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04화 (105/270)

(104)

#105. 살을 주고 뼈를 취하다

1.

“자네가 비만토요 경찰청장과의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지금 그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데 그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반 부카드가 물었다.

그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비만토요는 현재 탄핵 정국의 중심인물이었다.

평소에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지만, 지금처럼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는 더 어려웠다.

그런데 내가 그런 인물과 만날 자리를 마련한다니 저런 표정을 짓는 듯했다.

나는 즉시 해명했다.

“제가 말을 잘못했나 보군요. 직접 연락해서 자리를 만들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가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자는 의미였습니다. 만나도 그 후에 만나야죠.”

내 해명에 이반 부카드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런 말이었군. 나는 비만토요 장군이 혹시나 에이전트 에스 팀이 관리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네.”

“그럴 리가요.”

내가 대답했다.

도움을 요청한 상황에서도 에이전트 에스 팀을 경계하는 듯했다.

당연했다.

외부 팀이란 어차피 정규 조직 밖에 있는 팀이었다.

그런 조직이 군 장성이자 경찰청장과 인연이 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바로 에이전트 에스 팀이 CIA 지부도 모르게 작전을 인도네시아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비만토요 장군을 만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를 만나서 설득하는 일입니다. 최종 탄핵을 진행하는 것이 아민 라이스 의장이고 가장 중요한 장기 말이 비만토요 경찰청장이라면,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는 판을 만드는 플레이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네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군.”

“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번에 끝내 와히드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한 것을 보면 결단력도 있어 보입니다.”

내 말을 들은 이반 부카드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이반 부카드가 입을 열었다.

“자네 말대로 유도요노가 쓸 만한 인물이라면 이렇게 쓰는 것은 아깝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와히드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하는 비만토요 청장이 계속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면, 유도요노 장관도 군을 움직이는 데 가담한다면 유도요노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그렇기는 하겠죠.”

이반 부카드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히드 대통령을 협박하기 위해서 군을 움직이는 일은 쿠데타나 마찬가지였다.

일이 끝나면 그 일에 관계된 장성들은 옷을 벗어야 할 것이다.

다른 보상이 있겠지만 그게 공직은 아닐 것이다.

“군을 움직이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편이 나아 보이네.”

“다른 사람이라니요?”

“인도네시아군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유도요노가 아니지. 현직이 아닌 사람들 중에는 위란토 전 국방부장관과 아구스 참모총장. 이 둘이 군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 아니겠나? 프라보워 수비안토 장군도 있지만 이런 일에 수하르토의 사위를 동원할 수는 없으니 말이야.”

“그렇기는 하지만······. 둘 다 이번 일에 동원하기에는 맞지 않는 인물입니다. 둘 다 너무 위험한 인물입니다.”

위란토는 수하르토가 물러난 이후 군을 장악했던 인물이었다.

부통령이었던 하비비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그가 대통령이었을 때는 인도네시아 최대 권력자로 불리기도 했다.

와히드가 대통령이 됐을 때도 국방부장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동티모르에 대한 일이 세계의 관심을 받으면서 비난이 높아지자 와히드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그를 국방부장관에서 해임했다.

위란토 해임을 건의하고 군의 반발을 무마시킨 사람이 바로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아구스 장군이었다.

아구스 장군은 인도네시아군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도 역시 작년에 해임되었다.

위란토 전 장관이 군 장성들 사이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아구스 장군은 군 장성들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지만 장병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이들을 배제했던 것은 둘 다 군 내의 영향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자칫 군사 쿠데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네. 아구스 장군이야 무슨 조건을 제시해도 군을 동원하는 일에 찬성하지 않겠지만 위란토는 내가 잘 아네. 그는 적당한 대가만 주면 움직일 수 있네.”

“대가라니요?”

“그는 비리도 많고 속이 좁은 인물이지.”

이반 부카드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문득 이반 부카드가 전해 줬던 자료 중에서 위란토가 아구스 장군을 죽일 정도로 미워한다는 내용이 기억났다.

아구스는 위란토를 해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군 연금에서 발생한 대규모 횡령 사건을 조사했다.

아구스의 나이는 이제 52세였다.

그가 가진 개혁적인 이미지와 대중적인 인기를 생각하면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뭐라고 묻기도 어려웠다.

위란토를 끌어들이는 대가로 아구스를 제거할 생각이냐고 묻는다고 해서 이반 부카드가 제대로 된 답을 해 줄 리가 없었다.

