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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복수를 서두를 필요는 없다
1.
어느 카센터 사장님의 아침.
세수하고 나와 보니 이제 중학생인 남매는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나왔는데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섭섭하기도 했지만 이해가 가기도 했다.
임무 때문에 아이들이 한창 자랄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했다.
해외 근무를 끝내고 돌아오면 부쩍 아이들은 커 있었다.
처음에는 낯선 자신을 보면 울던 아이들이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바뀐 지 몇 년이었다.
그건 국정원을 퇴직하고 카센터를 차린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있어 줄 시간을 아이들이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아이들이 너무 커 버린 것이다.
정작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도 정윤호 자신도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당신도 거기 앉아서 드세요.”
아내가 말했다.
정윤호는 아내의 말에 따라 빈자리에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그녀는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먼저 말을 걸어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내와도 서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정원을 퇴직한 이후 국내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이후에는 사이가 더 나빠졌다.
어릴 때 떨어져 있어서 아이들과의 관계가 나빠졌다면 최근 아내와는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부인을 대하는 정윤호도 자신감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내는 대학 시절 학교 후배였다.
대학을 다닐 때부터 사귀었던 둘은 당시에는 안기부였던 국정원에 입사하고 얼마 후 결혼했다.
아이들은 지금도 자신이 어디에서 일했는지 모르지만, 아내는 입사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응원해 주었다.
아내는 지금 한국 대기업의 간부였다.
정윤호는 2년 전까지만 해도 국가를 지키는 정보기관의 요원으로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카센터 사장인 지금은 아내에 비해서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억울했다.
여자인 아내가 대기업에서 간부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데는 자신의 도움도 있었다.
아니, 꽤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하다니······.
이런 말을 하고 싶지만 할 수가 없었다.
국정원을 그만두면서 받은 퇴직금 거의 전부를 사업 실패와 주식 투자로 날렸다.
지금 하는 카센터는 아내가 준 돈으로 마련했다.
국정원 해외 부서 엘리트였던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국정원을 나올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지만, 세상은 혹독했다.
국정원에 있을 때도 한국 사회에서 사업을 하려면 인맥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국정원에서 일했던 자신에게는 그런 인맥이 없었다.
다른 요원도 마찬가지지만 대부분의 국정원 요원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국정원에 있을 때는 이런 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맥으로 돌아가는 사회에 나오면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큰 단점이 된다.
사업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투자했던 주식은 코스닥 거품이 꺼지면서 휴지 조각이 되었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경력도 없고 인맥도 없는 사람에게 한국 사회는 냉혹했다.
퇴직한 30대 후반 국정원 직원이 다시 취직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안기부 직원 중 10% 이상을 사실상 해고했다.
안기부 직원 수백 명이 IMF가 한창이던 시기에 세상에 내몰린 것이다.
그나마 있는 안기부 직원이 필요한 곳은 이런 사람들이 이미 다 자치했다.
정윤호는 그런 퇴직자 중에서도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그에게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힌 상태였다.
억울했다.
김대중 정부는 안기부를 국정원으로 바꾸고 초대 국정원장으로 이동훈 씨가 임명되었다.
이동훈 국정원장은 한국이 외환 위기를 겪은 것이 해외 경제 정보 수집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해외 경제 정보 분야를 강화했다.
이런 방침 때문에 경제학과 출신이었던 정윤호는 영남 출신 요원들의 해고 열풍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동훈 국정원장이 정부 내 호남 인맥에 밀려나서 사직한 이후 정윤호가 참여했던 해외 경제 정보 부서도 대폭 축소되었다.
정윤호도 결국 국정원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 더 근무했다는 이유로 그는 배신자가 되었다.
정윤호는 대충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도 식사를 다 마쳤는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아이들을 보며 물었다.
“태워다 줄까?”
아이들은 잠시 정윤호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지하철 타고 가는 게 빨라요.”
“그래, 조심하고······.”
