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질투는 증오보다 훨씬 뿌리가 깊다.
엘반 지부장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본부에 연락해서 허가를 받았다.
그 후 엘만 지부장이 가져온 첩보를 토대로 세부적인 작전을 세웠다.
부족한 특수전 분야에 대한 지식은 엘만 지부장의 도움을 받았다.
엘만 지부장은 내 생각처럼 베테랑 작전 요원이었다.
특히 중동 전문가였다.
엘만 지부장은 자신이 참여한 작전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전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가 90년대 이라크 전쟁에도 참여했다는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어쨌든 우리의 계획 핵심은 최대한 필리핀군의 피해를 키우는 일이었다.
필리핀군의 피해가 크면 클수록 미국과 필리핀 양국에서 미군의 파병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필리핀군과 필리핀 주민들의 피해가 방송을 장악했다.
이슬람 반군은 말 그대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인질을 구하지도 못하고 필리핀군의 피해는 늘어났다.
날이 갈수록 인질의 수는 늘어나기만 했다.
이슬람 반군이 주변 마을들을 습격해서 추가로 인질을 끌고 간 결과였다.
엘만은 만날 때마다 그날 희생된 필리핀군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총에 맞은 사람의 사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끔찍했다.
아마 시체를 직접 눈으로 봤다면 더 끔찍했을 것이다.
그나마 사진인 것이 다행이었다.
“사진이 불편한가?”
엘만 지부장이 말었다.
“···.”
“가서 거울을 보게. 자네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네.”
나는 굳이 거울을 보러 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나는 일단 사과했다.
“아니야. 이런 일을 하면서 사람의 죽음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그게 문제지. 그렇게 무감각해지다가 괴물이 되는 요원을 여럿 봤네. 그런 괴물은 조직에 예상치 못한 큰 피해를 주더군.”
“그렇습니까?”
“그래. 하지만 그렇게 죽은 사람을 모두 신경 쓰는 것도 좋지 않아. 자네는 어떤 요원들이 반역자가 되는 줄 알고 있나?”
엘만의 말에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내가 내년에 CIA를 떠나려고 계획하는 것은 반역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종의 배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내 대답에 잠시 말이 없던 엘만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오로지 돈에 대한 욕심이나 미인계에 넘어가서 배신하는 자들은 별로 없네. 배신자 대부분은 조직에서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지. 자신의 부족한 점보다는 다른 사람 혹은 CIA 더 나아가 국가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더군. 그다음으로 가장 반역자가 되기 쉬운 유형이 바로 어쭙잖은 정의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네. 어설픈 정의감으로 조직을 배신하는 것이지. 후자가 훨씬 더 위험하지. 앞의 경우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보니 중요한 업무를 맡지 못하다가 조직에서 밀려난 뒤에 배신하는 경우라서 아는 것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적거든···.”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는 것은 제가 반역자가···”
“아니네.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야. 사람의 죽음을 무시할 필요도 없지만, 너무 크게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는 말이지. 자네가 계획한 작전으로 당장은 희생자가 늘어난 것이 사실이네. 하지만 일 년에 필리핀에서 납치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나?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명에서 80명이야. 그중 상당수는 이슬람 반군의 짓이지. 그렇지만 자네 계획대로 미군이 파병되어 필리핀군을 훈련시킨다면···. 이슬람 반군의 세력을 약화할 수 있고 결국에는 납치당하는 사람 수도 줄어들 거네. 당장은 피해가 커 보이지만 이 방법이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라는 말이네.”
엘만 지부장이 말했다.
나름대로는 위로하려고 건넨 말이겠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지만 위선일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미군 파병이 납치되는 사람의 수를 줄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마 엘만 지부장은 이슬람 반군이 아무리 많은 납치를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게 미국인이 아닌 이상 말이다.
납치가 줄어든다고 해도 그건 부수적인 일일 뿐이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당하는 것으로 솔직히 인정하는 일이었다.
