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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슈퍼리치 되다-90화 (91/270)

서몽

#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말로 하는 경고보다 낫다.

필리핀 술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조엘이 아니라 CIA 필리핀 지부장이었다.

"엘만이라고 하네."

40대 중년 사내가 인사를 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

"수이진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에이전트 에스 소속입니다."

내 말에 엘만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불빛에 엘만의 머리가 반짝였다.

"수이진? 조엘에게 들었던 이름과는 다른데···."

"이름은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름입니다."

내 말에 엘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기야 하지. 지난번에 왔을 때 조엘 요원이 좀 무리한 요구를 했었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만 그때는 제가 인도네시아에서 남은 일이 있어서요."

"인도네시아에서의 일 말이군. 인도네시아 지부의 이반 부카드 요원에게서 자네가 대단한 활약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메가와티 부통령이 와히드 대통령에 대한 탄핵에 앞장서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이반 부카드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수이진이라는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처음 들었다는 표정을 짓는 것만 봐서도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이반 부카드 요원께서 제 공을 과대 포장하셨나 보네요. 저는 인도네시아 지부에서 해놓은 일에 약간 도운 것뿐입니다. 일종의 양념을 친 것뿐이죠."

"중국에서는 그걸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고 부른다던가? 어쨌든 이반 부카드 요원의 말대로군. 자네나 에이전트 에스팀은 공을 세우는 데 욕심이 없나 보네."

"한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사실대로 드린 이야기인데···."

나는 말을 살짝 흐렸다.

미군기지가 철수된 이후 필리핀이 미국이나 CIA에서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엘만은 내가 아시아에 와서 처음 만나는 지부장급 인물이었다.

몇 달 동안 많은 일을 했지만 만난 CIA 요원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사무관급이었다.

지부장 같은 간부를 만나는 일은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이반 부카드가 했던 이야기와 정말 똑같군. 자신이 한 일이 없다고 우긴다더니···. 좋네. 나도 같은 말을 하지.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 나도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그래도 되겠나?"

엘만 지부장이 물었다.

"말씀하십시오."

나는 조금 긴장했다.

이반 부카드처럼 엘만도 나름대로 현장 경험이 많은 베테랑 작전 요원 출신인 것처럼 보였다.

현재 남아있는 중년의 작전 요원들은···.

냉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소련이 붕괴하는 것을 본 자들이었다.

하나하나가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좋네. 말하지. 우선 묻겠네. 여기 필리핀 상황은 알고 있겠지?"

"예. 오기 전에 대충 조사했습니다."

"외부에 알려진 것과 거의 비슷한 상황이네. 이미 처음 납치되었던 미국인 인질 세 명 중 한 명이 참수된 상태로 발견되었네. 나머지 두 명은 지금 어디 있는지 행방을 알 수 없고 말이야. 그 둘만 따로 데려갔다는 정보를 보면 살아 있을 가능성이 크네. 이용가치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현재 이슬람 반군 중 일부가 병원 하나를 장악한 채 지금까지 납치한 나머지 인질들을 데리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네."

엘만 지부장이 대강의 상황을 알려 주었다.

내가 기사나 사람을 통해 알아본 것과 거의 일치하는 상황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인 인질 두 명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정도였다.

"정확히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인질 구출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입니까?"

나는 본부에서 나를 정확히는 에이전트 에스를 필리핀에 투입한 것이 인질 구출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질 구출을 위해서라면 특수부대를 불렀지 에이전트 에스를 부를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에이전트 에스가 정확히는 내가 한 일은 인질 구출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정보를 모으고 그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목표를 정치적으로 제거하는 일이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지금까지 내가 한 일은 정치인들이나 선거 참모들이 하는 일이 가까웠다.

심지어 지난번 조엘의 요구를 협상이나 인질 구출은 팀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고 거절한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인질에 관한 일로 부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것이라···.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인질은 구출해야겠지. 하지만 이슬람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캠프로 이동한 인질을 단시간에 구출하는 것은 어렵네. 내가 아니 위에서 원하는 것은 이슬람 반군이 미국인을 해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네."

"복수군요."

