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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슈퍼리치 되다-96화 (97/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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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 핏줄은 속일 수 없다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리안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봐서 알겠지만 나는 정말 몰랐어. 카이 황 씨가 네 약혼녀를 보낼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

“사과는 됐고! 어떻게 할 거야?”

리안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주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뭘?”

“몰라서 물어? 채용 언제 취소할 거야?”

리안이 말했다.

그는 나를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왜 말을 못 해?”

리안이 다시 한번 나를 추궁했다.

“나야말로 묻고 싶다. 넌 어쩔 건데?”

내 질문에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뭘 어째?”

“약혼녀와 결혼할 거야?”

내가 물었다.

“그건······.”

리안이 말을 흘렸다.

“네가 어떻게 할지 알아야 내가 처리하지.”

“내 결혼이 이것과 무슨 상관이 있어?”

“그럼 상관이 없겠냐?”

나는 리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라. 내가 여자분을 해고하는 거야 쉽지. 그런데 나중에 그 약혼자와 결혼하면, 그때 내가 그 여자분을 어떻게 보겠느냐고.”

리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네가 그 여자분과 결혼할 생각이 없으면 깔끔하게 해고하고······.”

“제길! 처음부터 채용하지 말았어야지.”

리안이 말했다.

약혼을 취소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내가 네 약혼녀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채용했겠냐?”

약혼녀와 함께 일하게 된 리안도 지금 상황이 껄끄럽겠지만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리안은 말이 부하 직원이지, 동업자 같은 관계였다.

직원 중에서 부하 같지 않은 한 명이 있는데, 이제 그 약혼녀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카이 황 씨에게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아저씨를 다시 불러들이고 내가 W&R로 가든지 해야지. 어떻게 같이 일을 하냐······.”

리안이 말했다.

리안의 말에 나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리안이 결혼을 할 것이냐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태도로 봐서는 파혼할 것 같지 않았다.

내 약혼녀와 함께 일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친구의 약혼녀와 일하는 일이 편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리안은 친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동업자나 다름없었다.

단지 W&R의 지분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홍콩에서 일하는 이상 리안과는 서로서로 돕는 사이였다.

아니, 내가 홍콩을 떠난다고 해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리안과 협력 관계를 이어 나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내가 리안과 카이 황에게 지분을 준 것이었다.

그런데 리안도 없는 상황에서 리안의 약혼녀, 아니, 미래의 부인과 같이 일하는 것은 생각만 해도 거북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 말하는 것이지만, 카이 황과 일할 때도 그를 대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나보다 스무 살이나 나이가 많은 직원이 어떻게 편하겠는가?

카이 황이 류오린에서 있을 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만 봐도, 같이 일하기에 편안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나마 리안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리안이 없는 상황에서 카이 황과 같이 일을 하기도 그렇게 쉬워 보이지 않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가면 네가 맡고 있던 거래는 누가 하고? 그리고 W&R이 막 홍콩 금융가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데, 그 사장이 우리 회사에 다시 직원으로 들어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미치겠네.”

리안을 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카이 황 씨는 왜 그런 거래? 나 없는 동안 물어봤을 거 아니야?”

내가 물었다.

카이 황이 약혼녀를 직원으로 보내면 리안이 이런 반응을 보일지 모를 리가 없었다.

평소 카이 황이 리안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뭐긴 뭐야, 결혼하라는 거지.”

리안이 내뱉듯이 말했다.

“벌써?”

“우리 집이 원래 좀 손이 귀해. 아버지도 독자시고, 나도 여동생하고 나랑 단둘이야.”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그렇지, 네 생각을 무시하고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게 좀 이해가 안 가네.”

아무리 리안이 사실상 아버지처럼 따르는 집사라고는 하지만 결혼 문제까지 관여하는 것은 선을 넘은 일이었다.

“캐나다에 있는 아버지가 시켰겠지. 아버지가 결혼하고 10년이 넘어서 나를 낳았거든. 할아버지도 꽤 늦게 아버지를 낳으셨고 말이야. 그래서 나를 빨리 결혼시키려는 거야. 나도 아들을 낳는 데 오래 걸릴 것 같다고 말이야.”

