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05화 (106/270)

(105)

#106.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의 약점은 더 쉽게 드러난다

-그래서 다음 주에도 오지 못해?

리안의 목소리에서 당황하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렇게 됐어.”

-언제까지?

“글쎄······? 늦으면 이번 달 말까지? 일이 좀 꼬여서 그때까지는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아.”

-답답하다. 도대체 인도네시아가 뭐 그리 중요한 곳이라고 거기 일에 매달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더 답답했다.

나도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반 부카드는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와히드가 계속 버티고 있는 것에 신경을 쓰는 듯했다.

계속 연락을 해서 이런저런 일을 묻고 있었다.

그나마 안가에서 머물라는 것을 거절하고 호텔에서 묵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를 계속 끌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리안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무슨 소리야. 인구만 2억인 국가야.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큰 국가잖아.”

-차라리 내가 중국이나 인도에 그렇게 공을 들이면 이해가 가겠는데······. 인도네시아가 네가 그렇게 시간을 들일 만큼 중요한 곳인지는 모르겠다. 인구도 많고 지하자원도 많지만 나라 시스템이 개판이잖아.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시스템이 개판이었기 때문에 내가 인도네시아에 잡혀 있는 것이니 말이다.

“네 말도 맞는데, 그렇다고 시작한 일을 끝내지도 않고 돌아갈 수도는 없잖아.”

-알았어, 뭐 어쩔 수 없지. 지난주 보고서는 받았지?

“받았어. 하락장에서 꽤 수익이 났더라고.”

-7.1% 수익률로 3천만 달러 조금 더 벌었어.

하락 포지션에 투자한 것은 큰 성공이었다.

이번 주에도 3천만 달러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

실제 수익은 훨씬 많았지만, 지금까지 밀린 류오린에 지급하는 수수료와 W&R 초기 창업 비용으로 꽤 많은 돈이 지출되었다.

“수고했어. 다음 주 보고서는 네 메일로 보내 놨어. 큰 변화는 없고 미국 나스닥만 상승 포지션으로 바꾸고 다른 곳은 하락 포지션을 유지하면 될 것 같아.”

-미국은 왜? 지금 상황을 보면 미국도 별로 회복 기미가 없어 보이던데?

“내가 알아보니 다음 주 화요일에 그린스펀이 의회에서 이야기한다고 하더라고. 이번에도 금리 인하 가능성을 이야기하면 달라지겠지.

그린스펀의 말 한마디에 미국 주식시장은 움직였다.

이제는 아예 그가 회의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주가가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미국 금융시장에 관한 한 그린스펀이라는 이름은 치트 키였다.

이건 그린스펀이 러시아 외환 위기와 닷컴 버블 과정에서 이미 능력을 보여 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친 면이 있었다.

그만큼 미국의 금융기관들이 현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절망 속에서는 작은 희망이라도 매달리게 마련이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리고 전화기 좀 꺼 놓지 마라. 도대체 왜 계속 전화기를 꺼 놓는 거야?

리안이 전화 연락이 안 되는 것에 대해 불평을 했다.

나도 전화기를 꺼 놓는 것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CIA 쪽 요원들을 만나거나 임무를 할 때는 홍콩에서 사용하던 전화기를 소지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분실했다가는 내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불편하지만 전화기를 꺼 놓고 호텔 방에 잘 감춰 두고는 외출을 했다.

“그만큼 너를 믿는다고 생각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쨌든 뉴스 보면 지금 인도네시아 상황이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던데 조심해.

“전화 고마워. 내가 자주 연락할게.”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내가 홍콩에 있지 않아도 투자는 잘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홍콩에 돌아가면 팀원을 충원할 생각이었다.

리안과 브레이크처럼 모든 것을 맡길 직원은 아니었다.

