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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슈퍼리치 되다-95화 (96/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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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 멈춰야 할 때 멈추는 것은 지혜다!

“돌아가야 한다고?”

“팀에서 진행하던 작전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엘만 지부장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지금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커지고 있네. 생각보다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의 휴전에 대해서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 그 여파로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지는 상황이란 말이야.”

아로요 대통령은 5월 선거에서 대승을 거둬 정국 주도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민다나오에서만은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민다나오섬에 사는 비이슬람 주민들은 지난 선거에서 에스트라다를 지지했었다.

에스트라다가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의 휴전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토벌한 정책을 지지한 것이다.

반면 민다나오섬에 사는 이슬람교도들은 오히려 아로요 대통령을 지지했었다.

아로요 대통령을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에스트라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부 사아프의 대규모 인질극과 이어진 습격은 이런 여론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다.

민다나오섬의 비이슬람 주민들은 이 모든 것이 아로요 대통령이 무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적어도 민다나오섬의 이슬람 반군에 관한 한, 그의 영화에서의 터프 가이 이미지처럼 강경한 정책을 펼쳤었다.

이슬람교도들이라고 해서 아로요 대통령을 좋아해서 투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로요 대통령이 피플 파워를 진압한 이후 겪는 가장 큰 위기라고 할 수 있었다.

민다나오섬 인구는 필리핀 인구의 20%를 차지한다.

다음 선거에서 당선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돌아간다는 말을 하는 것에 엘만 지부장이 불만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저도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기에 지원하러 온 것입니다.”

“자네가 계획한 작전이지 않은가? 이 중요한 상황에서 작전을 계획한 사람이 빠지면 어쩌자는 것인가?”

엘만이 나를 압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관여한 것은 어디까지나 미수아리 제거에 대한 부분입니다,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과의 휴전은 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일이고요. 제가 왜 그 일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네에게 책임을 지라는 말이 아니네. 하지만 이렇게 상황이 악화한 데는, 자네가 제안한 필리핀군의 인질 구출 작전과 필리핀군의 방어 계획을 넘긴 것도 영향이 있지 않네.”

“그래서 지금 상황이 제 책임이라는 말입니까?”

내 말에 엘만 지부장이 손을 저었다.

“당연히 자네 책임이 아니지.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중요한 시기라는 말이야.”

“그에 대한 책임을 미수아리에게 떠넘기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지금 상황에서는 조금 힘들어졌네. 너무 여론이 나빠. 지금 상황에서 그 유출 배후로 미수아리를 지적하면 당장에라도 반란을 일으킬 텐데, 한창 아부 사아프에 대한 인질 구출 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전선을 더 확대할 수는 없네.”

아부 사아프가 납치한 인질 중 20명이 아직 풀려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미국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미수아리를 따르는 병력이라고 해 봐야 지금은 거의 없지 않습니까? 알려진 미수아리파의 전력 정도라면, 반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바로 진압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아로요 대통령은 만약의 사태를 우려하는 것 같아. 혹시 바로 진압할 수 없어져서 다시 민다나오섬이 혼란에 빠지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겠지.”

“하긴 뭐······.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네요.”

종교와 민족을 기반으로 하는 반란은 계기만 있으면 삽시간에 커질 가능성이 있었다.

당장 미수아리가 모로 인민 해방 전선을 만들었을 때, 그의 병력은 겨우 60명 남짓이었다. 하지만 모로 인민 해방 전선의 병력이 3만 명까지 늘어나는 데 걸린 시간은 겨우 몇 년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처음 미수아리가 모로 인민 해방 전선을 시작했을 때보다 재정적으로 풍족했다.

비록 필리핀 정부에서 지원한 돈을 횡령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로요 대통령이 우려하는 것은 단순히 아부 사아프와 미수아리 파의 반란을 동시에 막아야 한다는 점만이 아니야. 진짜 걱정하는 것은 필리핀의 식량 사정이네.”

나는 엘만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식량 사정요?”

엘만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태풍 피해로 필리핀 북부와 중부의 수확량이 아주 안 좋아. 그렇지 않아도 민다나오섬은 필리핀 식량 40%를 생산하는 곳인데,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금은 민다나오섬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훨씬 중요해졌네. 만약 민다나오섬에서 내전이 벌어져서 식량 가격이 올라가기라도 한다면, 아로요 대통령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국민에게 정치가 가장 직접 체감되는 것은 물가였다.

특히 당장 매일매일 사서 먹는 먹거리의 물가가 올라가는 상황에서 정부를 지지할 국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미수아리를 당장 압박하기 어렵다는 말을 알겠습니다. 작전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겠군요. 하지만 그래도 제가 필리핀에 남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팀의 임무보다 지원 임무를 더 중요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지부장님도 아시잖습니다. 파견은 파견일 뿐이고 지원은 지원일 뿐이라는 것을요.”

“휴······.”

엘만 지부장이 한숨을 쉬었다.

“알겠네. 팀에서 복귀 명령이 내려왔다는데 어쩔 수 없지. 그럼 언제 다시 온다는 건가?”

“글쎄요. 저도 돌아가 봐야 해서, 언제라고는 확실히 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팀원들을 전부 소집하는 것으로 봐서는 보통 일은 아니겠죠.”

“그것참······.”

엘만 지부장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당연히 팀의 소집은 없었다.

이번에 한동안 팀의 임무를 핑계로 본부의 지원 임무를 거부할 생각이었다.

지금 내 심정은 시원섭섭하다는 말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동안 CIA의 지시를 따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호기심에 일본에 가서 단테 사무관을 만난 것이 실수였다.