아내도 어느 사이에 준비를 마쳤는지 함께 아파트를 나왔다.
주차장에서 타를 차고 나오다 보니 딸의 모습이 보였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게 빠르다는 딸은 아파트 입구에서 서 있었다.
아마도 아내의 차를 기다리는 듯했다.
정윤호는 모른 척 딸의 옆을 지나 카센터로 향했다.
카센터에 출근해 보니 이미 직원은 출근해서 영업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나이는 자신보다 열 살 정도 아래였다.
오래 일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하고 실력도 좋았다.
요원으로 일하면서 대충 배운 자신보다 훨씬 나았다.
카센터를 연 지 1년 조금 넘었는데도 소문이 났는지 고객들도 자신보다 직원이 고쳐 주는 것을 원했다.
출근해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이런 일에도 밀려나니, 엘리트 국정원 요원이었다는 자긍심은 이미 사라졌다.
뭔가 쓸모없고 뒤처지는 느낌이었다.
컴퓨터를 켰다.
그나마 인터넷이 정윤호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인터넷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메일을 확인했다.
대부분이 광고였지만 좀 특이한 메일이 하나 있었다.
자신과 일을 같이하고 싶다는 메일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클릭했다.
내용은 제목과 마찬가지로 면접을 하고 싶으니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황당하게도 면접 장소는 한국도 아니고 인도네시아였다.
“어떤 새끼야, 할 일도 더럽게 없나 보네.”
한글로 구인 메일을 보내면서 인도네시아에서 보자니······.
이런 메일을 읽고 화를 낼 정도로 자신이 몰렸나 하는 생각에 더욱 우울해졌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후에 온 등기우편 안에 내일 날짜로 되어 있는 자카르타행 항공권과 1만 달러 수표가 들어 있었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비싼 장난이었다.
순간적으로 요원 시절 자신에게 원한을 가졌던 자들이 판 함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제기랄······. 누가 나를 돈까지 들여 가면서 외국으로 유인하겠어.”
자신은 북한 대공 부서도 아니어서 북한이 자신을 유인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 중요한 인물이었으면 이 모양 이 꼴로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함정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자신이 사회에서 낙오된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일 테니 말이다.
적어도 누군가는 자신을 제거할 필요를 느낄 정도의 가치는 있는 인물일 테니까.
어차피 생명보험도 있었고, 자신이 없더라도 아내는 자식들과 잘 먹고 잘살 것이다.
직원에게 임시로 사람을 구해서 함께 일하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윤호는 아내에게 잠시 여행을 간다는 말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굳이 걱정을 끼칠 필요는 없었다.
저녁 비행기를 타고 자카르타행 비행기를 탔다.
약속 장소는 리츠 칼튼 자카르타 퍼시픽 플레이스 호텔 커피숍이었다.
장소를 본 정윤호의 생각은 ‘돈은 많나 보네.’였다.
리츠 칼튼 자카르타 퍼시픽 플레이스 호텔은 5성급 호텔 중에서도 가장 최고급이었다.
그리고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이곳은 일을 벌이기에는 보안이 철저한 곳이었다.
아무리 몰려도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서 개죽음당할 생각은 없었다.
2.
나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오는 정윤호를 확인했다.
사진에서 본 그대로였다.
정장을 입고 있는 모습은 지금 하고 있다는 카센터보다는 평범한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이 더 어울렸다.
그는 능력은 있었지만 90년대 말에 있었던 세계적인 정보기관 구조 조정으로 인해 밀려난 사람 중 하나였다.
나로서는 쓸 만한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었지만 듣자니 여기저기서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정윤호처럼 퇴직한 이후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요원들은 많았다.
그나마 정윤호는 평범하게 착실하게 살고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국가에 충성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 중에 범죄에 빠지거나 더 나아가 국가에 복수하려는 사람이 나오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가장 최악은 러시아의 레드 마피아였지만 단지 러시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실제 세계 여러 정보기관이 꽤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정윤호는 내 얼굴을 보고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어리기 때문일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에드릭 손, 한국 이름은 손재원이라고 합니다.”
