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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
“도착했습니다.”
옆 좌석에서 들리는 리코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눈을 떠 보니 익숙한 곳이었다.
“전에 거기군요.”
예전에 왔을 때 잠시 묵었던 바로 그 저택이었다.
“장기 임대했습니다. 필리핀에 오실 때 언제든지 머무셔도 됩니다.”
리코가 말했다.
나는 리코의 직원이 운전하는 차에서 내렸다.
내 손에는 리코가 사서 가져온 가방이 들려 있었다.
가방 안에 있는 것은 당연히 엘만 지부장에게서 받은 서류였다.
“들어가죠.”
나는 홍콩에서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 리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필리핀행을 알리고,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 근처 백화점에 그를 대기시켰었다.
엘만이 내게 미행을 붙일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였다.
이미 인도네시아에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미행을 붙인 것에 대한 유감은 없었다.
내가 저들이라도 미행을 붙일 것이다.
가방까지 안겨 줄지는 몰랐다.
하지만 정보 세계에서 만난 사람이 준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가방 안에 도청 장치나 위치 추적 장치를 설치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자리에 들어가자 소파에 앉았다.
리코는 잠시 망설이더니 내 앞자리에 앉았다.
“콜 센터 사업은 어떻습니까?”
내가 물었다.
“이제 막 시작한 상태라서, 아직은 고객으로 두 개 기업 정도밖에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기업들을 만나고 있으니, 곧 몇 개 기업을 더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작정 고객을 늘리는 것보다 직원 교육을 철저히 해서 불만을 줄이도록 하세요. 단기간의 이익보다는 고객을 장기적으로 만족시킬 생각을 하시고요. 비용도 비용이지만 콜 센터의 평판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직원 교육과 복지에 최대한 신경 쓰고 있습니다.”
리코의 말에 나는 고객을 끄덕였다.
“좋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임금을 조금 더 주더라도 우수한 직원들을 채용하라고 하고 싶은데, 그건 어렵겠죠?”
리코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어렵습니다. 대놓고 임금을 높이면 다른 회사에서 싫어해서······. 콜 센터를 운영하는 기업들 뒤에 있는 자들은 거물입니다. 아직 저로서는······.”
어느 분야나 기업들 간에는 임금 상한선에 대한 합의가 존재했다.
그리고 그런 기준을 세우는 것은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특히 필리핀처럼 유력가들의 세력이 강한 곳에서 규칙을 어기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힘이 없으면 돈을 써서라도 배경을 만드세요. 돈이 필요하면 더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리코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콜 센터를 차리라고 지원해 주시는 것에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왜 이렇게 저를 지원해 주시는지 그 이유가······.”
리코가 말을 흐렸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는 다 나온 셈이었다.
“아시는 줄 알았는데요? 평소에 필리핀의 상황을 내게 전해 주고, 내가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전에 돈을 받을 때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그런데요?”
“그런 목적만으로 지금처럼 사업 자금을 지원해 주시는 것은 제 상식으로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 말에 리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리코의 대답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움직이는 자금이 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저로서는 잘······.”
“리코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빠르게 늘고 있고요.”
“······.”
“리코 씨에게 투자하는 자금 정도는 큰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굳이 투자까지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여전히 리코는 내가 자신에게 투자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물론 전처럼 리코 씨에게 돈을 주고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런 돈이나 받는 리코 씨가 언제까지 제게 필요할까요? 저는 이왕이면 리코 씨와 오래 가고 싶습니다. 리코 씨가 꽤 마음에 들거든요.”
리코가 내게 도움이 됐던 것은, 그가 전직 경찰로 일종의 해결사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찰 시절의 인맥을 통해 에스트라다 탄핵 과정에서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전직 경찰은 전직 경찰일 뿐이다.
시간이 가면서 예전 동료들과의 관계는 친분보다 돈이 오가는 이해관계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게 경찰이든 공무원이든 사기업이든, 조직을 떠난 사람들이 겪는 과정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예전에 팀장으로 모시던 존 베비스에게, 내가 CIA를 떠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아무리 정권이 바뀌고 물러났다고 해도, 존 베비스는 CIA에서 8년 넘게 일하다가 퇴직했다.
CIA 내에서 아직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들이 가장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는 조직을 떠나고 짧게는 1~2년, 길어도 3~5년이 고작이었다.
그때가 되면 나로서는 리코보다는 퇴직한 지 얼마 안 된 다른 정보원을 찾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지금의 리코 같은 전직 경찰 출신 정보원이 필요할까?
