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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02화 (103/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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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불을 가지고 놀면 화상을 입는다

“그럼 이만 회의를 마칩니다. 또 한 주 수고해 주십시오.”

회의가 끝났다.

“부팀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일어서며 브레이크와 조민은 리안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리안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직원인 카렌이 다가와 회의 탁자의 컵과 남은 간식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럼 수고하세요.”

리안은 카렌에게 가벼운 말을 건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 목덜미가 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전 회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회의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에드릭이 회사를 결근하면서까지 리안에게 회의 진행을 맡긴 목적을 달성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에 리안은 사무실을 나와 근처 빌딩에 있는 W&R 사무실로 향했다.

이 빌딩은 리안이 W&R에 현물 출자한 부동산 중 하나였다.

두 개 층을 W&R이 이용하고 있었다.

아직 빈자리가 많았다.

내년까지 조금씩 인원을 채용할 예정이었다.

지금까지는 리안과 카이 황이 알던 사람들 위주로 충원되고 있었다.

최근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홍콩에 진출한 세계적인 투자회사 중 많은 곳에서 구조 조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 같은 추세로 W&R의 이름이 알려진다면 꽤 쓸 만한 인재를 채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W&R의 가장 큰 장점은 에드릭과 리안 외에는 외부 투자를 받지 않기 때문에, 공시의 의무도 없고 감독 기관의 규제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투자회사를 부르는 이름이 패밀리 오피스였다.

대표적인 예가 록펠러나 로스차일드 가문이 운용하는 패밀리 오피스였다.

패밀리 오피스를 선호하는 유명 투자은행 출신들이 많았다.

대표 사무실은 빌딩 가장 높은 층에 있었다.

리안을 알아본 비서가 급히 인터폰으로 카이 황에게 연락했다.

“대표님, 리안 씨가 찾아오셨습니다.”

리안이 여러 번 찾아왔기 때문에 익숙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들어가시죠.”

리안은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자리에 앉아 있던 카이 황이 일어났다.

리안은 터벅터벅 걸어가서 소파에 앉았다.

카이 황도 상석을 놔두고 반대편에 앉았다.

예전 처음 왔을 때 카이 황이 상석을 권했지만, 리안이 거절했다.

W&R에서 카이 황의 권위를 세워 주기 위해서였다.

비록 카이 황이 집사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W&R에서는 대표였기 때문이다.

리안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다른 사람의 사무실이지만 자신의 사무실보다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같이 지낸 카이 황의 사무실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잠시 리안을 바라보던 카이 황이 입을 열었다.

“투자 회의를 끝내고 바로 오신 모양입니다.”

“그렇죠 뭐.”

카이 황의 질문에 리안이 짧게 대답했다.

“이쪽도 이미 직원들에게 항센 지수 하락 포지션에 투자하라고 지시해 두었습니다.”

리안은 회의 시작 전에 보고서를 메일로 보내고 전화도 걸어 카이 황에게 투자 방향을 알려 주었다.

“회의 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카이 황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그게 문제죠. 그냥 듣기만 하고 있더라고요.”

브레이크나 조민 모두 리안에게 별다른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했던 리안이 계속 말을 이었다.

“에드릭은 자신이 없는 동안 팀을 이끌라고 맡겼는데, 에드릭이나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라니,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저와 브레이크 그리고 조민 사이의 관계죠. 아저씨도 알겠지만, 브레이크는 류오린에 들어오기 전부터 잘 알던 사이였어요. 회사는 다르지만, 러시아에 투자했었다는 공통점 때문에 자주 만나 술을 마시던 사이고요. 뭐, 그래서 추천한 거지만요.”

브레이크는 리안의 친구였다.

“알고 있습니다.”

“조민은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일 뿐 아니라 지금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고요. 에드릭이 나에게 투자 회의를 맡긴 이유는 팀 내에서 내 자리를 확실히 하려는 것인데······. 둘 다 가까운 사이이다 보니 그게 이른 시일 안에는 어려울 것 같아요.”

자신과 에드릭과의 관계와는 또 달랐다.

둘은 친구 사이였지만 일을 할 때 주도권은 에드릭이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과 브레이크, 자신과 조민은 서로 각자 하는 일이 다르고 움직이는 자금의 규모가 다를 뿐 상하 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일을 이야기해도 개인적인 관계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리안의 말에 카이 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조민 아가씨를 말리지 못해서 도련님을 곤란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조민이 우격다짐으로 한 일인데 아저씨가 무슨 죄예요. 어쨌든 무엇보다 그 둘이 내가 투자 계획을 이야기해도 그걸 제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에요. 그래서 질문도 없는 것 같고요. 그냥 저를 에드릭의 말을 전해 주는 스피커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더라니까요.”

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죠. 지금 도련님이 생각하시는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언제나처럼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예. 다른 사람의 말을 전달하는 것으로 보여서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요? 그렇다면 수많은 조직에서 최고 지도자가 아닌 간부들의 말에 권위가 서지 않겠죠. 그런데 아니죠, 그런 문제는 시간이 가고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도련님이 하실 일은 에드릭 씨가 홍콩에 있는 동안 세상을 보는 눈을 배우시는 것입니다.”

카이 황의 말에 리안의 눈이 커졌다.

“아저씨도 에드릭이 홍콩을 떠날 것으로 생각하시는군요.”

