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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 인간은 하나를 주면 둘을 원하는 법이다
필리핀 마닐라의 술집 내부 안가.
여러 번 왔더니 이제 익숙해질 정도였다.
“잘 왔네. 자주 보는군.”
엘만 지부장이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게요.”
내가 대답했다.
나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필리핀을 도대체 한 달 사이에 몇 번이나 방문한 것인지······.
이번 달에는 홍콩보다 필리핀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
“다른 문제가 생겼다고요?”
내가 물었다.
“이번 납치를 벌인 필리핀 이슬람 반군 조직에 대해서는 자네도 알고 있을 거네.”
“아부 사아프 아닙니까?”
“맞네, 민다나오섬의 이슬람 조직 중 하나지. 그럼 민다나오섬에 아부 사아프 말고 다른 조직이 있는 것도 알고 있겠지?”
납치 사건을 조사하면서 민다나오섬 상황을 조사했었다.
“예. 모로 민족 해방 전선과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이 더 있지요.”
내가 대답했다.
“맞네, 아부 사아프는 그중에서 가장 작은 조직이라고 할 수 있지. 본래 민다나오섬의 가장 큰 이슬람 반군 조직은 얼마 전까지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이었네. 하지만 5년 전부터는 필리핀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자치를 인정받아서, 민다나오섬 일부에서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를 운영하고 있으니 더는 반군 조직이라고 할 수 없지.”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이 필리핀 정부와 협상을 한 것에 반발해서 떨어져 나온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이 필리핀에서 가장 큰 이슬람 반군 아닙니까?”
“맞아. 자네도 지시를 받았으니 알겠지만, CIA 본부에서는 그 이슬람 해방 전선과 필리핀 정부와의 휴전을 추진하고 있네.”
“듣기는 했습니다만······. 갑자기 본국에서 필리핀 이슬람 반군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뭡니까?”
나로서는 CIA가 필리핀 반군에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달 초에 하마스가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했네. 그 테러로 21명이나 사망했지. 대부분이 10대라서 이스라엘 내 분위기가 상당히 안 좋아. 지난 클린턴 정부부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와의 평화협정을 추진하던 상황에서 터진 일이지. 사실상 평화협정이 물 건너가는 분위기야. 당연히 이스라엘은 폭탄 테러에 보복 공
격을 했고 말이야. 지금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과 조직들도 격앙된 분위기야. 그래서 CIA 본부에서는 전 세계 이슬람 무장 단체 중에서 회유 가능성이 있는 단체는 되도록 회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네.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은 회유 가능성이 가장 큰 단체 중 하나고 말이야.”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와 필리핀의 이슬람 반군 단체를 회유하는 것이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필리핀의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이 회유 가능성이 큰 반군 단체라는 말은 일리가 있었다.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이 회유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저도 알겠네요. 몇 년 전에 필리핀 정부와 휴전을 맺었다가,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일방적인 파기로 휴전이 깨진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건 아로요 대통령을 설득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어차피 아로요 대통령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정책을 뒤집는 것이니 반대할 리가 없을 텐데요?”
아로요 대통령으로서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맞아. 이미 내일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의 휴전을 발표할 예정이네.”
“내일요? 그럼 저는 왜······?”
엘만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미 휴전을 발표할 예정이라면 본부에서는 도대체 나에게 왜 필리핀으로 가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말인가?
다른 한편으로는 엘만 지부장에게 조금 섭섭한 부분도 있었다.
내일 휴전이 발표된다는 것은 내가 필리핀에 있을 때도 이미 휴전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나에게 알려 줬으면 아부 사아프를 상대하는 작전을 생각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엘만이 휴전 협상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에 자네에게 휴전 협상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필리핀 정부 쪽에서 비밀로 하기를 원해서 말이야.”
엘만 지부장이 숨긴 것에 대해 사과했다.
“아닙니다, 제가 꼭 알아야 하는 정보는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엘만 지부장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엘만 지부장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언제부터 CIA가 필리핀 정부의 말을 듣고 내부 요원에게 사실을 숨겼다는 말인가?
핑계일 뿐이었다.
“하여간 필리핀 정부가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의 휴전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한 가지 부탁을 해 왔네.”
“부탁요?”
“그래.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의 휴전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네. 필리핀군과 민다나오섬에 사는 주민 중에서 비이슬람인들의 반발 때문이었지. 지금 정부에서는 그런 내부 반발을 무마하려면 다른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더군.”
“다른 희생양요?”
