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99화 (100/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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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모든 일에는 각각의 기준이 있다

단테 패트릭은 굳은 얼굴로 CIA 일본 지부장 사무실을 찾았다.

“지부장님 안에 계신가?”

비서가 단테 패트릭을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지부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서가 인터컴으로 단테 패트릭의 방문을 알렸다.

“지부장님! 단테 패트릭 사무관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게.

단테 패트릭은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굳은 단테 패트릭의 얼굴을 본 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에이전트 에스 팀에서 거절했나 보군.”

“지금 하는 작전에 문제가 생겨서 도와줄 여유가 없다고 답변입니다.”

단테 패트릭이 대답했다.

“전에 왔던 그 직원이라도 보내 달라고 이야기를 해 보지 그랬나. 전에 꽤 쓸 만하다면서?”

“그렇지 않아도 제안을 해 봤습니다만 역시 거절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받았던 그 요원 개인 메일로도 연락을 해 봤습니다만, 어렵다는 대답을 받았습니다.”

단테 패트릭의 대답에 지부장이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정말 에이전트 에스 팀이 팀의 자체 임무 때문에 거절했다고 생각하나?”

“필리핀에서 일이 좀 있었다고 합니다. 필리핀 지부 쪽에서 미행과 도청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고 하더군요.”

단테 패트릭의 말에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거기 지부장이 엘만이었나?”

“그렇습니다.”

지부장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자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지. 냉전 기간 내내 유럽에서 활동해서 아시아 쪽 생리를 몰라도 너무 물라. 그쪽이야 아무리 같은 요원이라고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만, 이쪽은 최소한의 신뢰를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야. 그리고 하려면 잘해야지, 실패는 또 뭐야. 한심해서······.”

“지부장님이 알려 주지 않으셨으면 저도 비슷한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예전 단테 패트릭은 자신과 만난 에이전트 에스 팀의 요원을 추적하려고 하다가 지부장의 만류로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에이전트 에스 팀은 연이어 작전을 기획해서 성공시켰다.

에이전트 에스 팀의 팀 메일은 본부와 아시아 지부 내에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활동하는 에이전트 에스 팀 요원의 개인 메일을 아는 것은 단테 패트릭 자신뿐이었다.

“아시아에는 아시아만의 방법이 있어. 듣자 하니 인도네시아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고 하더군. 역시 공항에서 행방을 놓친 것은 마찬가지고······.”

“아무래도 에이전트 에스 팀의 정체가 불명확하다 보니······. 견제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견제는 해야지. 그런데 방법이 너무 과격해. 나도 현장 요원이지만, 냉전 기간 최일선에서 활약했던 현장 요원들은 타협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말이야.”

단테 패트릭은 지부장이 저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CIA 아시아의 지부, 특히 일본과 한국의 지부는 다른 곳과는 약간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양국의 CIA는 직접적인 정보 수집보다는 인적 관리에 더 주력하는 부분이 있었다.

과거 일본 지부의 가장 큰 역할은, 지금은 러시아가 된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막는 최일선이었다.

지금은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는 중요성이 커지고 있었다.

그 외에 부수적으로 북한에 대한 정보 수집 같은 것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아직 큰 부분은 아니었다.

이런 일은 당연히 CIA 지부의 힘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본 정부나 일본 국민의 여론을 움직여야 했다.

그렇다 보니 현장 요원 중에서도 직접적인 정보 수집보다는, 정보원을 포섭해서 정보망을 구축하는데 뛰어난 요원이 지부장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다른 현장 요원보다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외교관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저러나 어쩐다······. 당장 국무부에서는 반미 감정을 누그러트릴 방법을 찾으라고 난리인데 말이야.”

“일은 미군이 벌이고 왜 우리에게 해결책을 찾으라는 것인지 답답할 뿐입니다.”

이번 일의 시작은 오키나와 주둔 미군 상병이 주차장에서 20대 여성을 강간한 일에서 시작되었다.