“그래도 이건 좀······.”

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휴······.”

잠시 후, 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상속 문제도 있어서 더 그러신 것 같아.”

“상속 문제?”

상속자라고 해 봐야 리안과 여동생 둘이다.

“응. 아버지나 나는 독자지만, 할아버지의 형제들 후손은 지금도 절강성에 살고 있어. 내가 혹시라도 후손을 가지지 못하면 모든 재산이 그쪽으로 넘어가지. 문제는 할아버지 때부터 그쪽과 아주 사이가 나빠. 거의 원수나 다름없지. 지금이야 아버지가 캐나다에 있으니 문제가 없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혼자 남았을 때는 큰 문제가 될 수 있어. 물

론 그자들이 그런 일을 할 능력은 없지만 말이야.”

원수라고까지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사이가 정말로 안 좋은 것 같았다.

캐나다에 있는 리안의 아버지가 얼마나 되는 재산을 가졌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리안이 홍콩에서 가진 재산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나는 문득 리안이 여동생 이야기를 꺼낸 것이 생각났다.

“여동생은?”

“가문의 전통상 여자가 가지는 상속권은 아주 제한적이야.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세상의 법보다 중요한 것이 가문의 전통이지.”

리안이 말했다.

가문의 전통이 그렇다는데 내가 뭐라고 할 말은 없었다.

리안이 하는 말을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애초에 카이 황 같은 사람이 자기 일을 포기하고 리안을 모시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 결혼해야겠네.”

“뭐야!”

리안이 버럭 화를 냈다.

“아버지 소원도 들어드리고 집안을 위한 일인데 결혼해야지.”

“네 일 아니라고 너무 말을 쉽게 하는 것 아니야?”

리안이 말했다.

“왜? 내가 보니까 미인이시던데? 카이 황 씨가 직원으로 추천한 것을 보면 능력도 있을 테고······. 약혼을 한 것을 보면 집안도 좋을 것 같은데 아니야?”

화교.

특히 리안의 경우처럼 중국 본토에서부터 명문가였던 집안은, 아직도 결혼을 가문과 가문의 결합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조민인가 하는 여자는 리안의 집안과 비슷한 명문가 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컸다.

“조건이야 좋지. 그래도 결혼이라는 게 조건만 보고 하는 것은 아니잖아.”

“마음에 안 드는 거야?”

“마음에 들고 안 들고 문제가 아니야. 내가 대학생일 때 중학교 막 들어갔던 애야. 여동생도 아니고 조카처럼 생각했던 애라고. 조카나 여동생처럼 생각했던 애와 갑자기 약혼한 것이 4년 전이야. 아버지가 캐나다로 떠나기 직전이지. 너 같으면 갑자기 그런 애하고 결혼하라는데 선뜻 마음이 생기겠어? 내 눈에는 여전히 애인데?”

“글쎄······. 내가 본 조민 씨는 애라고 하기에는······.”

리안의 약혼녀는 이제 20대 초반이지만, 여동생이나 조카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차가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미인이었다.

“걔가 어릴 때는 안 그랬어. 내가 과자도 사 주고 놀이공원에도 데려가고 그랬단 말이야.”

리안이 말했다.

내가 더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리안이 조민이라는 약혼녀를 여자나 사랑하는 연인으로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았다.

리안의 성격상 조민을 사랑하고 있었다면 여자를 많이 만나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도 약혼녀에 대해 이전에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남녀 관계와 집안이 엮인 문제였다.

내가 낄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 문제에서 빠지기로 했다.

“어쨌든 미안하지만 이미 채용한 이상 바로 해고하는 것은 어려워. 나중에 상황을 봐서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

내 말에 리안이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나는 리안을 보내고 카이 황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조민 아가씨가 워낙 강경하셔서······.

전화를 받자마자 카이 황이 사과부터 했다.

“그런 분을 보내실 거면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 주시지······. 이번 일로 크게 실망했습니다.”

