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093. 좋은 사람도 나쁜 이야기만 듣다 보면 길을 잃는다
랄 바하두르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네팔로 귀국했다.
카이 황에게 부탁해서, 랄 바하두르 가족의 홍콩 이주를 돕도록 했다.
비용은 내가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랄 바하두르가 네팔로 돌아간 사이, 나는 보고서를 완성했다.
갸넨드라 신임 국왕이 취임한 이후 네팔의 정국 방향이 보고서의 주요 내용이었다.
보고서의 내용에 왕실 학살 사건에 관한 내용은 최소화했다.
이런저런 자료를 통해 꾸미기는 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갸넨드라 국왕은 현재 네팔의 갈등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가 만약 선왕이 추진한 입헌군주제를 되돌리려고 시도한다면, 네팔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할 수 있다.
만약 CIA가 왕실 학살 사건의 배후라면, 잘못된 판단에서 나온 작전이라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비렌드라 선왕이 왕정을 입헌군주제로 바꾼 것은, 그게 시대의 요구였기 때문이었다.
역사라는 흐름은 지나간 강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예전이라면 그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21세기에는 불가능했다.
21세기에 유지되는 절대왕정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우선 왕가가 막대한 재정을 동원해서 국민의 마음을 돈으로 사는 경우였다. 아시아의 브루나이 왕국이나 중동의 국가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런데 네팔은 자원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산업도 없는 국가였다.
그나마 수입원이라고는 인도의 투자와 히말라야를 방문하는 등산객들에게서 나오는 관광 수입이었다.
네팔은 북한 같은 나라처럼 국경을 막고 국내에서 독재를 시행할 수도 없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국가의 외화 획득 수단이 국경을 막으면 존재할 수 없는, 이웃 나라의 직접투자와 관광 수입이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서 이런 상황이라 해도 왕정이나 독재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카리스마가 넘치는 국가 지도자가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독재가 유지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쿠바다.
하지만 갸넨드라 신임 국왕은 왕세제일 때도 인기가 없었고, 심지어 지금은 국왕 시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이대로라면 몇 년 가지 않아서 모택동주의 공산 반군에게 정권을 잃게 될 것이다.
이게 내 최종 결론이었다.
나는 보고서를 메일에 저장하고 기지개를 켰다.
아마 이 보고서가 본부에 들어가면 나는 누군가에게 꽤 욕을 먹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론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보고서의 결론을 내리면서 내가 한 가지 바란 것이 있다면, 이 보고서를 읽고 네팔 작전을 기획한 요원들이 왕정복고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어차피 이번 일을 기획할 때부터 왕정복고는 예정된 순서일 것이다.
설령 CIA가 왕정복고 포기를 원한다고 해도, 갸넨드라 국왕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형제들과 조카들을 죽이면서 왕위에 올랐는데 허수아비 국왕으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CIA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기에, 갸넨드라 국왕이 우기면 끌려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네팔의 왕정은 몇 년 가지 못할 것이다.
물론 변수는 있다.
작전 실패에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이번 작전을 기획한 요원들은 네팔이 공산주의 반군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CIA가 돕는다고 해도 몇 년 더 버티는 것에 불과했다.
역사의 흐름은 되돌릴 수가 없다.
네팔의 일은 나로서는 이래저래 씁쓸한 일이었다.
CIA의 잔인함과 근시안적인 시각을 동시에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내 손에도 피가 묻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몇 달 사이에 내 손으로 죽인 사람만 네 명이었다.
필리핀에서는 희생자가 늘어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미군 파병을 위한 작전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런 내 기준으로도 네팔 왕실 일은, 처음 들었을 때부터 제대로 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팔 사건은 그만 잊기로 했다.
잡념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회의 시작하죠!”
다음 날 매주 열리는 회의를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리안이 투자 결과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지난주에는 나스닥, 닛케이, 코스피 모두 하락 포지션을 선택했습니다. 세 곳 모두 선물거래로 각각 8.6%, 2.4%, 6.0%의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 밖에 인도네시아 주가지수는 최근 IMF와 인도네시아 정부의 관계 개선 효과로 3.7% 상승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난주 W&R의 수익은 약 1,186만 달러로 수익률은 약 6.6%입니다. 마찬가지로 AAM은 150
만 달러 수익으로 4.2%의 수익률을 얻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현재 W&R의 투자금은 약 2억 684만 달러이며 AAM의 투자금은 약 3,790만 달러입니다. 이상입니다.”