1995년 주일 미군 세 명이 10대 초반 여학생을 강간한 사건 이후 미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 합의가 체결되었다.

내용은 살인이나 여성 성폭행 등의 흉악 범죄만 기소 전에 신병을 인도할 수 있다는 조항이었다.

이런 미국과 일본 정부의 합의를 근거로 일본 정부는 해당 미군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다만 강제적인 조항이 아니었다.

아마 다른 때라면 이번에도 일본 정부의 요구를 무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올해 초 일어났던 해양 훈련선 침몰 사고가 문제였다.

대통령의 후원자 중 한 명을 잠수함에 태웠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그 사건으로 일어난 반미 감정을 낮추기 위해서, 미국 정부는 해당 미군을 일본 정부에 인도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해당 미군의 신병 인도는 미국이 약속한 날에 이행되지 않았다.

미군 내 반발 때문이었다.

“그래도 방법을 찾아야지. 자네도 알겠지만 교토 의정서에 대한 일본의 견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야. 당장 독일에서 개최되는 관련 회의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어느 쪽 손을 들어 주느냐가 중요해. 그런데 자국에서 한창 반미 감정이 높은데, 아무리 고이즈미라고 해도 어떻게 우리 손을 들어 주겠냐는 말이지.”

교토 의정서는 클린턴 정부 시절 체결된 온실가스 감축 협약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한 직후인 2001년 4월 전격적으로 교토 의정서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개발도상국들이 감축하는 양이 적다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속내를 보면 대선 과정에서 자신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 석유 산업을 위한 조치였다.

당연히 유럽 국가들은 이런 미국의 탈퇴를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독일에서 열리는 정상회의에서 일본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일본은 미국과 유럽연합 사이에서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일본은 단일 국가로는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자 교토 의정서가 체결된 국가라는 상징성이 있었다.

교토 의정서가 발효되면 일본의 기업들도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꽤 큰 비용이 지출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은 온실가스 감축 기술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국가였다.

일본은 교토 의정서가 발효되면 가장 큰 경제적 이익을 얻을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일본이 교토 의정서를 지지하지 않는 것은 미국을 의식하기 때문이었다.

현 총리인 고이즈미는 일본 내에서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지지율은 고이즈미 총리의 개혁을 일본 국민이 지지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 국민의 여론을 관리하고 신경 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번 달에는 일본의 상원이라고 할 수 있는 참의원 선거도 있었다.

이래저래 일본 내 반미 감정을 약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지난번 총재 선거에서 활약했던 에이전트 에스 팀이 잠적했다.

“국무성에서 협조 요청이 내려왔지만, 백악관에서도 신경 쓰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일본이 미국 편을 들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유럽 쪽에 서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현재 일본 경제가 불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기업들을 위해서 유럽 쪽에 설 가능성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알기는 아는데 말이지······.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문제지.”

지부장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단테 패트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일본 내 반미 감정을 누르고, 더 나아가 CIA가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압승에 도움을 줄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 있다면요?”

단테 패트릭의 말에 지부장의 표정이 변했다.

“그런 방법이 있어? 그런 방법이 있으면 당연히 써야지. 혹시 좋은 계획이 있나?”

지부장이 되물었다.

“좋은 방법이기는 한데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 동아시아 정책의 가장 큰 축인 중국 견제가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게 대수인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이건 백악관에서도 관심 있게 보는 일이야. 중국을 견제하는 일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그래서 우리 정부에서도 중국의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한 것이고. 물론 하이난섬에 불시착했던 정찰기를 돌려받기 위해서 한 일이지만 말이야.”

지부장이 말했다.

중국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CIA에서 중국을 위협적인 상대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중국은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올해 초에 후쇼사에서 만든 역사 교과서를 일본 문부과학성이 검정 통과시켜서 중국과 한국이 크게 반발한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단테 패트릭의 말에 지부장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게 먹히겠나? 채택한 학교가 거의 없어서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 아닌가?”

후쇼사 교과서는 내용도 빈약할 뿐 아니라 오류도 많았다.