“이미 이야기했던 것처럼 현재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는 필리핀 정부와 모로 민족 해방 전선과의 협상을 통해 자치권을 인정받았지. 그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의 주지사는 얼마 전까지 너르 미수아리라고,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을 만든 지도자였고 말이야.”
“얼마 전이라면 지금은 미수아리가 민다나오 자치구의 주지사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필리핀을 조사하기는 했지만 내가 민다나오의 상황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그때 필요한 정보만 조사했을 뿐이었다.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의 주지사가 누구인지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맞아. 아로요 대통령이 취임하고 선거에서 이긴 직후인 4월에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의 주지사인 미수아리를 해임하고, 대신 지금은 15인 위원회라는 집단지도체제로 대신 임명했네. 15인 위원회의 의장으로는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의 부의장 파로우크 후신을 임명했지.”
“미수아리를 해임한 이유는요?”
미수아리가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을 만든 인물이라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자치주가 성립된 이후에 주지사가 된 것일 테고.
그런데 그런 인물을 해임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했다.
“부정부패지. 필리핀 정부가 모로 민족 해방 전선에 지원한 지원금 상당수가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더군. 물론 진짜 이유는 미수아리가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과 가까웠다는 이유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로요 대통령이 철저한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 지우기에 나선 것 같았다.
“미수아리가 순순히 주지사에서 물러난 건가요? 오래전부터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을 이끈 인물이라면 따르는 사람이 많을 텐데요?”
상황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수아리는 오래전부터 필리핀 정부에 대항해 싸운 무장 독립 조직을 창설하고, 어쨌든 자치구라는 성과를 이뤄 낸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이 막 취임한 대통령, 그것도 선거가 아닌 전 대통령이 탄핵당해서 쫓겨나 대통령직을 물려받아서 정통성이 모자란 대통령의 한마디에 해임되다니?
보통 상황이라면 자치구 전체가 들고일어날 일이었다.
“모로 민족 해방 전선이 한창 세력이 클 때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별로 그렇지도 않아. 미수아리가 큰 세력을 가졌던 이유는 필리핀 정부에 대항해서 반란을 주도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필리핀 정부와 협상을 하는 동안, 강경파는 대부분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 아부 사아프로 다 빠져나갔지. 현재 모로 민족 해방 전선에 남은 세력은 협상파고, 그 협상파
에게는 미수아리보다 필리핀 정부가 줄 것이 더 많아.”
길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미수아리가 지금은 세력이 크지 않다는 말이었다.
“필리핀 정부에서 말하는 희생양이 미수아리입니까?”
내 질문에 엘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세력이 예전보다는 못하고 15인 위원회 위원들 계파를 다 합친 것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로 민족 해방 전선 최대 계파는 미수아리파야. 필리핀 정부는 미수아리가 재기할 기회를 아예 없애기를 바라고 있네.”
아로요 대통령이 여성이지만 단호하고 꽤 끈질긴 면이 있는 것 같았다.
정적에 대해 아주 가혹한 면이 있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도 결국 감옥에 가두더니, 이제는 자신이 해임한 주지사의 재기 가능성까지 없애려는 듯했다.
이제야 나를 부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아니 에이전트 에스 팀이 했던 일이 여론전과 정치공작들이었다.
하지만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미수아리라······. 뭐라고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희 팀에게 미수아리라는 인물은 정보 수집 대상도, 작전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뭐라도 알아야 어떻게 제거할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건 좀······. 팀에서 이 일을 맡으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전의 공작 대상들은 총리나 대통령 같은 잘 알려진 인물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평판이 어떤지 혹은 정적이 누구인지, 이용해야 할 취약점이 무엇인지 같은 정보를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미수아리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엘만 지부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밑에서 가방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미수아리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네. 여기 있는 정보면 미수아리나 모로 민족 해방 전선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네.”
엘만 지부장이 탁자에 있는 가방을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그 가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 정도면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이런 필리핀 한구석에 있는 자치구의 정치까지 개입해야 한다니······.
네팔에 대한 보고서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내가 관여하는 일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가서 자료를 확인하고, 다른 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맡을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팀은 독립된 팀입니다. 따로 하는 일이 있는데, 최근 본부에서 지시가 너무 자주 내려오는 것에 불만을 가진 팀원들이 많습니다.”
