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악마는 악인을 돕는다.
네팔 왕가의 참극 이후···.
나는 한동안 회사에 나와서도 그 사건에 관한 기사만을 찾아보았다.
CIA가 진짜로 이 일에 개입되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외신을 통해서 자세한 진행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왕가를 학살한 디펜드라 왕세자, 아니 아버지가 죽이고 국왕이 된 디펜드라 국왕은 3일 후에 사망했다.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이기는 했지만, 왕실법에 따라 디펜드라 왕세자는 국왕으로 사망했다.
디펜드라가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과 숙부들을 죽인 이유는 어이가 없게도 왕가에서 디펜드라의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끔찍한 일을 벌였다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운 이유였다.
국왕을 자리를 계승한 것은 선대왕인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이자 디펜드라 국왕의 삼촌인 갸넨드라 왕세제였다.
갸넨드라 신임 국왕에 대해 네팔 내 평가는 별로 좋지 않았다.
네팔 샤 왕가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명군으로 평가받은 비렌드라 국왕과는 달리 국민 사이에 인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은 죽은 디펜드라 국왕보다 더 인기가 없었다.
네팔 왕가의 비극에서 다른 비렌드라 국왕의 남동생이 죽지 않았다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였다.
갸넨드라 국왕이 비극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학살이 벌어지는 현장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학살 현장에 있었던 갸넨드라 신임 국왕의 부인과 아들은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목숨을 건졌다.
이 문제로 네팔 내에서는 각종 음모론이 나오고 있었다.
바로 갸넨드라 신임 국왕이 비극의 배후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여기에 더 나아가 갸넨드라 신임 국왕의 배후에 CIA가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예전에도 CIA가 정의의 조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CIA에게 정의가 있다면 그건 CIA와 미국의 이익이었다.
CIA는 70년대 이전의 많은 군사 쿠데타를 배후에서 사주하고 독재자들을 후원한 역사가 있었다.
심지어 지금도 아프리카의 독재자들 배후에는 CIA, 정확하게는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
그렇지만 왕세자를 어떤 식으로든 움직여서 국왕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을 학살하게 만드는 것은 도가 지나친 일이었다.
아무리 네팔이 약소국이고 중국의 팽창을 막기 위한 이유라고는 하지만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었다.
어쩌면 CIA가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닌지도 몰랐다.
지구 어딘가에서는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을 개인의 욕심이나 국가나 조직의 목적을 위해 수천 년 전부터 벌여왔고 앞으로도 벌일 것이다.
내가 CIA의 요원이 아니라면, 그리고 CIA를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는 CIA의 요원이었고 CIA를 내 목적을 위해서 그만두려고 하고 있었다.
CIA가 목적을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조직이라면···.
나는 더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나에 대해 알게 된다면 나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이건 단순히 내가 가진 돈이나 그런 돈을 단기간에 벌어들인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진 돈이나 능력이 아니더라도 홍콩 그리고 류오린에 머무는 나는 그들에게 쓸만한 도구였다.
홍콩은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중국 내부에 접근하는데 이보다 좋은 장소가 없었다.
류오린은 또 어떤가?
바로 중국 지도부에게 비자금이 들어가서 나가는 곳이었다.
상대방의 심장을 움켜쥐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에디 미첼이 나를 류오린에 보낸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단지 자금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유럽이나 미국은 금융감시기관의 감시 때문에 내부자 거래를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를 굳이 홍콩에 그것도 류오린에 보낼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투자 실수를 감추기 위한 목적 만이라면 말이다.
에디 미첼이 죽은 이상 진짜 그런 목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아마 그런 의도였다고 해도···.
팀장이자 에디 미첼에게 나를 소개했던 존 베비스는 모르는 일이라는 부분이었다.
적어도 지난번에 존 베비스를 만났을 때 느낌으로는 그랬다.
"에드릭!"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안이었다.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기에 불러도 대답을 안 해?"
리안이 물었다.
"미안, 뭐 좀 보느라고···."
"뭘 보는 거야?"
리안이 고개를 숙여 내가 보고 있던 모니터를 살폈다.
"네팔 왕가 학살 사건. 뭘 이런 걸 보고 있어?"
"그냥. 충격적인 사건이잖아."
내가 말했다.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충격적인 사건이기는 하지. 하지만 넌 뭔가 주가에 큰 영향을 주는 뉴스만 보는 것 아니었어? 네팔 왕가가 다 죽고 입헌군주정이 무너진다고 해도 누가 신경을 쓰겠어?"
"뭐···. 그렇기는 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리안의 말대로였다.
지금이야 이렇게 세계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뉴스였다. 하지만 며칠만 지나도 아무도 네팔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네팔은 그 정도 국가에 불과했다.
아마 CIA가 관여됐다면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라도 CIA가 영국이나 일본의 왕가에서 이런 일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일에 CIA가 관여됐다면 네팔의 비극은 바로 국력이 약하다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CIA나 다른 정보기관에서 안전을 보장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는 말 그대로 세계가 하나로 연결하고 있었다.
정보화 사회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는 것은 정보, 그리고 돈이었다.
어쩌면 내 안전을 지킬 수 있는 길은 단순히 CIA를 떠나는 정도로는 부족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CIA가 나중에 나에 대해서 알아내더라도 나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여전히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자 리안이 어깨들 두드렸다.
"저 사건에 왜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거야?"
리안이 물었다.
"그냥 뭐···. 말한 것처럼 충격적인 사건이잖아."