나는 인사를 하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윤호가 당황하며 내 손을 잡았다.
“아······ 정윤호라고 합니다.”
“앉으시죠.”
정윤호가 어정쩡한 자세로 앉았다.
“비행기표를 보내신 분이 맞습니까?”
정윤호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보낸 것이 맞습니다. 메일 내용 그대로 같이 일을 해 보고 싶어서요.”
“저를 어떻게 알고······?”
정윤호는 물었다.
그는 어느 사이에 냉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CIA도 마찬가지였지만 안기부 지금의 국정원도 퇴직한 이후에도 직원의 신상 정보는 비밀이었다.
“아는 분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어디서 일을 하셨는지도 알고 있고요. 특히 해외에서 꽤 오래 일을 하셨다고요?”
“그런 식으로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정확히 누구에게 제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까?”
정윤호가 다시 물었다.
“이름을 들으셨겠지만 전 미국 교포 2세입니다. 당연히 정보를 들은 곳도 그쪽이죠. 아시겠지만 한국의 비밀 중에서 미국이 모르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하더군요. 그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고요.”
내 말에 정윤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정윤호가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을 같이하자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 생각이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직무상 알게 된 정보를 퇴직 후에는 지켜야 합니다.”
정윤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가 흥미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자카르타는 직항편도 비행기로 7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자카르타까지 날아온 순간 이미 끝난 이야기였다.
“일단 식당으로 옮길까요? 비행기를 타고 오시느라 식사도 못 하셨을 텐데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하시죠. 여기 중식이 먹을 만하더군요.”
우리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둘만 있는 별실이었다.
식사가 나오자 나는 명함을 꺼내 정윤호에게 건넸다.
“홍콩 류오린 투자회사 팀장 에드릭 손? 투자회사?”
정윤호가 명함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한국에 꽤 큰돈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생각이고요. 그 일을 도와줬으면 합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정윤호가 수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아니었다.
그게 전부라면 굳이 단테 패트릭을 통해서 한국 정보기관 퇴직 직원의 명단을 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연하죠. 정윤호 씨가 일하면서 얻은 정보는 필요 없습니다. 왜, 제가 북한 스파이······ 아니, 한국에서는 간첩이라고 부른다죠. 제가 간첩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이십니까? 일하다가 그런 의심이 든다면 언제든지 한국 정보기관에 신고하셔도 됩니다. 한국은 그런 경우 포상금도 준다면서요?”
내 말에도 정윤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중에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한국의 재계 정보를 모아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일이죠.”
“개인적인 일이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뭐 흔한 일이죠. 복수라고나 할까요? 제 아버지는 한국에서 사시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습니다. 본인의 뜻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가 한국을 떠나올 때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 일을 조사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 말에 정윤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일이라면 흥신소에 맡겨야 하는 것 아닌가요? 굳이 왜 저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시는 이해가 가지 않네요.”
“저는 권력, 특히 안기부까지 관계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윤호 씨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는 것이고요.”
“안기부가 관련됐다고요?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뭐 60년대와 70년대는 아버지 같은 경우가 흔했다고 하더군요. 간첩으로 잡아들이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는 조건으로 해외로 추방되는 일이요. 제가 알아보니 지금은 아버지 재산이 엉뚱한 사람들 손에 들어가 있더군요.”
아버지의 일은 내가 CIA에 들어가 출세하려던 이유 중 하나였다.
권력, 특히 미국을 등에 업은 권력이라면 한국에서는 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예전에는 권력으로 하려고 했다면 이제 그것을 돈으로 해 볼 생각이었다.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
영화 대부에서 돈 콜레오네가 말했듯이 복수는 차갑게 식었을 때 최고인 요리와도 같다.
정윤호는 그 준비를 위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