리안의 발표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브레이크가 발표를 시작했다.
“지난주 러시아는 소문만 무성하던 게즈프롬의 경영진 교체가 확정되면서 다른 주식시장과는 달리 큰 폭으로 상승했습니다. 주가 상승률은 4.4%입니다. 저는 게즈프롬 경영진 교체 정보를 듣자마자 바로 상승 포지션으로 바꿔서 약 9%의 수익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주 300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현금성 자산까지 합쳐서 W&R의 러시아 투자
금은 4,050만 달러입니다. RAM의 경우는 현재 7,700만 달러입니다. 몇 달 전 5천만 달러를 투자한 것을 생각하면 현재까지 40%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습니다.”
게즈프롬은 러시아 최대의 국영기업이다.
이번에 물러난 게즈프롬 경영진은 오랜 세월 회사를 사유화해서 막대한 돈을 빼돌렸다.
그런 경영진의 교체로 러시아 주식시장 전체가 상승했다.
브레이크가 발표를 끝내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 있었다.
칭찬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주식시장이 다 하락하는데 러시아만 상승한 데는 게즈프롬 경영진 교체 뉴스가 결정적이었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그 정보는 어떻게 알아낸 것입니까?”
“예전부터 알던 관리를 통해서 정보를 조금 일찍 얻었습니다.”
브레이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알아서 정보를 알아내고 큰 수익을 내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잘했습니다. 그 정보를 전해 준 관리에게는 충분한 사례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제가 알아서 정보비를 보내 주었습니다.”
“아니, 아니! 그 정도로는 안 되죠. 그런 고급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면 좀 더 세심하게 관리하는 나을 것 같습니다.”
브레이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세심한 관리라면······?”
“팀의 여유 자금 중 30만 달러를 이번 일에 대한 보너스로 지급하겠습니다. 브레이크 씨가 적당한 돈을 그 정보원에게 전해 주세요. 한 번에 주셔도 되고 나눠서 주셔도 되고요. 다만 한 번에 너무 많은 돈을 주면 안 되는 것은 아시죠?”
30만 달러라는 말에 브레이크의 눈이 커졌다.
“보너스를 30만 달러나 주신다고요?”
브레이크가 되물었다.
“앞으로도 잘하라는 의미에서 주는 보너스입니다. 돈 받았다고 나태해지면 바로 자를 겁니다.”
브레이크가 머리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브레이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음 주 투자 방향을 이야기해 보죠. 우선 지난주에 이어서 여전히 미국 경제 전망이 어두운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물가도 심상치 않고요. 지난주 나스닥의 낙폭이 컸던 것은 미국이나 유럽 모두 경기가 나쁜 상황에서 물가만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연준도 이런 상황에서는 금리 인하 압박을 더는 견디기 어려울 것 같
습니다.”
“이번에는 그린스펀 의장이 금리를 인하하겠군요.”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얼마가 됐든 금리를 인하하면 세계 주가가 상승할 가능성이 큽니다. 2주 연속으로 하락해서 이미 많이 떨어졌으니까요.”
“그럼 나스닥, 닛케이, 코스피 모두 상승 포지션을 잡겠습니다.”
리안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일단 다음 주는 금리 인하라는 확실한 호재가 있으니, 투자금을 선물거래에 집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리안을 바라보았다.
거래를 직접 하는 것은 리안이기 때문이다.
“뭐, 그러죠. 오히려 일이 줄어서 저는 그게 더 편합니다.”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브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러시아 선물은 상승 포지션으로 잡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러시아 쪽 거래는 계속 브레이크 씨에게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해 주세요. 혹시 더 할 말 있는 분 있습니까?”
내가 리안과 브레이크를 보며 물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리안과 브레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그럼 회의 끝내죠.”
“수고하셨습니다.”
“리안 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리안을 불렀다.
“잠시 할 말이 있으니 제 자리로 오세요.”
함께 내 자리로 온 리안은 의자를 끌어다가 앉았다.
“무슨 일인데? 혹시 나한테도 보너스 주려는 거야?”
리안이 뜬금없이 보너스를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리안이 받는 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보너스? 너도 보너스 받고 싶어?”
“당연한 이야기 아니야? 보너스가 단지 돈 문제가 아니잖아. 내가 하는 일을 알아준다 이런 의미 아니야? 안 그래?”
나로서는 썩 공감이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류오린에서 꽤 많은 보너스를 받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누군가가 나를 알아줘서 주는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CIA의 경우는 오히려 내 돈을 써 가면서 일을 했다.