“위란토를 통해 군을 움직일 수 있다고 가정하고, 비만토요를 어떻게 이용하자는 말인가? 인도네시아에 있지도 않은 사람을 어떻게 이용하자는 것인지 궁금하군.”

비만토요는 현재 인도네시아에 없었다.

와히드가 사임을 강요하자 건강검진을 이유로 싱가포르로 도주한 상태였다.

“비만토요를 귀국시켜야지요.”

“그를 귀국시키자고?”

“예.”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순순히 돌아오려고 하지 않을 텐데? 거기 서류에 쓰여 있는 것처럼 와히드 대통령은 목요일에 비만토요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릴 예정이야. 그 사실을 알고 비만토요도 싱가포르로 출국한 것이고······.”

와히드 대통령이 비만토요에 대한 경질을 명령하고 다시 비만토요는 그 경질을 거부했다.

그리고 직후에 비만토요는 갑자기 인도네시아를 떠나 싱가포르로 향했다.

직후에 와히드 대통령은 비만토요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린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와히드와 비만토요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라고 할 수 있었다.

비만토요로서는 자연스럽게 경찰청장에서 물러날 명분을 가지게 된 셈이었다.

“그래도 돌아오게 해야지요.”

“국내에 돌아오면 망신을 당할 텐데 돌아오려고 하겠나?”

이런 상황에서 비만토요가 돌아온다면 이런 암묵적인 합의를 깨는 셈이었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이번 작전의 핵심은 작은 희생을 통해서 큰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비만토요를 희생시켜 와히드 대통령을 끌어내릴 생각입니다.”

“음······. 비만토요는 어떻게 설득할 생각인가?”

“비만토요는 어차피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운 좋게 그 자리에 올라간 인물이죠. 적당한 이권을 주면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메가와티 부통령 쪽에서도 계속 그를 경찰청장으로 쓸 생각은 없겠지만 이권을 주는 일은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싱가포르로 가서 그를 설득해야겠군.”

“그렇습니다.”

이반 부카드가 내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자네는 어렵겠고······.”

“아무래도 그렇죠. 제 나이가 있으니 믿음을 주기는 어렵죠.”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는 내가 직접 설득하지. 대신 자네가 해 줄 일이 있네.”

“제가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내가 되물었다.

도대체 뭘 해 달라고 하는 것인지.

“자네가 위란토 장군과의 약속을 잡아 주게. 최대한 은밀하게 말이야.”

나는 이반 부카드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가 위란토 장군과 약속을 어떻게 잡습니까?”

위란토는 비록 국방부장관에서 물러난 지는 1년 이상 지났지만, 여전히 군과 골카당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거물이었다.

CIA 인도네시아 지부를 움직이는 이반 부카드라면 모르지만, 외국인인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네가 아는 사람 중에 위란토와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나.”

“제가 아는 사람 중에요?”

“반공산주의 연맹의 유리코 구테레즈. 왜 자네가 지난번에 만나서 돈을 주고 매수했던 인간······.”

“아······.”

이름을 듣고서야 이반 부카드가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알았다.

“구테레즈 그 인간이 동티모르 학살을 저지를 때 그 명령을 내린 인간이 위란토야.”

“하지만 구테레즈와는 그때 만나서 돈을 주고 지시를 내린 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직접 위란토와 연락할 수는 없고······. 위란토와 직접 연락을 할 수 있는 인간 중에서 그자가 가장 싸게 부려 먹을 수 있는 인간이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계속 이용해야지.”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그의 표정은 단호해 보였다.

구테레즈를 만나서 위란토와의 약속을 잡으라는 지시를 철회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토요일 RSCM에서 보는 것으로 약속을 잡게.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면 거기가 좋을 것 같네. 시간은 10시 정도?”

“RSCM요?”

“자카르타 중심가에 있는 종합병원이네. 인도네시아에서 그나마 쓸 만한 병원 중 하나지. 위란토 쪽에 전하면 그쪽에서도 알아들을 거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게.”

이반 부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반 부카드가 밀실을 나가고 얼마 후 다른 직원이 들어왔다.

그는 나에게 구테레즈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는 서류를 통해 정보를 건네받았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사람을 보내서 알려 주는 것으로 봐서는 나를 구테레즈에게 보낼 생각인 듯했다.

‘단단히 엮인 것 같네.”

아무래도 이반 부카드는 나를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의 말대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계속 이용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포함된 듯했다.

와히드가 대통령에서 쫓겨나기 전에는 인도네시아를 떠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2.

나는 다시 구테레즈 집 담장을 넘었다.

지난번 왔을 때와는 달리 경찰은 없었다.

이미 CIA가 알려 준 정보대로였다.