리안이나 브레이크 같은 팀원을 당장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팀에서 관리하는 자금은 5억 3천 달러가 훌쩍 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처럼 둘이 모든 거래를 일일이 하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둘의 지시를 받아서 단순하게 거래를 할 수 있는 직원들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직원이 더 필요할 정도로 성공적인 투자와는 달리 인도네시아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더니 머리도 어떻게 된 것 아닙니까?”

나는 인도네시아 대통령 대변인의 발표를 통역으로 전해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오늘 와히드 대통령이 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인도네시아 국회가 몇 달 전 결정한 탄핵 투표일은 8월 1일이었다.

그런데 와히드 대통령 측에서는 7월 20일까지 타협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비상 계엄령을 발표하고 그 직후에 의회를 해산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종교 지도자 출신 정치인이 고집이 센 경향이 있지만, 나도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이반 부카드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제가 찾아보니 인도네시아 헌법에는 그런 조항이 없던데요?”

의회 해산권은 기본적으로 의원내각제 국가에서 총리가 가지고 있는 권한이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도 일부 대통령이 의회 해산권을 가진 나라가 있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는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할 권한이 없었다.

그런데도 와히드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의회를 해산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

“없지. 그런데 말이야, 원칙적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대통령은 계엄령이 선포되면 초법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네. 그러니 의회를 해산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지. 실제 그런 경우도 있었고 말이야.”

“그렇습니까?”

이제야 어느 정도 와히드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내 질문에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메가와티 부통령의 아버지인 수카르노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인 1959년에 의회를 해산했지. 그게 수카르노 수하르토로 이어진 40년간의 독재의 시작이었네.”

“그랬군요.”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네.”

“상황이 다르다니요?”

“수카르노가 그때 계엄령을 발동하고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던 것은 독립을 이끈 국부라는 상징적인 위치와 군과 경찰을 장악했기 때문이네. 하지만 지금 와히드는 군과 경찰 모두를 장악하지 못했지. 그래서 타협안을 제시한 거고 말이야.”

“하지만 그 타협안이라는 것이 문제 아닙니까? 와히드 측에서 내놓은 타협안은 제가 보기에도 어이가 없더군요. 자신에게 ‘국부’라는 상징적인 역할을 부여해 주면 대통령직에서는 물러나겠다니······. 이건 대통령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대통령 위에 상왕으로 군림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메가와티 측에서 이걸 받아들이겠습니까?”

이반 부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가와티 측에서는 이미 탄핵 쪽으로 결심을 굳혔네. 이제 탄핵이 되면 바로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데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지. 더구나 국부라니······. 메가와티로서는 아버지인 수카르노가 받는 위치를 와히드에게 보장할 리가 없지.”

와히드가 국부로 자신을 추대해 주면 물러나겠다고 하는 것은 수하르토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에도 ‘수카르노’를 예우한 것을 참고한 듯했다.

수카르노는 대통령에서 쫓겨난 후에도 나름 안락한 노후를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물론 대통령에서 쫓겨난 사람이 진짜로 편안한 노후를 즐겼는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형사처분은 받지 않았다.

당장 이런저런 부정 혐의가 있는 와히드로서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대세가 완전히 기운 상태였다.

와히드가 이끄는 NU가 소속원이 4천만 명이라고는 하지만 인도네시아 인구의 20%에 불과했다.

물론 많다면 많은 수였지만 NU의 소속원이라고 전부 와히드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와히드의 소속 정당 의원 수가 전체 의원 수의 10%에 불과할 리가 없었다.

“정보원들의 말에 의하면 메가와티는 측근들에게 이제야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고 하더군.”

“역시 그렇군요. 하긴 뭐, 지난번 대선에서 골카당이 와히드를 지지하지 않았다면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됐을 테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새롭게 합의된 제도에서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은 선출하는 것은 의회였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절차를 하나 더 거쳐야 하지만 그건 의회의 결정을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대선 전에 있었던 총선에서 메가와티는 의회에서 최대 의석을 차지했다.

의석 수로만 보면 당연히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수하르토의 출신 정당이었던 골카당은 자신들의 최대 정적인 메가와티가 대통령을 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와히드였다.

