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결혼식은 다른 결혼식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나는 차에 앉아서 옆자리에 있는 유타를 슬쩍 바라보았다.
네 번째로 살인을 한 직후였다.
처음 왕 웬준을 죽였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나를 먼저 죽이려는 했다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정당방위였다.
하지만 이틀 전 수슈미를 죽였을 때는 약간의 마음의 가책 같은 것이 있었다.
수슈미가 쓰레기이기는 했지만, CIA의 협조하는 정보원이었다.
나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
오히려 나에게는 협조적이었다.
유타는 죽인 지금은 또 달랐다.
앞선 살인 세 번은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고 단번에 죽였다.
죽이기 전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유타를 죽이기 전에는 그와 긴 대화를 나눴다.
물론 내 일방적인 질문에 유타가 대답하는 형식이었지만 말이다.
고문까지 해야만 했다.
나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이야기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유타가 나에 대해 한 이야기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수슈미라는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슈미를 협박해서 따로 돈을 받기 위한 행동이라고는 하지만 나로서는 다행이었다.
차에 치이고도 나를 바로 알아본 유타와는 달리 사무실의 다른 두 놈은 내 얼굴을 보고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유타 정도의 눈썰미는 없는 자들이었다.
운이 좋았다.
그놈 둘에게나 나에게나···.
나는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기름을 꺼내 붓고는 불을 붙였다.
유타는 내 얼굴과 내가 수슈미를 통해 자신을 소개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수슈미를 조사하다 보면 그가 CIA의 정보원이라는 사실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내가 죽을 결심을 한 것은 정보기관이라는 곳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를 요 며칠 사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첩보원의 세계는 정상적인 생각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였다.
CIA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기관이었다.
그게 설사 일국의 왕가라도 말이다.
CIA도 이런 데 중국의 정보기관은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확실히 하는 것이 좋았다.
불에 타는 자동차를 보며 문득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나는 담배는 한 번도 피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다음 날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며 돌아가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며칠 전까지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이반 부카드는 나에게 자카르타에서 유수프 칼라를 만나 그를 설득하라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실적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유수프 칼라는 너무 거물이었다.
내가 거절하자 이반 부카드는 다시 제안하지는 않았다.
마치 내가 거절하는 이유를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바로 이틀 후 메가와티 부통령이 직접 와히드 대통령 탄핵 개시 투표를 주장하고 나섰다.
따로 사람을 보내 유수프 칼라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듯했다.
이반 부카드가 직접 설득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투표만 보고 홍콩에 돌아가려고 준비하던 나는 메일을 통해 CIA 본부에서 추가 지시를 받았다.
메일을 읽기 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필리핀에 관한 내용은 아니었다.
지시 내용은 다음 달 말까지 네팔 정치 상황과 향후 영향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시였다.
이상한 지시였다.
지금까지 이렇게 보고서를 내기까지 시간 여유가 있는 지시가 내려온 적이 없었다.
더구나 네팔이라니?
지금까지 남중국해 인근 나라를 벗어난 국가를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곧바로 네팔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조사했던 다른 나라들과 네팔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국가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현재 네팔을 지배하고 있는 네팔의 국왕은 쫓겨난 에스트라다나 와히드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바로 대중에게 인기가 있고 친 중국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는 공통점이었다.
정확히는 친 중국적인 마오쩌둥 반군과의 평화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왕과 선거로 당선되는 대통령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은 탄핵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만 국왕은 그런 식으로 바꿀 수가 없었다.
있다면 한가지···.
군사쿠데타뿐이었다.
하지만 네팔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리라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네팔의 군대는 왕가에 꽤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CIA가 네팔에서 뭔가를 꾸미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인도네시아 국회에서 투표가 벌어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일본으로 향했다.
바로 수슈미와 유타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수슈미는 내가 CIA의 요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타는 내 얼굴과 내가 홍콩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슈미는 CIA 정보원이었고 유타는 중국 정보당국에 내 행적을 넘긴 적이 있었다.
하나는 큰 위험이 없지만, 그 하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을 찾으면 나에게 연결된다.
CIA나 중국 정보당국이 나를 추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필요해서 둘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요원들의 착각으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일이 귀찮기는 했지만···.
사실 그렇게 기분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귀찮기는 하지만 그건 내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증명이기도 했다.
아니 한 나라의 대통령을 탄핵에 큰 역할을 하는 일이었다.
이런 중요한 일을 하는 데 성취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돈은 이미 충분히 벌었다.
사실 지금 내가 가진 재산으로도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CIA 요원이라는 한계 때문에 정체를 숨겨야 하는 처지였다.
나 정도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받는 그런 존경이나 부러움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조금 있었다.
CIA 활동은 이런 아쉬움을 120% 이상 만회하고도 남았다.
그렇지만 네팔에 대한 조사 지시를 받고 난 이후의 찜찜함은 이런 기분을 단숨에 날려 버렸다.
내가 몸담은 CIA와 정보 세계의 어두운 면을 보는 것 같았다.
다른 요원들처럼 투철한 애국심이 있다면 이런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애국심이 높은 시민은 아니었다.
네팔에 대한 지시를 받는 순간 지금까지도 조심했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슈미와 유타 제거는 그 시작이었다.
홍콩에 돌아온 다음 날 출근해서 팀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 참석자는 나와 리안 그리고 브레이크 세 사람이었다.
카이 황 한 사람 빠진 것뿐인데 굉장히 다른 느낌이 들었다.