"복수라기보다는 응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자네도 알겠지만 이번에 새로 취임한 대통령께서는 강한 미국을 원하고 계시네. 새로운 정부는 테러에 관한 한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 즉 무관용이 원칙(無寬容 原則)이지."

테러에 대한 무관용 원칙이란 쉽게 말해서 테러와 타협하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것을 말한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범인 티머시 맥베이에 대한 공개처형을 명령한 일 아닙니까."

미국은 세계적으로 사형집행이 아주 많은 나라 중 하나이기는 했다.

1999년 98건으로 100건에 가까운 사형이 집행되었다.

얼핏 보기에는 티머시 맥베이에 대한 처형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아주 달랐다.

"티머시 맥베이에 대한 공개처형은 1936년 이후 65년 만이었지. 더구나 대부분의 사형집행이 주 정부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었고 말이야. 연방정부가 가두고 있는 죄수가 사형에 처한 것은 티머시 맥베이가 35년 만이고 말이야."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티머시 맥베이에 대한 사형집행 결정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일 아닙니까? 티머시 맥베이보다 먼저 사형선고를 받고도 아직 집행되지 않는 사형수가 수천 명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티머시 맥베이는 선고확정 이후 단 4년 만에 사형집행이 결정되었죠."

"그 문제로 본국에서 여러 가지 말이 있었다고 하더군. 일부 사형집행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항의집회도 있었고 말이야."

증거에 대한 문제로 사형집행이 미뤄지기는 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사형집행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결국, 며칠 전인 6월 11일에 티머시 맥베이에 대한 사형집행이 실행되었죠."

엘만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티머시 맥베이에 대한 공개사형집행은 부시 행정부가 테러범에 대해 단호한 응징을 하겠다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어. 실제 티머시 맥베이와 비슷하게 1998년에 미국 대사관에 대한 폭탄 공격을 가했던 알카에다의 수장인 빈 라덴을 추격해서 체포하겠다는 발표하기도 했고 말이야."

"그런데 티머시 맥베이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기 얼마 전에 미국인에 대한 납치라는 테러가 일어난 것이군요."

"맞아. 이런 상황에서 지금 정부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필리핀 이슬람 반군에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고 싶어 하네."

말 그대로 일종의 응징이자 정치였다.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맞네. 예전처럼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필리핀 내 여전한 반미 감정을 생각하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할 수도 없고 말이야. 아무리 아로요 대통령이 미국과 가깝다고는 하지만 섣불리 대규모 파병을 허락할 리가 없네. 그렇다고 소수의 정예부대를 파견해봐야 필리핀 밀림에서 적의 기지를 찾아내서 원하는 성과를 얻기도 어렵고 말이야. 그래서 자네를 부른 것이네."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말을 마친 엘만 지부장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확히 원하시는 것이 뭡니까? 그걸 알아야 제가 방법을 찾아도 찾지 않겠습니까? 인질들의 구출은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슬람 반군에 대한 보복? 백악관의 체면? 아니면 필리핀에서의 미국 영향력 확대?"

나는 엘만 지부장의 얼굴을 보며 되물었다.

"세 가지 모두 만족하는 방법이면 가장 최선이겠지. 하지만 CIA로서 우선시해야 할 것은 세 번째나 두 번째가 아니겠나? 어때 가능하겠나?"

엘만 지부장은 이슬람 반군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백악관의 체면과 필리핀에서의 미국 영향력 확대를 목표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목표는 바로 마지막이었다.

필리핀 내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확대···.

결국에는 필리핀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해서 중국을 압박하려는 목적이었다.

"세 가지 모두를 만족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엘만 지부장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세 가지 모두를 만족하는 방법이 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여 입을 열었다.

"예. 다만 추가 희생이 따를 수도 있는 데 괜찮겠습니까?"

"추가 희생이라면? 어떤 희생을 말하는 것인가?"

엘만 지부장이 되물었다.

"현재 인질극이 벌어지는 병원에서 큰 희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납치가 한동안 계속될 수도 있고요."