굳이 포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엘만 지부장은 나를 어느 정도 얕잡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저 똑똑하지만, 아직 경험이 적은 젊은 요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뻔한 사탕발림에 넘어가리라 생각하다니···.
하지만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오히려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다시 며칠 후 필리핀 인질사태는 소강 국면으로 들어섰다.
상당수 인질이 석방되거나 탈출했다.
모두가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미국인 두 명을 포함한 꽤 많은 수의 인질이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지만 남은 인질들은 이슬람 반군이 점령한 캠프로 이동되었다.
이제 인질사태는 장기전으로 들어선 것이다.
인질극이 어느 정도 끝나자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필리핀 언론들은 필리핀군의 무능을 연이어 내보내고 있었다.
CIA가 원한 것이기도 했지만 이건 신임 아로요대통령도 원하는 바였다.
아로요대통령으로서는 인질 작전 실패를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아로요 정부는 대통령이나 지금 정부의 실패가 아니라 필리핀군의 훈련 부족으로 실패했다고 주장하고 싶어 했다.
차츰 필리핀군에 대한 여러 가지 개선 방향이 나오던 시점에 나는 홍콩으로 돌아왔다.
이제 내가 필리핀에서 남아서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홍콩으로 돌아온 날 저녁 리안과 카이 황이 내 집을 방문했다.
그들은 한 사람과 동행하고 있었다.
30대 초중반의 사내였다.
몸 전체가 단단해 보였다.
바로 네팔 왕실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돌아온 구르카인이었다.
“랄 바하두르라고 합니다.”
“랄 바하두르라면 ‘붉은 용기’라는 뜻이던가요?”
내 말에 랄 바하두르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어떻게?”
“따로 네팔을 조금 조사해봤습니다. 랄 바하두르는 네팔에서 가장 흔한 이름 중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까?”
랄 바하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옆에서 우리 둘의 대화를 듣던 리안이 끼어들었다.
“난 또···. 네가 네팔어까지 할 줄 아는 줄 알았네.”
리안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배울 기회가 없어서···.”
사실대로 말하면 네팔어를 배울 생각은 아예 없었다.
네팔어를 배워서 뭐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네팔인 앞에서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리안에게서 다시 팔 바하두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녁 식사 전이면 같이 식사를 하시죠. 보고를 그 뒤에 받도록 하죠.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랄 바하두르가 대답했다.
식사 후 우리는 서재로 향했다.
나는 차를 마시며 리안과 카이 황과 내가 홍콩에 없는 동안 있었던 일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별다른 일은 없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선물투자나 주식투자 모두 잘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가장 많은 돈이 투자된 나스닥이 4% 이상 폭락해서 이번 주 수익률은 기대할 만하였다.
투자 이야기를 끝내고 나는 랄 바하두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지난주 내내 홍콩을 비워서 일이 제대로 처리됐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요.”
“아닙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럴 수야 있나요. 서둘러 본론으로 넘어가죠. 그럼 네팔에서 조사한 내용을 들을 수 있을까요?”
순간적으로 랄 바하두르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가 듣기로는 왕실 비극에 이상한 점이 있어서 조사를 부탁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랄 바하두르가 물었다.
“예. 제가 쓸데없이 의심이 많습니다. 다른 왕실 가족이 다 죽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는데 한 가족만 전원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좀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
랄 바하두르가 한층 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네팔트에도 비슷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니 사실 네팔 정부와 갸넨드라 현 국왕을 제외한 야당과 국민 다수가 왕세자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요?”
“예.”
“정부 발표를 믿지 않는 이유가 있겠죠?”
“우선 에드릭 님 말씀대로 갸넨드라 현 국왕 가족 중 왕실 비극에서 벗어난 정황이 수상하기 때문입니다. 갸넨드라 현 국왕은 정기적인 왕실 행사에 일을 핑계로 불참했습니다. 그런데 정기적인 왕실 행사를 불참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구나 현 갸넨드라 국왕의 아들 부부도 참석했는데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총을 맞은 사람은 현 갸넨드라 국왕의 부인뿐입니다. 그나마도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고요. 무엇보다···.”