그 일로 에이전트 에스 팀의 존재가 기정사실이 됐다.

얼마 후부터는 지원 임무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존재한다고 믿는 조직을 없는 조직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당장 내가 연락을 끊고 잠적하면, 적어도 아시아 지부 차원에서는 에이전트 에스 팀의 존재를 찾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 존재가 드러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CIA 임무가 힘들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내가 지난 6개월 동안 류오린에서 지냈던 생활은 꽤 괜찮았다.

하는 업무도 적었고 실적 압박도 없었다.

에디 미첼은 나를 보내면서, 임무가 끝난 후 내 뒤를 봐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금전적 보상을 약속했다.

매매 수수료 일부를 나에게 보너스로 지급하는 계약을 통해 금전적 보상이 지급되었다.

그렇게 지급된 보너스는 내가 CIA에서 정보분석 요원으로 받던 연봉의 10배가 넘었다.

홍콩에는 미인도 넘쳐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류오린에서의 생활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이 나를 무능력자 취급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받지 못했던 시선이었다.

그나마 비슷한 것이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 받았던 인종차별이었다.

인종차별은 내가 CIA에 들어갈 결심을 하게 이유였다.

그나마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이런 시선이 바뀌기는 했다.

그렇지만 류오린에서 시선이 바뀐 정도로 내가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건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할 대접이었으니까.

그에 비해서 CIA 활동은 전율이 넘쳤다.

작전을 수행할 때마다 요원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내 자존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작전 대부분이 대통령이나 그에 상응하는 거물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CIA 임무는 귀찮기는 했지만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였다.

더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나는 엘만 지부장이 지원 요청을 한 의도를 의심하고 있었다.

엘만 지부장이 정말 필리핀 일을 해결할 수 없어서 나를 불렀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냉전기에 유럽에 있었고, 이라크 전쟁 때는 중동에 있었다.

현장 요원으로 지부장까지 올라간 그라면 굳이 내 도움 없어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내 방법보다 효율적이나 아니냐는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나를 불렀을까?

쓸 만한 도구로 나를 보거나, 그게 아니면 나를 조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에이전트 에스 팀이 활약하면 할수록, 기존 조직에서는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팀의 존재를 껄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 대한 조사, 아니 정확하게는 나를 통해 에이전트 에스 팀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했다.

당장 이번만 해도 리코의 도움이 없었다면 추적을 당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런 추격이 있을 때, 그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적당한 보복이라도 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잠시 멈춰야 할 때였다.

* * *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리안이 나에게 다가왔다.

엘만에게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거짓말은 아니었다.

리안에게서 급히 돌아오라는 전화가 왔다.

내가 전에 카이 황에게 부탁한 회계와 재무 전문가가 출근한 일 때문이었다.

“너, 뭔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리안은 나에게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데? 너 직원 필요하다며? 그래서 직원 구한 거잖아.”

“하······. 진짜······.”

내 대답에 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네가 팀장이라고 해도 내가 부팀장인데, 네 마음대로 사람을 채용해도 되는 거야!”

생각보다 완강한 리안의 말에 나는 조금 황당했다.

“내 마음대로라니? 카이 황 씨에게 부탁해서 구한 사람인데? 너도 아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내가 물었다.

“아, 진짜! 물론 알지. 그런데 너는 아는 사람 중에 한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기 싫은 사람 없어?”

“도대체 누군데?”

리안이 이 정도까지 노발대발하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리안은 대체로 사람들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이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한편으로는 리안과 정말 껄끄러운 사이라면 카이 황이 추천할 리가 없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나는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사무실에 내가 가기 전에는 없던 책상과 의자가 하나 늘어나 있었다.

“지금 자리에 없어. 일 때문에 잠시 나갔어.”

리안이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새롭게 생긴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을 보던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은 뭔가 아기자기한 면이 있었다.

나는 리안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혹시 새롭게 뽑은 직원이 여자야?”

“여자인지도 모르고 뽑은 거야?”

당연히 모르고 뽑았다.

“난 그냥 카이 황 씨에게 부탁해서······.”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왜? 새로운 직원이 예전에 사귀던 여자야?”

“사귄 적이 있냐고? 지금 나에게 악담을 하는 거야!”

리안이 다시 한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귄 것이 아니면? 하룻밤 같이 보낸 사이인가? 너, 파티에서 그런 식으로 꽤 여러 명 만나고 다닌다고 하던데······?”

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리안을 바라보았다.

“네가 내 친구라면 지금이라도 채용을 취소해.”

“아니, 어떻게 그래? 카이 황 씨에게 부탁해서 채용한 건데. 내 재산 지금 다 카이 황 씨에게 맡겨 놓은 것 알지?”

실제로는 아니지만 내 재산 대부분이 있는 W&R의 대표가 카이 황이니, 아주 완벽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내가 아저씨에게 이야기할 테니 해고하면 되잖아.”

“너야 그럴 수 있지만, 내가 어떻게 그래.”

“직접 해고하기 난처하면 나에게 팀장 자리를 넘겨. 그럼 내가 해고할 테니까!”

리안이 이번에 들어온 직원과 단단히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나 맡지 않으려고 하던 팀장을 하려고 할 정도로 말이다.

“뭔데? 이유를 알아야 채용을 취소하든 해고를 하든지 하지.”

내 말에 리안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미 책상까지 있다고 해도 내가 없는 사이에 들어온 직원이었다.

아직 맡은 업무나 계좌에 대한 접근권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리안이 이렇게까지 싫어한다면 나도 굳이 같이 일할 생각이 없었다.

“그게······.”

리안이 막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혼녀예요.”

나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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