가 된 지금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리안은 카이 황이 집사 일을 그만두기를 바랬다.
아주 훌륭한 집사이기는 했지만, 카이 황의 능력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인력 낭비였다.
카이 황 같은 우수한 집사는 없었지만, 그보다 못하지만 쓸만한 집사는 70만~80만 홍콩 달러, 즉 미화 10만 달러 정도면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이 황은 뭘 해도 그것보다 훨씬 나은 일을 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카이 가문은 본토에 있을 때부터 리안 집안의 가신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리안에 대한 카이 황의 보살핌은 어릴 때부터 유별난 점이 있었다.
당장 카이 황의 동생인 카이 후이만 해도 상하이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집안의 일을 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사실상 독립했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집사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집안일을 관리했다면 지금은 재산과 평판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셈이죠."
카이 황이 말했다.
"아저씨도 참···."
리안은 카이 황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일은 할 만하세요?"
리안이 물었다.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어차피 류오린에서 했던 일과 별다른 것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설사 문제가 있어도 해야지요. 가문에 좋은 기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예. 에드릭 팀장은 지금까지 행동을 봤을 때 외부에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습니다. 저나 리안 도련님을 W&R의 얼굴로 내세우려고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 생각에는 에드릭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도이치뱅크의 에디 미첼과의 거래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둘의 거래는 도이치뱅크로서는 배임이나 횡령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잘은 모르지만 저는 AAM의 최초 투자금이 도이치뱅크에서 횡령한 자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W&R의 투자금까지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죠."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횡령이 사실이고 그 사실을 도이치뱅크에서 알게 되면 소송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횡령이라면 W&R의 투자금은 뿌리까지 올라가면 에디 미첼과의 수상한 거래를 통해 얻은 범죄이익이 종잣돈이니까요. 다만 저는 그건 지나친 기우라고 생각합니다."
카이 황의 말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뭐···. 이런 사실을 다 밝혀내려면 류오린의 투자를 다 조사해야 하는데 천하의 도이치뱅크라도 불가능한 일이죠. 류오린을 조사하는 것은 곧 중국 지도부를 적으로 돌리는 일일까요. 홍콩에 있는 이상 류오린을 조사할 방법도 없고요."
"에드릭 팀장도 알지만 조심하는 거겠죠. 우리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나쁜 선택은 아니니까요."
지금의 성장 속도라면 W&R은 몇 년 안에 홍콩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체에서 손꼽는 투자회사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됐을 때 미국인인 에드릭을 내세우는 것보다 홍콩인인 카이 황과 리안을 내세우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홍콩 경제의 주도권은 홍콩 반환과 함께 영국계 회사에서 홍콩회사들로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흐름이기도 했지만, 상당 부분은 중국 본토의 생각이 들어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은 제가 회사의 얼굴이지만 내년에는 리안 도련님이 W&R의 얼굴이 되겠죠. 그렇게 되면 가문이 홍콩에서 부활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가문이 중국 본토를 장악하고 있는 상하이방의 눈에 벗어나면서 받은 가장 큰 타격은 재산상의 손실이 아니었다.
사실 재산 손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홍콩 부동산 가격이 내려가면서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그건 다른 홍콩 갑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큰 손실은 지도부와 갈등이 드러나면서 홍콩 내 영향력이 줄어든 것이었다.
중국 본토의 발전으로 회복되는 홍콩 발전에 참여할 기회를 잃었다.
"그래 봐야 저나 아저씨가 가지게 될 지분을 합쳐도 13%에 불과해요. W&R이 아무리 커져도 13%라는 지분에서 더 얻을 방법은 없어요. 회사의 얼굴은 말 그대로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리안도 W&R의 13% 지분이 미래가치까지 생각하면 엄청난 가치가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겨우 몇천만 달러 수준이지만 당장 내년만 돼도 그 가치는 몇 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쉬운 점은 있었다.
13%의 지분은 에드릭이 가진 87%에 지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사실이 리안은 아쉬웠다.
지금 리안이 그나마 에드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에드릭이 가지지 못한 장점을 리안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에드릭보다 주식이나 선물 거래에서 뛰어났고 류오린의 대주주라는 지위로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내년이 되면 에드릭의 명령에 따르는 고용인에 불과했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상하 관계가 되는 셈이었다.
그 점이 리안은 아쉬웠다.
"껍데기에 불과하더라도 에드릭 팀장의 계획대로라면 W&R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리안 도련님이나 가문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겠죠. 그렇게만 되면 예전 가문의 영향력을 되찾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도련님은 에드릭 팀장이 언제까지 홍콩에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아저씨는 에드릭이 홍콩을 떠나리라 생각하시는군요."
"예. 홍콩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에드릭 팀장은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미국이 그의 고향입니다. 홍콩이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이기는 하지만 세계금융의 중심지인 월가는 아니죠. 에드릭 팀장이 미국에 간다고 수익률이 떨어질까요? 당장 내년에 가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에드릭 팀장은 미국으로 떠날 사람입니다. 그러면···. 홍콩 W&R의 주인은 바로 도련님이 되는 것입니다."
카이 황의 말에 리안은 순간 울컥했다.
리안도 카이 황의 말처럼 리안이 언젠가는 홍콩을 떠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카이 황의 말대로 리안이 홍콩 금융계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미래가 온다는 것은 리안도 에드릭에 필요가 없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리안에게 에드릭은 처음으로 열등감을 느끼게 한 사람이지만 계속 함께 가고 싶은 친구였다.