"회의 시작하죠. 리안 씨가 먼저 보고해 주세요."
나는 투자 결과 보고를 리안에게 맡겼다.
부팀장으로서 리안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였다.
예전에는 필요 없던 조치였다.
네 사람이었고 그때는 카이 황이 워낙 리안을 떠받들었다.
자연스럽게 리안이 팀에서 나 다음이라는 사실이 끊임없이 확인되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팀원이라고 해봐야 사무직원인 카렌을 제외하면 나를 포함 세 명이었다.
나는 자주 자리를 비웠다.
리안은 그렇게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성격이었다.
리안과 브레이크가 비슷한 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팀의 서열이 무너질 가능성이 컸다.
"지난주 투자 성과는 나스닥, 닛케이, 코스피에 각각 1억 달러, 이천사백만 달러, 이천사백만 달러를 투자했고 각각 -3.2%, -4.1%, 그리고 0.8 내리거나 올랐습니다. 레버리지를 100% 사용했기 때문에 실제 수익률은 2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천만 달러를 투자한 인도네시아의 경우 7.4%가 올랐습니다."
인도네시아 투자 수익률을 이야기한 리안이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인도네시아에 투자하자고 내가 이야기했을 때, 리안 자신이 반대했던 일이 생각난 듯했다.
잠시 멈췄던 리안이 다시 발표를 이어갔다.
"그리고 브레이크 씨가 맡은 러시아의 경우 주식시장이 -1.1 떨어졌습니다. 포지션은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에 2.2% 정도의 수익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리안이 지난주 투자 수익 발표를 마쳤다.
"시간이 없으니 다음 주 투자 방향도 바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다음 주 나스닥은 상승 포지션을 잡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리안과 브레이크 두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정보라도 있습니까? 경제지표가 여전히 나쁜데 한 주 정도는 더 하락 포지션을 잡는 게 좋지 않을까요?"
리안이 물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어제 미국 실업률이 하락했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일 연준의 그린스펀 의장이 국회에 나가서 의원들의 질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그린스펀 의장의 행적을 봤을 때 뭔가 긍정적인 시장 개입을 시사할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 주식시장에 관한 한 그린스펀이라는 이름은 마법의 단어였다.
"그럼 닛케이와 코스닥도 상승 포지션을 잡는 것입니까?"
리안이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미국 부시 행정부에서 곧 철강 불공정 거래에 대한 조사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일본과 한국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제가 오다가 일본에 들러서 왔는데 일본은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당 내 파벌 싸움이 극에 달한 느낌입니다. 아무래도 증시에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습니다."
"그럼 일단 닛케이는 하락 포지션을 잡는다는 말이군요? 코스피는요?"
"마찬가지입니다. 철강 불공정 거래 조사가 시작되면 한국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미국의 증시는 괜찮을 것 같지만 다른 아시아 주가가 하락하면 아무래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잡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벌어들인 돈은 대만에 투자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시아 증시 중에서 나스닥 증시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금융시장은 뭐니 뭐니 해도 대만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리안이 대답했다.
시선을 브레이크에게 돌렸다.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평소 미국과 아시아 증시에 대한 투자를 보고 러시아 투자를 결정했다.
미국과 일본과 한국에 대한 투자 방향이 전혀 반대이다 보니 상승과 하락 어느 쪽을 택할지 혼란이 온 표정이었다.
나는 그에게 힌트를 주기로 했다.
"러시아는 아무래도 아시아보다는 미국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클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 그래도 혹시 모르니 러시아에만 하지 투자하지 말고 다른 곳과 분산투자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브레이크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회의를 마치죠. 모두 또 한 주 수고해 주십시오."
나는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카이 황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이번 홍콩 증시는 하락 포지션을 잡아 주십시오. 전체적으로 아시아 증시 전망이 좋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회계 쪽으로 뛰어난 사람 있으면 한 명만 구해주십시오.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요."
-회계요?
"예. 투자하는 곳이 점점 늘어나고 거래할 때 계좌를 여러 개 이용하다 보니 정리해 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팀에 사람도 새로 구해야 하고요."
-음···. 알겠습니다. 적당한 사람이 있기는 한데···. 리안 도련님이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팀장은 접니다. 일단 구해주십시오."
내가 말했다.
리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정말 리안과 사이가 나쁜 사람이라면 카이 황이 말을 꺼냈을 리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빠르면 보름에서 늦으면 한 달 정도는 걸릴 것 같습니다.
"능력만 괜찮다면 그 정도는 기다려야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놀고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리안 도련님은···.
"제가 이야기하겠습니다. 카이 황 씨는 제가 사람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비밀로 해 주세요."
나는 비밀을 지켜달라고 함으로써 카이 황이 리안에게 받을 추궁에서 할 변명할 거리를 마련해주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홍콩에 돌아와 며칠 동안 나는 네팔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의외로 군사적인 면에서 네팔이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팔은 중국과 인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중국의 서진을 막는 전초기지나 다름없었다.
홍콩에 돌아온 사흘 후···.
아침에 일어나 TV를 켜니 뉴스에서는 온통 네팔 왕가의 비극에 대해 나오고 있었다.
어젯밤 네팔의 왕세자가 국왕을 포함한 네팔 왕족 12명을 총으로 학살하고 본인은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뉴스였다.
뉴스를 보는 순간 CIA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내가 몸담은 CIA가 저런 짓까지 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그나마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CIA가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인권을 무시하기로 유명한 중국의 정보기관은 어떻겠는가?
새삼 수슈미와 유타를 처리한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