아니었다.
그러면 그때 필요한 정보를 모아 줄 사람을 새로 구해야 한다.
그러느니 리코를 키우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럼 저를 위해서······?”
리코가 내 말에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런 이유만은 아닙니다. 가장 큰 이유는 리코 씨나 콜 센터 사업 모두 성공할 것 같아서입니다. 제가 감이 좋거든요. 지금까지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한 번도 손해를 본 적이 없습니다.”
리코가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로서는 투자할 만해서 투자한 것이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리코 씨는 열심히 콜 센터 사업을 확장해서 사업을 키우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리코의 얼굴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아니, 30대 중반까지 경찰이었던 사람이 왜 이렇게 감정적이지?
이건 내가 정말 좋아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는 서둘러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입을 열었다.
“혹시 민다나오섬에 대해서 잘 아십니까?”
“민다나오섬요?”
민다나오라는 이름에 리코가 양미간을 찡그렸다.
“잠시 그쪽에서 파견 근무를 한 적이 있어서 좀 알고 있기는 합니다만······. 왜 그러시는지요?”
“민다나오섬 쪽에 있는 광산에 투자를 좀 해 보려고요.”
나는 투자 핑계를 댔다.
“제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지만······.”
리코가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조언을 듣기 위해서 말을 꺼낸 것인데요.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해 보세요. 아는 분이 민다나오섬에 투자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그쪽이 요즘 어수선해서 좀 망설이고 있었거든요.”
“그러시다면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로서는 당장은 투자를 만류하고 싶습니다. 민다나오섬은 외부인이, 특히 에드릭 씨처럼 홍콩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미국인이 투자하기에는 최악의 투자처입니다. 거기 주민들이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중국인, 정확하게는 화교와 미국인이거든요.”
“필리핀 본토에도 화교와 미국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화교와 미국인을 싫어하는 필리핀 국민은 많았다.
마르코스 전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화교와 미국인들이 마르코스를 독재할 수 있게 했다고 믿고 있었다.
“본토에서 싫어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본토에서 마르코스 전 대통령 때문에 미국을 싫어한다면, 민다나오섬의 이슬람교도는 마르코스 전 대통령보다 미국인을 더 싫어합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군요. 민다나오섬을 필리핀 일부로 만든 것이 미국이니까요.”
“맞습니다.”
현재 중동을 세계의 화약고로 만든 책임은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에 있었다.
독일과 싸우는 과정에서 유대인과 이슬람 양쪽에 약속을 남발했고 국경을 멋대로 정했다.
결국, 2차 대전 이후 중동에서 시작된 전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필리핀에서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민다나오섬은 역사적으로 필리핀과는 별개의 지역이었다.
민족도 달랐고, 무엇보다 필리핀 국민 대부분이 기독교를 믿는 것과는 달리 민다나오섬은 이슬람교도가 다수였다.
그걸 미국이 민다나오섬의 이슬람을 학살해 가면서 필리핀과 하나로 만든 것이었다.
당연히 필리핀이 독립한 이후 민다나오섬의 주민들은 독립을 요구하고 있었다.
민다나오 이슬람 반군들로서는 미국이 자신들이 겪는 불행의 원인이었다.
“혹시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의 미수아리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아십니까?”
“아주 개자식이죠.”
“그래요?”
“예. 처음에 모로 인민 해방 전선을 만들 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부패한 정치인에 불과합니다. 그자와 그자의 가족 그리고 측근이 빼돌린, 무슬림 민다나오 자치구에 지원된 국고가 엄청난 액수입니다.”
미수아리에 대해서 말하는 리코의 표정은 꽤 격앙되어 보였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는 듯했다.
“미수아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인가요?”
내 질문에 리코가 잠시 머뭇거렸다.
잠시 후 리코가 입을 열었다.
“제가 경찰에서 쫓겨난 이유가 바로 그 미수아리 때문입니다. 미수아리의 부정을 조사하는 조사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우리 조사단이 부정에 대한 증거를 찾아내자마자 조사단이 해체되고 뿔뿔이 흩어졌죠. 얼마 후 조사단원 대부분 한직으로 발령이 나더군요. 조사단원 중에는 실종된 사람들도 여러 명입니다.”
“그 실종이 미수아리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시나 보군요.”
리코가 고개를 끄떡였다.