일본 내에서도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후쇼사 역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0.1%도 되지 않았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 역사 교과서가 이번 달 초에 서점용으로 출판된 이후에 다시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되겠나? 역사 교과서 따위를 출판한다고 누가 읽는다고······.”

지부장은 여전히 회의적인 표정이었다.

“그건 그렇죠. 하지만 올해 초 중국과 한국 정부에서 후쇼사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 문제가 된 부분을 지적하면서 일본 정부에 답변을 요구한 일이 있습니다. 아직 일본 정부는 그 문제에 대해서 답변을 하지 않은 상태고요.”

지부장이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단테 패트릭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정식으로 후쇼사 역사 교과서는 문제가 없다고 중국과 한국 정부에 통보하는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중국과 한국 국민의 반일 감정이 높아질 테고, 그 과정에서 중국과 한국의 여론을 자극한다면 일본 내에서도 반중, 반한 감정이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고이즈미의 자민당이 선거에서 유리할 것이다?”

일본 주요 정당 중에서 가장 우익에 선 정당이 바로 자민당이었다.

“맞습니다. 이왕이면 중국과 한국 정부에서 일본으로서 기분 나쁠 만한 정책을 발표한다면 더 좋겠죠.”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거야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지. 중국은 몰라도 한국 정부는 CIA 한국 지부를 통하면 될 거야. 괜찮군, 한국에는 우리 일이라면 자신들의 일처럼 나설 사람이 많거든. 심지어 그걸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이야.”

“다만 문부과학성을 움직이는 것은 총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의원들을 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의원들에게 접근하는 것도, 우리가 아닌 일본 내 친미 인사를 동원하고요.”

한국뿐 아니라 일본 내에도 CIA에 포섭된 정보원은 물론이고 자발적으로 협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연히 그중에는 현직 의원은 물론이고, 정치인 주변에서 공생하는 인물도 있었다.

“그래야지. 아무리 자신과 소속 정당에 도움이 된다고 해도, 자국의 선거에 다른 나라의 정보기관이 관여하는 것을 좋아할 정치인이 누가 있겠나? 자민당 총재 선거는 내부 선거였고 이길 가능성이 낮았지만, 이번 참의원 선거는 아니지. 오히려 고이즈미 총리가 지금 하는 것을 보면, 이번 참의원 선거를 통해서 반대파 원로들을 정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

“예, 아무래도 개혁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이 진행된 다음에는 고이즈미 총리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밝혀지면 끝장이니까요.”

만약 일이 계획대로 된다면 고이즈미 일본 총리로서는 지난번 총재 선거에 이어서 CIA에게 연이어 도움을 받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밝혀졌을 때 파괴력은 완전히 달랐다.

이번 작전이 밝혀지면 지부장이나 단테 패트릭은 경력이 끝나는 것에 불과하지만, 고이즈미 총리와 자민당으로서는 국내 선거에 외부 정보기관을 끌어들인 셈이었다.

정치적 경력이 끝나는 것은 물론이고, 반역죄로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좋군. 그래, 어떤 의원에게 접근할 생각인가? 이런 일로 문부과학성을 움직이려면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어야 할 텐데······. 성향도 맞아야 하고 말이야.”

“관방장관인 아베 신조가 좋을 것 같습니다. 관방장관이라는 자리 자체가 총리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면서 주요 정책을 기획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직책 아닙니까? 정보 수집 업무도 함께 하고요. 고이즈미 총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문부과학성을 움직이기에 더할 수 없이 적합한 위치입니다. 더더구나 아베 신조의 성향 자체가 극우에 가깝습니다.”

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가 한번 맡아서 해 보게. 이번 일까지 잘되면 자네, 본부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지부장 사무실을 나오면서 단테 패트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어린 친구는 이번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지부장도 이 계획이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번 계획을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 될 것이다.

대가로 어린 친구가 부탁한 몇 가지 일이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이 성공했을 때 자신이 받을 대가를 생각하면 작은 일이었다.

4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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