랄 바하두르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무엇보다?”
내가 되물었다.
이런 식으로 중요한 순간에서 말을 멈추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었다.
랄 바하두르가 리안과 카이 황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저도 목숨을 걸고 빼낸 정보라서 다른 분들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저 두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 말에 잠시 망설이던 랄 바하두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망한 디펜드라 왕세자, 아니 디펜드라 국왕의 공식적인 사인은 자살입니다. 왕실 가족을 학살하고 스스로 머리에 권총을 발사해서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3일 동안 혼수상태로 있다가 사망했다. 이게 왕실과 정부의 공식 발표입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내가 물었다.
“디펜드라 전 국왕은 오른손잡이입니다. 그런데 제가 병원 의사를 매수해서 알아낸 바로는 디펜드라 국왕은 머리 왼쪽에 총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발견 당시 권총을 잡은 손은 오른손이었고요.”
나도 순간 오른손을 들어 왼쪽 머리에 가져다 대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총으로 머리에 상처를 입힐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앞을 보니 리안도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음모네.”
리안이 말했다.
“갸넨드라 현 국왕의 짓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랄 바하두르를 보며 물었다.
“이번 일이 정말 조작되었다면 그건 갸넨드라 현 국왕 전하 혼자 힘으로 벌일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닙니다. 갸넨드라 국왕 전하께는 죄송합니다만 갸넨드라 국왕 전하는 이런 일을 벌일 능력이 없는 분입니다. 이런 일을 벌이고 수습할 수 있는 분이었다면 지금처럼 국민 여론이 최악이 아니었겠죠.”
전임 비렌드라 국왕은 영국 최고의 명문 학교인 이튼을 졸업한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에게서 왕조 역사상 손에 꼽히는 명군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었다.
당연히 정부와 군에 대한 장악력도 뛰어났다.
디펜드라 왕세자도 군에서 경력 대부분을 쌓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왕실에서도 가장 평판이 나쁜 갸넨드라 현 국왕이 왕실 경비대를 움직이고 정부를 움직여서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CIA일 것이다.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조직은 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진실을 덮을 수 있는 조직은 CIA뿐이었다.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CIA는 요원들에게 최악을 준비하라고 가르친다.
왕실 비극에 CIA가 개입한 정황은 알아냈다.
이제 CIA가 지시한 보고서 작성을 위해 자료를 더 모아야 할 순간이었다.
그리고 어떤 보고서든 네팔의 미래는 지금의 국왕인 갸렌드라 국왕에게 달려있었다.
“갸넨드라 국왕은 어떤 분입니까?”
“음···. 욕심이 많지만, 그 욕심에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시는 분이죠. 특히 어릴 때부터 비렌드라 전 국왕 전하에게 열등감을 많이 느끼셨다고 합니다. 아마 그 열등감이 그분을 움직이는 힘일 것입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조사했던 네팔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비렌드라 전 국왕과 갸넨드라 현 국왕의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갸넨드라 국왕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네팔을 다스릴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 눈에 띄는 점은 있었다.
사진으로 봐도 비렌드라 전 국왕은 미중년으로 인상이 좋았다.
반면 갸넨드라 현 국왕은 못생긴 것은 아니지만 잘생겼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진으로 봐도 눈에서 탐욕이 그대도 드러났다.
문득 엘만 지부장의 말이 생각났다.
배신자 대부분은 자신의 능력을 조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엘만 지부장의 말이 전부는 사실이 아니었다.
능력이 없는 배신자도 유능한 조직의 힘을 받으면 엄청난 일을 벌일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사진에서 눈을 돌렸다.
랄 바하두르를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카이 황 집사님에게 듣기로는 일을 구하고 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갸넨드라 국왕 같은 인간 밑에서 가족을 살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랄 바하두르가 대답했다.
“그럼 경호원을 맡아 주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유능한 경호원이 구하고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