“본래 이 바닥이 유능하면 유능할수록 일이 많은 법이야. 물론 나야 자네 팀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알고 있지. 몇 번이나 필리핀 지부의 일을 도운 것에 대해서는 내가 나중에 꼭 보답하겠네. 그리고 이번 일만 끝나면 대충 큰일은 끝나네. 앞으로 여기 필리핀 지부에서 자네 팀에 요청하는 일은 내가 앞서서 막을 생각이고 말이야. 그러니 이번 일을 긍정적
으로 생각해 달라고 다른 팀원들을 설득해 주게.”
지부장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가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 * *
“가방이 백화점에서 발견되었다고?”
엘만 지부장은 CIA 안가에서 부하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예. 멀쩡한 새 가방이 쓰레기통에 있던 것을 백화점 직원들이 발견해서 보관해 놓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문은 없겠지?”
엘만이 물었다.
“현재로서는 가방에서 발견된 지문은 백화점 직원들의 것뿐입니다.”
부하가 대답했다.
“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나가자마자 가방을 버릴 줄은 몰랐군.”
엘만이 에이전트 에스 팀 수이진에게 전한 가방에는 위치 추적 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수이진이 적은 아니지만, 수상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만날 때는 항상 어두운 술집에서 약속을 잡았다.
아는 인맥을 통해 조사해 봐도 CIA 작전 요원 중에는 수이진과 비슷한 자도 없었다.
CIA의 작전 요원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다른 사람의 눈에 쉽게 띄는 사람을 뽑지 않는다.
그런데 수이진이라는 자는 180㎝ 중후반의 키라는 것만으로도 한눈에 띄었다.
수이진이 아시아계라는 것을 생각하면 작전 요원으로는 큰 단점이었다.
더구나 상황 파악 능력이나 여론전에 아주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20대 중후반이라는 나이와 아시아계라는 인종적 특징, 180㎝ 중후반이라는 신체적 특징, 그리고 상황 파악 능력······.
CIA 작전 요원이라고 해 봐야 2천 명이 조금 넘었다.
이런 특징을 가진 요원이 많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인맥을 동원해 봐도, CIA 작전 요원 중에는 이런 조건에 맞는 요원이 없었다.
엘만은 수이진이 속한 에이전트 에스 팀이 외부 팀이니, FBI나 기타 다른 조직 출신이라고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CIA 출신이라면 모르지만, 다른 조직이라면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위치 추적 장치를 붙인 것인데······.
바로 걸린 것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자신을 믿지 않았던지.
“추적도 백화점에서 놓쳤다고 했지?”
“예. 백화점에 들어가는 것은 확인했는데 나오는 것은······. 백화점에서 오늘 가방을 산 인물 중에서 수이진으로 보이는 자는 없었다고 합니다. 백화점 밖을 지키는 요원들을 따돌린 것을 보면, 아무래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것 같습니다.”
부하가 대답했다.
“에이전트 에스라는 조직이 진짜로 있다는 말인가?”
엘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옆에서 그 말을 들었는지 부하가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올해 들어서만 에이전트 에스 팀이 관여한 큰일이 몇 개입니까? 혼자서 그 모든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엘만은 손을 들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무언가를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자네 말이 맞기는 한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 에이전트 에스 팀에서 수이진이라는 요원을 뺀 다른 요원을 만난 사람이 없어. 아무리 막내 요원이라고 해도 그럴 수가 있나?”
“그 팀의 방침인가 보죠. 외부로 드러난 요원을 최소화하려는······.”
엘만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냐, 그래도 역시 수상해. 수이진과 내가 몇 번 이야기를 나눴는데, 무슨 결정을 할 때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느낌을 받지 못했거든.”
“수이진이 능력이 좋은가 보죠. 어쨌든 저는 에이전트 에스 팀이 수이진 혼자라는 지부장님의 생각은 너무 나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장 이번에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 감시를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혼자가 아니라는 말이죠.”
부하가 엘만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자네 말이 맞기는 한데······. 내 촉은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거든······. 내가 그 촉 덕분에 냉전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잖아.”
엘만의 말에 부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소련이 망하기 직전까지 몰랐던 그 촉요? 그 촉 때문에 엉뚱한 보고서 올렸다가 중동으로 쫓겨나시고도 그 촉을 믿으시는 겁니까?”
부하의 말에 엘만이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았다.
“너, 그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지. 그때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이 소련이 망할 줄 몰랐어. 나는 재수가 없었던 것뿐이야.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고, 소련이 망할 줄!”
“어쨌든 그 촉은 다른 곳에 쓰시라는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촉으로 포장하지 마시고요. 중동에서 그 촉 이야기하시다가 필리핀까지 쫓겨 오셨으면 정신을 차리실 때도 됐잖아요.”
부하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