내가 말했다.

사과 한마디에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카이 황은 내 신뢰를 깬 것이었다.

-이번 일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조민 아가씨께서 W&R에서 저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리안 도련님 사무실에 직원이 필요하다는 말을 조민 아가씨가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조민 아가씨가 가신다고 하시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전화 연락도 되지 않아서······.

아마 내가 필리핀에서 전화기를 꺼 놓고 있는 동안 연락을 한 듯했다.

“잠시만요. 보내려던 직원이 조민 씨가 아니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맞습니다. 다른 분을 보내려고 했는데, 그 사실을 조민 아가씨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연락드릴 사이도 없이 먼저 사무실을 찾아가셔서······.

“전에 내가 사람을 구해 달라고 했을 때, 마침 사람이 있기는 한데 그 사람과 리안이 불편해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시지 않았나요?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이 조민 씨라고 생각했는데요?”

-아닙니다. 본래 추천하려고 한 분도 리안 도련님과 아시는 분이지만, 조민 아가씨를 추천할 생각이면 제가 먼저 말씀을 드렸겠죠. 본래 추천하려고 하던 분과는 일정을 이야기하던 중이었습니다. 예정대로 됐다면 열흘 정도 후에나 들어갈 예정이었고요.

이제야 어느 정도 톱니바퀴가 맞는 것 같았다.

어쩐지 아무리 내가 직원을 구해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해도, 내가 없는 사이에 사람을 보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의외였다.

내가 본 조민은 말투에서 냉기가 묻어나는 미인이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조민이 막무가내로 사무실에 밀고 들어왔다는 것이 아닌가?

외모나 인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럼 조민 씨는 카이 황 씨가 추천한 직원도 아니네요?”

나는 어쩌면 조민이라는 껄끄러운 팀원을 팀에서 내보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저는 오히려 조민 아가씨가 팀에 들어가게 된 것이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캐나다에 있는 큰 주인님도 많이 기뻐하고 계십니다. 이번에 넘어가 주시면 제가 나중에 꼭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카이 황이 이렇게까지 사정하는데 거절하는 것은 어려웠다.

나중에 해고하더라도 일단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다만 능력이 모자라면 바로 해고할 생각입니다.”

-당연하죠. 아마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나는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 조민을 불렀다.

“일단 채용하기로 했습니다.”

내 말에 조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같은 말을 기다렸지만, 그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회계 재무 전문가가 필요한데, 혹시 관련 교육이나 자격증이 있습니까?”

“뉴욕시립대학인 바루크대학(Baruch College)에서 회계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고 AICPA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아서앤더슨에서 수습 기간을 거쳤고, 최근까지 1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경력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바루크대학은 회계학 석사 과정만큼은 미국에서 톱 3 안에 드는 대학이다. 또한, 아서앤더슨은 최근 각종 회계 부정에 연루되기는 했지만, 미국에서 손에 꼽히는 회계 법인이었다.

“나이에 비해서 경력이······?”

“중학교 때 미국 유학하러 가서 좀 일찍 대학을 들어갔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리안과 카이 황에게 물어보면 바로 드러날 일을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다.

“제가 제일 먼저 지시할 일은 팀이 내야 할 세금에 관한 일입니다. 리안에게 물으면 지난 반년 동안 저와 리안의 거래 명세를 알려 줄 겁니다.”

팀의 세금은 카이 황도 정리를 하기는 했지만 그건 일부였다.

비록 팀 인원은 적었지만, 지금까지 거의 거래를 했기 때문에 처리해야 할 내용은 적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조민은 대답하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리안에게 걸어갔다.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이 내정된 자리에 막무가내로 들어올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조민이 찾아온 것은 바로 다음 날 오후였다.

“1차 보고를 하겠습니다.”

“벌써요?”

“예.”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녀를 한 번 보고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해 보세요.”

여전히 모니터를 보면서 말했다.

“우선, 제가 확인한 것은 AAM과 팀장님의 세금에 관한 부분입니다. 문제가 많더군요.”

조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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