뭔가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리안의 말이 아주 많이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기는 하지. 얼마나 줄까? 너도 30만 달러 정도 주면 돼?”
“됐네요, 이런 식으로 엎드려서 절 받는 식으로 받는 돈은 나도 사양이야. 내가 돈을 받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하는 줄 알아!”
무슨 연인 사이의 밀고 당기기도 아니고, 보너스 이야기했다가 필요 없다는 것은 뭐라는 말인가?
“하여간 부잣집 도련님이란······. 30만 달러면 얼마나 큰돈인 줄 알아? 알았어, 돈이 싫다면 다른 거로 보상해 줄게. 너, 예전에 카이 황 씨하고 투자회사 만들었다고 하지 않았어?”
“만들었지.”
“그 회사 이름이 R&H였던가?”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R&H.”
“그 회사, 요즘은 어디에 투자하고 있어?”
“카이 황 아저씨가 투자를 전담했었는데, 요즘은 바쁘셔서 거의 다 현금성 자산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럼 카이 황 씨에게 말해서, 상하이에 상장된 기업 중에서 건설 회사 주식에 투자해 보라고 이야기해 봐. W&R은 상하이 주식시장에 투자하기 어려워도 R&H는 가능하잖아.”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갑자기 무슨 건설 회사?”
“다음 달에 IOC에서 2008년 올림픽 개최 도시 투표가 있는 것 알고 있지? 거기에 베이징이 신청한 것도.”
“당연히 알지. 지금 중국 정부 최우선 과제가 바로 올해 WTO 가입과 2008년 올림픽 유치잖아.”
“아무래도 그에 대한 윤곽이 다음 주면 나올 것 같아.”
“벌써? 투표는 3주 정도 남았는데?”
“베이징에 올림픽을 유치하는 것에 가장 큰 걸림돌은 미국이잖아. 그런데 미국이 베이징의 올림픽 유치를 더는 반대하지 않을 것 같아.”
“무슨 정보라도 있는 거야?”
리안이 물었다.
나는 책상에서 오늘 자 신문을 꺼내 리안에게 보여 주었다.
“여기 보면 하이난섬에 불시착했던 미국 정찰기를 2주 안에 미국에 인도하기 위한 협상이 열렸다고 나와 있잖아.”
“그런데? 하이난섬에 불시착한 미군 정찰기와 미국이 베이징 올림픽 반대를 하지 않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리안이 다시 한번 고개를 갸우뚱했다.
“중국 정부가 바보도 아닌데 미군 정찰기를 그냥 돌려줄 리가 없잖아. 그런데 여기 보면 정찰기를 돌려주는 데 대한 아무런 조건도 나와 있지 않아. 그 흔한 재발 방지 약속조차 없어. 뭐, 재발 방지 약속은 미국이 할 리가 없지만 말이야. 그래도 중국이 그런 주장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는 중국 정부가 미군 정찰기를 돌려주는 대가로, 미국이 베이징의 올림픽 유치를 막지 않기로 했다는 거야?”
리안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 안에 미국과 중국 사이의 문제 중에서 정찰기를 돌려줄 정도로 중요한 사건은 올림픽 유치 투표뿐이잖아. 중국의 WTO 가입은 미국도 원하는 것이니 협상 대상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니까 베이징 올림픽 유치 가능성이 커지면 건설 회사 주식이 오를 테니 미리 사라. 지금 이런 말이네?”
“맞아.”
내 대답에 리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도 꽤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내 상상 이상이네. 미군 정찰기 반환 기사가 어떻게 상하이 주식시장에서 건설 회사 주식 구매로 이어지냐.”
“내 추측이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 그런데 어차피 손해 볼 것은 없잖아. 연준의 금리 인하가 발표되면 전 세계 주식시장은 대체로 오를 테고, 그건 상하이도 마찬가지일 것 아니야.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상승할 호재가 예상되는 건설 회사 주식을 사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이야기한 거야.”
“이게 나를 따로 부른 이유야?”
“맞아.”
“보너스가 맞네. 알았어, 아저씨에게 이야기해 볼게. 아저씨도 네가 말했다면 별 반대는 하지 않을 거야.”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내 예상이 빗나가서 건설주가 떨어져도 나 원망하지는 말고.”
내 예상대로 미국과 중국이 미군 정찰기와 베이징 올림픽 유치를 맞바꿨는지 나는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