"난 또 뭐라고···. 말한 것처럼 납치된 미국인 두 명은 이미 그곳에 없네. 그럼 죽어도 필리핀군과 반군이 교전을 벌이다가 죽는 것인데?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엘만 지부장이 딱 잘라 말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납치된 자국민 두 명이 모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미국인의 희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말 그대로 어쩔 수 없겠지. 최대한 추가 희생을 막는 노력도 기울여야 하겠지만 말이야."

냉정한 대답이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이슬람 반군에게 은밀하게 정보를 전해줄 사람을 찾아주십시오."

"그건 어렵지 않네. 필리핀 정치인들과 군 간부 중에 평소에 그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자들을 파악해 놓고 있네."

역시 아니었다.

엘만 지부장은 이슬람 반군과 연결된 필리핀 정치인과 군 간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마 CIA 필리핀 지부에서 관리하는 필리핀 정보원 중에는 이슬람 반군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이슬람 반군과 협조하는 자 중에서 CIA의 지시를 받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건 정보공작의 기본이었다.

CIA가 필리핀에 신분을 위장한 스파이를 두고 있을 가능성은 적었다.

필리핀은 미국에 그 정도로 중요한 국가가 아니었다.

필리핀 현지인을 돈이든 아니면 미국의 후원 같은 방법으로 포섭해서 첩보 활동이나 정보수집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리코를 돈으로 포섭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그 선을 통해서 이슬람 반군 쪽에 병원 인질 구출 작전이나 방어계획을 알아내서 넘겨주십시오."

내가 말했다.

내 말에 엘만 지부장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심인가? 이슬람 반군에게 인질 구출 작전 정보를 넘겨주라고?"

"진심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필리핀군의 구출 작전이 실패하고 사상자가 커지겠죠. 지난번 구출 작전에서처럼요."

"그다음은?"

엘만 지부장이 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내 생각을 어느 정도는 읽은 것처럼 보였다.

"언론사를 동원해서 필리핀군의 무능을 널리 알려야죠. 이대로는 안 된다. 언제까지 이슬람 반군에게 농락당할 것이냐? 이런 여론을 확산시키는 것입니다. 뭐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필리핀군이 무능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미군기지를 다시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그렇겠지. 미군기지가 철수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미군기지 설치를 허용하겠습니까? 엄청난 경제적 손해를 감수하고 한 일인데요···. 하지만 다른 일은 가능하겠죠. 미군의 파병 같은 것이요."

"필리핀 국민 여론이 미국의 파병을 받아들이지도 않겠지만···. 더 큰 문제는 미국 내 여론과 의회네. 아무리 참수형을 당한 일로 미국 내 여론이 좋지 않지만···. 이런 일로 의회가 미군의 파병을 허락할 리가 없어 보이는데?"

"그렇겠죠. 파병된 미군이 직접 이슬람 반군을 싸운다면요."

아직 미국 내에는 베트남전의 악몽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무리 반군이라고 해도 베트남과 가까운 동남아시아에 전투병력 파견이 의회에서 통과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굳이 미군이 이슬람 반군과 직접 싸울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목표는 다 합쳐도 천명도 안 되는 한 줌의 이슬람 반군이 아니라 중국의 견제 아닙니까?"

"전투병력이 아니라면···."

"교관이죠. 필리핀군의 정예화를 도와줄 부대라면 필리핀 여론은 물론이고 미국의 의회도 큰 반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투병력이 아니니까요. 필리핀군을 훈련시킨다면 이슬람 반군은 물론이고 중국을 견제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테고요."

내가 말했다.

엘만 지부장은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이슬람 반군의 반발이 만만치 않겠군."

구출 작전을 벌였다고 인질을 그것도 미국인을 살해한 자들이었다.

미군이 필리핀군을 훈련시킨다면 당연히 반발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인질 두 분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주변국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테고 말이야."

엘만 지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나라보다 중국과 베트남이 반발하겠죠. 하지만 경제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두 나라가 집권 초반의 미국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을 끝까지 반대할 수 있을까요? 명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두 나라가 반대하면 어떻습니까? 밀어붙이면 그만이죠. 우리는 미합중국 아닙니까?"

"한번 해보세!"

엘만 지부장은 그 후로 인질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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