그런 식으로 뒤에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았다.
@@@
"헉···. 헉"
유타는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언제 경찰과 이나가와카이가 자신을 따라잡을지 몰랐다.
경찰에 잡히는 것도 문제지만 이나가와카이 잡히면 죽은 목숨이었다.
오해라고 주장해봐야 들어줄 리가 없었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단지 이나가와카이만이 아니었다.
이미 누군가 자신의 목에 백만 엔을 걸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미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두 명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경찰에 체포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한데 무사히 몸을 숨긴 것인지 아니면 잡혀서 바다에 가라앉은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단지 자신의 전화를 피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화가 나는 것은 도대체 누가 자신을 함정에 빠트렸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몇 달 전 자신을 찾아와 파업을 사주했던 다이키라는 자였다.
다이키라는 자는 일을 시키고 잔금도 주지 않고 종적을 감췄다.
물론 이미 받은 돈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당연히 유타는 남은 잔금을 받으려고 시도했다.
가장 먼저 잔금을 추궁한 자는 바로 다이키라는 자가 소개를 받았다고 한 사람이었다.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수슈미였다.
뒤에 이나가와카이가 있고 수상한 배후도 있다는 소문 있었지만, 유타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미친개 유타라고 불리는 데는 이렇게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는 평판 때문이었다.
찾아간 수슈미는 자신은 다이키라는 자를 알지도 못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유타는 다이키라는 자에 대한 인상착의를 이야기할 때 수슈미가 뭔가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수슈미가 다이키라는 자를 아는 것이 분명했다.
유타는 계속 밀어붙였지만, 수슈미는 무슨 이유에선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나가와가이를 배후에 둔 수슈미를 더는 압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고향에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찾아와 다이키에 대해 물었다.
다이키의 인상착의를 말해주자 상대는 꽤 두둑한 대가를 지급했다.
수슈미에게서 남은 잔금을 받아내지는 못했지만, 정기적으로 짭짤한 의뢰를 넘겨받았다.
일하려고 도쿄까지 나와야 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지만 이런 불황에 그런 불평을 하는 것은 사치였다.
그리고 그렇게 어제···.
도쿄로 와서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던 유타는 경찰들의 습격을 받았다.
유타는 겨우 체포를 따돌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알만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경찰이었다.
-유타? 이 미친 새끼! 너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뭔 말이야? 도대체 경찰이 왜 나를 쫓는 거야?"
경찰이 자신을 쫓을 이유는 많았다.
살아오면서 지은 죄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지간한 일이면 미리 연락을 왔을 것이다.
-너, 도대체 도쿄의 수슈미는 왜 죽인 거야? 조직에 속해있지만 이나가와카이 중간보스와 사카즈키고토(盃事)을 나눈 사이라는 것 알잖아. 무슨 생각으로 죽인 거야?
사카즈키고토는 야쿠자들이 서로 형제나 충성을 맹세하며 술을 나눠 마시고 그 잔을 나눠 가지는 의식이었다.
즉 도쿄의 수슈미는 이나가와카이 중간보스와 의형제 사이였다.
이나가와카이로서는 체면 때문에라도 수슈미의 죽음에 가만있을 수 없다는 의미였다.
"무슨 소리야? 내가 수슈미를 왜 죽여? 나에게 빚이 있는 사람인데···? 이번에 도쿄에 갔던 것도···."
-나한테까지 거짓말을 하는 거야? 그러려면 현장에 지문이나 남겨놓지 말든지. 지금 경찰은 물론이고 이나가와카이가 너를 쫓겨 있으니 각오해야 할 거야. 그리고 다음부터는 전화하지마. 이번까지는 그동안의 의리를 생각해서 받아준 거니까.
"뭔 말···."
유타가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른 곳에도 전화를 걸어봤지만 비슷한 말들뿐이었다.
더 알아낸 것이라는 수슈미가 칼에 찔려 죽었고 그 칼에서 자신의 지문이 발견됐다는 것 정도였다.
수슈미가 죽던 날 자신과 만났다는 증인이나 평소 자신이 수슈미에게 협박성 전화를 했다는 증언까지 합치니···.
완벽하게 함정에 빠진 셈이었다.
수슈미에게 받은 의뢰를 처리하느라 유타는 정확한 알리바이마저 없었다.
유타가 다시 도쿄로 돌아온 것은 바로 그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자신이 수슈미의 부탁을 받아 폭력을 행사하고 협박했던 상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수슈미의 살인범이 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금은 재수가 없으려는지 목표를 만나기 위해 가는 중간에 검문에 걸려서 도망치는 중이었다.
겨우 숨을 돌리던 유타는 어디선가 들리는 사이렌 소리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도망가야 할 순간이었다.
막 골목을 돌아 나오던 유타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에 치였다.
차에서 거구의 사내가 내렸다.
사내의 체격이 자신보다 크지만 저런 체격에 겁을 먹을 유타가 아니었다.
"너, 이 새끼 골목에서 차를 이렇게 몰면···."
자신에게 다가온 사내에게 항의하려던 유타는 사내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너, 혹시···. 혹시 이게 다 네 놈 짓이냐?"
"역시 바로 알아보시네요. 다른 두 분은 앞에 알아보지 못하시던데···."
갑작스러운 충격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는 유타의 귀에 사내의 말소리가 들렸다.
이런 죄송합니다. 일단 제 차에 타시죠. 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