그에 대한 혐의가 사라졌다기보다는 경찰이 구테레즈에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미 한 번 침입했던 곳이라서 그런지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침실에 들어가니 지난번과는 달라진 것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구테레즈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여자가 함께 자고 있었다.

나는 가지고 온 수면제를 손수건에 적셔서 여자의 코와 입을 감쌌다.

수면제가 퍼질 시간을 기다렸다가 구테레즈를 몸을 흔들었다.

“뭐야······ 귀찮게······.”

구테레즈가 귀찮은 듯 손을 휘저었다.

나는 그의 손을 덜걱 잡았다.

“헉! 너는······.”

구테레즈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구테레즈가 다른 손을 베개 밑으로 뻗었다.

나는 재빨리 그의 몸을 젖히고는 구테레즈보다 먼저 베개 밑에 있던 물건을 꺼냈다.

베레타 92였다.

“너무하네. 지난번에 꽤 말이 통했다고 생각했는데 총부터 찾다니 말이야. 내 부탁을 들어준 덕분에 꽤 이득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보군. 그럼 우린 적인가?”

나는 총구를 구테레즈의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아닙니다.”

구테레즈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친구라는 말이군. 말이 통하는 친구······.”

이번에는 구테레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침대에서 한 걸음 물러나며 총구로 침대 옆에 의자를 가리켰다.

“일어나서 거기 좀 앉지.”

구테레즈는 침대에서 일어나 허겁지겁 잠옷을 입고 의자에 앉았다.

나는 그가 앉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지난번처럼 부탁이 있어서 말이야.”

“부탁이라니요?”

“별것 아니야. 한 사람에게 말을 전해 주는 간단한 일이야.”

“어떤 사람에게?”

“위란토 장관······.”

“위란토 장관님요?”

“맞아.”

“그분은 제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왜 그래? 다 알아보고 왔는데······. 최근 동티모르 선거로 들어선 정부가 위란토 장관과 구테레즈 당신을 고소한 상황이잖아. 그 일 때문에 꽤 여러 번 만났고 말이야.”

“그렇기는 하지만······.”

“당신으로서도 나쁠 것이 없을 텐데? 요즘처럼 불안한 시기에 위란토 같은 거물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어? 특히 당신처럼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은 말이야.”

구테레즈는 동티모르 출신이었다.

하지만 동티모르는 최근 선거로 인도네시아에서 완전히 독립했다.

하지만 구테레즈는 동티모르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마 돌아가는 순간 그가 몇 년 전 동티모르에서 벌인 일에 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구테레즈는 앞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살아야 한다.

뿌리를 잃은 정치인이 오래 살아남는 것은 어려웠다.

“휴······ 알겠습니다. 무슨 말을 전해야 합니까?”

“3년 전 5월 19일에 만났던 친구가 다시 만나기를 원한다고 전해. 장소는 RSCM······. 시간은 오전 10시.”

“3년 전 5월 19일 만났던 친구······.”

내 말을 따라 하던 구테레즈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1998년 5월 19일에 만났던 사람이라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3년 전인 1998년은 5월 19일은 인도네시아에서 한창 수하르토 퇴진 시위가 열리던 시기였다.

다음 날인 5월 20일에 위란토는 학생들이 국회를 점령하는 것을 내버려 뒀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 21일에 수하르토는 쫓겨났다.

19일에 위란토와 이반 부카드가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위란토가 수하르토를 배신한 배후에 미국, 정확하게는 CIA가 있다는 의미였다.

이런데도 나를 보내 구테레즈를 통해서 위란토와 약속을 잡았다.

이반 부카드가 나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다는 구체적인 의사표시였다.

“설마······?”

구테레즈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눈치챈 듯했다.

지난번에 이미 어느 정도는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인도네시아 사람이 아니라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거기까지만! 거기서 더 말하면 내가 방아쇠를 당겨야 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은가?”

“아닙니다.”

구테레즈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품에서 지폐 뭉치를 하나 꺼내 침대 위로 던졌다.

“이건 심부름값이야.”

구테레즈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알겠지만 위란토 장군 외에 다른 곳에서 이번 일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알고 있습니다.”

다시 구테레즈가 고개를 꾸벅하고 숙였다.

아마 지금 그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그가 동티모르에서 죄가 없는 사람들을 학살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이런 비굴한 모습을 보며 저런 쓰레기와 상대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X발, 내가 언제까지 이런 놈까지 상대해야 하는지?’

단테 패트릭에게 명단을 받는 즉시 나 대신 움직일 사람을 구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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