와히드가 의회 의석 수 10%만 가지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와히드로서는 하늘에서 대통령 자리가 떨어진 것이지만 메가와티로서는 다 잡았던 대통령 자리를 빼앗긴 셈이었다.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비만토요 청장은 싱가포르에서 귀국해서 경찰청에 복귀했네. 와히드 대통령이 사임하라고 압박하고 있지만, 거부하고 있지. 아마 때가 되면 기꺼이 희생양이 되어 줄 거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위란토 전 장관도 군대를 움직이는 데 협조하기로 했고 말이야.”

“아미엔 라이스 국회의장 쪽은 어떻습니까? 비만토요 청장을 통해 명분을 만들고 군을 움직여 압박하든 결국 탄핵이 결정되는 것은 의회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접촉하고 있네. 만약 의회에서 탄핵이 통과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이니 말이야.”

“군을 움직여서 억지로 와히드를 물러나게 한다면 겨우 잠잠해진 군이 다시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더욱이 이런 방법은 인도네시아 국민들이 용인할 리가 없습니다.”

내가 아미엔 라이스를 처음 이번 일에 가장 중요한 세 명 중 하나로 꼽은 이유였다.

그중에서 대체 불가능한 인물이 아미엔 라이스였다.

군이 움직일 명분은 줄 사람은 비만토요가 아니어도 찾자면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군을 설득하는 유도요노의 역할은 위란토로 이미 대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탄핵 투표를 이끌 아미엔 라이스를 대신할 사람은 없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아미엔 라이스 의장은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아미엔 라이스는 와히드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경쟁자였던 사람이네. 나름대로 개혁에 대한 신념도 있는 인물이고 말이야.”

아미엔 라이스와 와히드는 여러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인도네시아 최대 이슬람 단체의 지도자였다가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들이 이끌었던 이슬람 단체 중에서 와히드가 이끌었던 NU가 조금 더 컸다.

하지만 아미엔 라이스가 이끌었던 단체도 소속원이 수천만 명이 넘었다.

와히드 대통령과 아미엔 라이스 의장은 태생적으로 적이 될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우선 아미엔 라이스에게 연락해서 의원들을 자카르타에 모으라고 하십시오. 혹시 와히드가 진짜로 계엄령을 발동하려고 하면 바로 탄핵을 진행할 수 있게요.”

예정된 탄핵일은 8월 1일이었다.

하지만 와히드가 7월 20일을 협상안 마감으로 정한 이상 의원들도 비상대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건 이미 의회 쪽에서도 알아서 준비하고 있네.”

하긴 내가 생각하는 것을 정치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이제 7월 20일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군요.”

나는 이반 부카드를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야 그렇지. 자네가 그동안 수고 많았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나는 이반 부카드의 말에 이제 인도네시아를 떠나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이어지는 이반 부카드의 말에 무너졌다.

“이미 본부에서 자네 팀에 메일을 보내 놓았다고 하더군. 자네가 인도네시아를 떠나진 못하지만 이제 쉬어도 되네.”

인도네시아를 떠나지 못하게 하면서 어떻게 쉬라는 말인가?

이반 부카드의 다음 말에 나는 더 기가 막혔다.

“참, 그리고 언제 연락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 전화기를 꼭 가지고 다니고 말이야.”

순간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 휴식이라는 말인가?

나는 호텔로 돌아가서 일본의 단테 패트릭이 보내 준 명단을 꺼냈다.

이렇게 된 것 미뤘던 팀원 면접이나 봐야겠다.

물론 내가 보려는 면접은 투자회사의 팀원을 뽑는 면접이 아니었다.

암호로 된 명단은 크게 두 가지였다.

그중 내가 선택한 것은 한국의 국정원과 특수부대 퇴직자의 명단이었다.

‘쓸 만한 사람이 있으려나?’

이제 혼자서 뛰어다니는 것은 그만둘 때였다.

그리고 이제 한국에서도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