"궁금하면 조사하면 되잖아."
"그렇기는 한데···."
정말 이번 일에 CIA가 관여됐는지 정확히 알아낼 필요는 있었다.
CIA에서 지시받은 보고서를 작성하려면 어차피 네팔을 조사할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금해도 네팔을 직접 가는 것은 좀···."
임무라고는 하지만 내가 네팔에 직접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충 기사와 구할 수 있는 정보로 보고서를 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것을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는데···."
리안이 이런 나를 보며 한심한 표정을 지었다.
"뭔 말을 하려고?"
"넌 돈을 버는 데는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번 돈을 쓸 줄을 모르는 것 같아서···."
리안이 말했다.
그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야? 그 표정은?"
"뭘 조사하는데 네가 왜 직접 가? 나는 네가 동남아시아를 매번 직접 가는 것도 잘 이해가 안 가더라."
"그건···."
리안의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다른 나라를 가는 것은 조사를 위해서 가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내가 백번 양보해서 비행기를 타면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는 그렇다고 해도···. 네팔 같은 오지를 조사한다는 말에 직접 가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이야. 일주일에 수천만 달러를 버는 놈이 네팔 같은 곳에 직접 가는 것이 말이 돼?"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네팔 같은 국가에 보낼 사람도 만만치 않고···."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리안이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 여기 홍콩에 사는 네팔인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리안이 물었다.
"글쎄···. 홍콩에 네팔인이 살아?"
홍콩과 네팔은 별로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다.
"홍콩에 사는 네팔인만 3만 명이야."
리안이 말했다.
"3만 명?"
나는 리안의 말에 깜짝 놀랐다.
눈이 저절로 크게 떠졌다.
"그렇게 많이 산다는 말이야?"
작년 홍콩 인구는 666만 명이었다.
물론 이건 거주인구일 뿐이었다.
관광객이나 불법 거주자까지 합치면 홍콩에는 훨씬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네팔인 3만 명이 홍콩에 사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구르카에 대해서는 알지?"
"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르카족은 대표적인 용병 부족이었다.
특히 대영제국이 적극적으로 이들을 용병으로 활용했다.
나는 문득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홍콩에도···."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지금은 영국에 재배치됐지만 1997년 전에는 구르카 부대가 홍콩에 주둔했었어. 보통은 근무를 끝내고 돌아가지만, 홍콩에 남거나 다시 돌아온 사람들도 있지. 네팔인 3만 명 대부분이 그런 사람들의 후예들이야. 구르카 용병도 개인적으로 근무하고 있고 말이야. 우리 가문 경호원 중에도 구르카 출신이 있어."
"그래? 너희 가문에도 있다고?"
"너도 봤을 텐데···. 전에 네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문을 열어줬던 호반(Hovan)이 구르카 출신이야."
나는 전에 리안의 집을 찾아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문을 열어준 사람이 기억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구르카 출신이라고? 중국인이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네팔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외모였다.
"맞아. 구르카 출신. 대부분 중국인이나 몽고인 한국인과 외모가 비슷하더라고."
"구르카 부대 출신?"
"그건 아니고 구르카 부대 출신에게 훈련을 받았지. 사람을 보내서 뽑아 온 거야. 꽤 오래전부터 경호원 중 일부를 그렇게 뽑고 있거든···."
"영국 구르카 부대에 들어가지 않고 개인적으로 고용됐다는 말이군."
"구르카에 들어가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고용되는 것이 돈이 더 되니까. 더 안전하고 말이야."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구르카가 타고난 전투 부족이라는 말을 듣지만, 그들이 좋아서 용병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구르카 부대에 들어가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훨씬 안전하고 더 많은 돈을 버는 일을 하는 선택하는 것은 당연했다.
"오늘 집에 가면 너희 집에 가서 한 번 만나봐야겠네."
그렇지 않아도 경호원을 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르카 용병이라면 꽤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겸사겸사 만나서 이야기해볼 생각이었다.
"네팔에 사람을 보내려면 굳이 만날 필요 없어. 예전 고용했던 구르카 경호원 중에는 홍콩에 남은 사람도 있지만, 고향에 돌아간 사람이 더 많으니까. 알아봐 줄까?"
리안이 물었다.
리안의 눈빛에서 장난기가 흘러나왔다.
어딘지 부탁을 하면 뭔가 나에게 다른 일을 시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 됐어. 너 어차피 카이 황 씨에게 말할 거잖아. 내가 직접 말할게."
내가 말했다.
내 말에 리안이 어딘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넌 무슨 말을 해도···."
"그럼 아니야?"
"아니 뭐···. 내가 연락처를 몰라서 그런 것이지. 나도 예전 경호원과 친했거든···. 내 부탁이라면 다른 일을 하다가도 열심히 조사할 사람들이야."
리안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연락처 아는 카이 황 씨에게 전화를 걸겠다고. 일 때문에 어차피 전화할 일도 있고 말이야."
"하여간···. 도와주고도 뺨을 맞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겠네. 카이 황 아저씨에게 이야기해서 도와주지 말라고 할까 보다."
리안과 친해진 것은 좋은 데 너무 거리가 없어졌다.
카이 황 말로는 가족이 모두 캐나다로 이민을 하고 난 이후 칩거 아닌 칩거를 하다가 나를 친구를 사귀게 되어서 그렇다는데···.
솔직히 조금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소리 하지 말고 가서 일이나 하세요."
나는 리안을 외면하고 전화기를 들었다.
"에드릭입니다!"
귓가에 리안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