“당장 내년이나 몇 년 안에 떠나지는 않겠죠.”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드릭은 중국의 성장 가능성을 대단히 크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중국 경제 성장 과정에서 홍콩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커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홍콩이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이기는 하지만 세계 금융의 중심은 미국이 중심입니다. 지금 에드릭 님이 보여 주는 능력을 생각할 때 언제까지 홍콩에 머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로 미국으로 갈지, 아니면 유럽으로 갔다가 미국으로 가실지는 모르지만 결국에는 미국으로 가시겠죠.”

투자자들이 수익률만 생각하면 신흥 시장의 주식시장에 투자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세계적인 투자회사들 대부분이 자산 중 절반 가까운 금액을 미국에 투자하고 있었다.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투자를 한 나라는 영국이고 말이다.

투자자들에게 최종적인 무대는 바로 미국이었다.

지금의 세계적인 불황이 시작된 곳은 미국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미국 달러의 가치는 매일 올라가고 있었다.

투자자들이 안전한 자산을 찾아서 미국으로 몰려간 결과였다.

“미국이라······.”

리안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계속 에드릭과 함께 가고 싶었다.

그와 함께 하는 이상 리안이 주인공이 될 수 없겠지만 그가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리안에게는 가문이라는 책임이 있었다.

리안의 할아버지가 가문을 위해 절강성을 떠나 홍콩으로 온 것처럼······.

리안의 아버지가 가문을 위해서 홍콩을 떠나야 했던 것처럼······.

리안은 가문을 위해서 홍콩에 남아서 가문을 지켜야 했다.

“도련님도 당장 홍콩에는 남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홍콩에는 제가 남겠습니다.”

카이 황의 말에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지금도 에드릭을 따라가기 힘에 부쳐요. 여기 홍콩에서는 제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할 수 있는 일도 없고요.”

리안이 홍콩에 남으려고 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지금 에드릭과 리안의 관계는 서로서로 돕는 관계였다.

에드릭이 리안과 카이 황에게 투자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맡겨 두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될 수는 없다는 것이 리안의 생각이었다.

에드릭은 자신의 5억 달러 재산 대부분을 리안과 카이 황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다.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드릭이 이렇게 거액을 리안에게 맡길 수 있는 단지 그가 리안을 믿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둘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에드릭은 리안과 카이 황이 자신을 감춰 주는 보호막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반면 리안, 아니 더 정확하게는 리안 가문이 원하는 것은 다시 홍콩의 중심 가문이 되는 것이었다.

가문이 돈이 없어서 홍콩 중심 가문에서 밀려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명성이나 평판이 가문에 훨씬 더 중요한 시기였다.

에드릭도 자신의 자금을 별다른 의심 없이 맡길 수 있는 이유였다.

5억 달러는 큰 금액이지만 에드릭이 없는 5억 달러는 그냥 5억 달러일 뿐이었다.

리안은 에드릭과 함께하면 자신이 가진 W&R의 10%의 지분만으로도 훨씬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문이 잃었던 위치를 찾는 것과 동시에 돈까지 벌 수 있었다.

그렇지만 투자금이 5억 달러가 아니라 50억 달러가 되고 100억 달러가 된다면, 아니 그 이상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투자금이 일정 이상의 금액이 되면 믿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도 거액이었다.

리안은 에드릭과 격의 없는 관계로 지낼 수 있는 것은 그때까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달라져야 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에드릭과 리안이 그때까지 얼마나 자신들을 성장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언젠가는 올 수밖에 없었다.

당장 리안 자신부터가 투자금이 그 정도가 되면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에드릭도 리안이나 카이 황이라는 보호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분이 아까워질 수도 있었다.

불장난을 너무 오래 하면 화상을 입는 것처럼······.

인간적인 신뢰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배신을 당하게 되는 법이었다.

“계속 같이 못 가시더라도 남아서 에드릭 님을 도울 일은 많이 있을 겁니다. 에드릭 님 말대로 중국의 경제가 그렇게 성장한다면요.”

“저도 중국이 미국은 따라잡지 못하겠지만 일본이나 독일을 따라잡는 것은 가능하리라 생각해요.”

일본은 장기 불황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워 보였다.

한두 가지 문제라기보다는 일본 정치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였다.

다른 경제 대국인 독일은 통일 이후 아직 동서를 하나로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유럽 통합으로 유럽 다른 국가의 문제까지 떠안은 상태였다.

“저는 세상의 모든 일에는 흐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흐름에 거슬리려고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

“에드릭에게 그런 흐름을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지금까지는요.”

리안의 말에 카이 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하네요. 작년 반년 내내 옆에서 같이 있으면서 한심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걸핏하면 결근하고 출근해서도 책이나 보고서만 읽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참 편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 사람이 순식간에 이런 모습을 보일 줄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리안의 말에 카이 황이 실소를 터트렸다.

“저도 작년에 도련님이 퇴근하셔서 하신 말이 기억납니다.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하셨던가요?”

“제가 쓰레기라는 놈이라는 말까지 했나요? 하긴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었죠.”

“재능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닐 테니 가진 재능을 어떻게 쓸 줄 몰랐던 것이죠. 어쨌든 재능을 막 발견했을 때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도련님과 가문에게는 행운이자 큰 기회입니다.”

“저도 알기는 알죠. 그런데······.”

에드릭에 대해 생각하던 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로 돌아가 봐야겠네요.”

리안이 류오린으로 돌아왔을 때 에드릭은 이미 출근해 휴게실에서 장샤오이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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