“맞습니다. 그자는 그런 짓을 벌이고도 남을 자입니다. 저도 경찰 생활을 할 때 완벽하게 깨끗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자처럼, 겉으로는 민족을 위해 일한다고 주장하면서 뒤로 돈을 빼돌리며 사람들을 살해하는 개자식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 부정부패로 주지사에서 쫓겨났다니 조금은 후련하셨겠군요.”
“쫓겨났지만 필리핀 정부에서 직접 처벌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필리핀 정치인 중에서 돈을 빼돌리는 자가 한두 명이 아니니까요. 여전히 지역에서 꽤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기도 하고요.”
부정부패만으로는 처벌하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잠시 후 리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미수아리 그자는 다시 주지사직을 되찾기 위해 온갖 방법을 찾고 있을 겁니다. 그자는 물론이고 그 측근 모두 주지사 자리를 차지하면서 엄청난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제가 경찰을 하면서 한 번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봤어도, 한 번만 범죄를 저지른 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리코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다음 날 연락을 하고 다시 엘만 지부장을 찾아갔다.
“하루 만에 벌써 의논을 다 끝냈나?”
“예. 어제 주신 서류가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내 눈에 서류라는 말에 엘만 눈빛이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이 들어왔다.
“그래서 방법은?”
“미수아리와 아부 사아프를 엮는 것입니다.”
내 말에 엘만 지부장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 미수아리라는 자와 아부 사아프가 어떤 관계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알죠. 둘은 사이가 아주 안 좋죠.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 아부 사아프는 둘 다 미수아리가 이끌던 모로 민족 해방 전선에서 떨어져 나간 조직이기는 하지만, 둘 중에서 아부 사아프와 사이가 더 나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은 독립한 지도 오래되었고, 노선의 차이도 자치냐 완전한 독립이냐의 차이 정도로 큰 차이가 없는 데 반해
서, 아부 사아프는 10년 전에 모로 민족 해방 전선과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에서 가장 과격파들이 독립해서 만든 조직이니까요. 얼마 전 납치 사건에서 보듯이 이놈들은 반군 조직이라기보다는 그냥 테러 단체라고 할 수 있고요. 무장 투쟁이 아니라 폭탄 테러, 납치, 강간 이런 짓을 벌이는 자들이니까요. 목표도 민다나오섬의 독립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이
슬람 국가 건설을 내세우고 있고요.”
내 말에 엘만 지부장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인가?”
엘만 지부장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미수아리가 필리핀 정부와 자치구를 만드는 협정에 서명한 조건은 자신이 주지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지사에서 쫓겨났죠. 더구나 지금 미수아리로서는 지난 기간 휘하 세력이 많이 빠져나가서 군사력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부 사아프는 현재 1,200에서 2천 명에 가까운 병력을 가지고 있죠. 미수아리는 여전히 영향력과 돈이
있고요. 둘이 손을 잡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닙니까?”
“하지만 미수아리가 바보도 아닌데 아부 사아프와 손을 잡겠나? 손을 잡은 것이 드러나면 끝장인데?”
아부 사아프는 필리핀 내에서 각종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단체에 가까웠다.
정치인으로 재기를 노리는 미수아리로서는 절대 손을 잡아서는 안 되는 단체였다.
“우리가 손을 잡게 만들면 되죠. 그리고 사실 꼭 손을 잡을 필요도 없죠. 예를 들어 대규모 납치 사건이 일어난 것은 미수아리가 주지사에서 쫓겨난 직후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필리핀군 작전과 필리핀군의 방어 상황을 아부 사아프에 알려서 피해가 커졌고요. 그 누군가를 미수아리로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 아닙니까? 그렇게 차츰차츰 미수아리를 토
끼몰이하면 그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필리핀군 작전과 필리핀군의 방어 상황을 알린 것은 CIA였다.
그 정보 유출을 우리가 한 만큼, 그걸 다른 사람의 짓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궁지에 몰렸을 때 미수아리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그건 정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몰리면 무장봉기라도 일으키려고 하겠지. 죽을 짓인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으니까.”
미수아리는 주지사였다고는 하지만, 수십 년간 무장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결국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법을 찾게 마련이었다.
“부정부패로 쫓겨난 주지사가 무장 폭동을 일으킨다······. 다시 주지사가 될 수 있을까요?”
내가 말했다.
얼굴에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몰락시키는 일은 꽤 재미가 있었다.
그게 대통령이든 쫓겨난 반군 지도자 출신 정치인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