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07화 (108/270)

#108. 호랑이를 탄 이상 계속 갈 수밖에 없다

1.

정윤호는 내 제안을 별다른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그의 이런 행동에 나는 조금은 놀랐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오래된 일이어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도 어렵지만, 관련자 중에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인물이 된 사람도 있지만 거물이 된 인물도 상당수가 있거든요.”

내가 말했다.

제대로 된 각오 없이 일을 같이하다가 나중에 포기하면 곤란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각오 없이 일을 맡을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습니다.”

정윤호가 대답했다.

말을 하는 그의 눈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의욕에 찬 눈빛이었다.

“지금 결정하지 마시고 다음 달 초까지 생각해 보시고, 만약 결심이 서시면 홍콩으로 와서 전화를 주십시오.”

내 말에 정윤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시간을 주실 필요는 없는 것 같지만, 알겠습니다.”

“자카르타에 오셨으니 관광을 하면서 좀 쉬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정윤호가 손을 저으며 입을 열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집에 잠시 여행을 가겠다고 하고 왔거든요.”

“피곤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겨우 7시간 비행기를 타고 온 일로 피곤하면 그 생활을 그렇게 못 했죠. 더구나 비즈니스석 탑승권을 보내 주셔서 편하게 왔습니다.”

나는 문득 정윤호가 경력 대부분을 해외 정보 부서에서 일한 것을 떠올렸다.

아마 그때부터 해외여행을 하는 것에 익숙한 듯했다.

“어차피 가장 빠른 서울행 비행기는 내일 아침 8시에나 있습니다. 오늘은 호텔에서 푹 쉬시고 내일 아침에 공항으로 가시면 됩니다.”

나는 안주머니에서 항공권과 호텔 키 그리고 봉투를 꺼내 정윤호에게 건넸다.

바로 다음 돌아갈 것을 예상해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손에 든 물건들을 보던 정윤호가 입을 열었다.

“이건 무슨······.”

“오늘 묵으실 호텔 방 키와 내일 아침 서울행 항공권 그리고 여기까지 오시게 한 면접 비용입니다.”

“돈은 됐습니다. 서울에서 이미 1만 달러를 받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정윤호가 봉투를 돌려주며 말했다.

“준 돈을 돌려받을 수는 없죠. 그럼 이렇게 하죠, 계약금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하시던 일을 정리하자면 이런저런 비용이 들 테니까요. 일을 같이할 수 없다면 그때 돌려주셔도 됩니다.”

정윤호는 내가 돈을 돌려받기를 거부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았다.

나는 일을 핑계로 그와 헤어져 방으로 올라왔다.

정윤호를 시작으로 한국 쪽 인원을 조금씩 보강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내년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사람은 한국 쪽 인원이 아니라 CIA의 일을 도와줄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CIA 퇴직자 중에서 인도네시아로 불러들일 사람은 없었다.

인도네시아 일을 끝내야 뭘 하든 할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인도네시아에서의 일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2.

샤워를 하고 거실로 나와 텔레비전을 켰다.

텔레비전에서는 CNN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당장에라도 큰일이 날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방송에서는 G8 정상회담에 관한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스를 틀어 놓은 채 나는 정윤호를 만나러 내려가기 전에 보고 있던 투자 관련 서류들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인도네시아의 상황이 급해도 할 일은 해야 했다.

직원도 한 명 늘었으니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인터넷을 통해 세계 주가를 확인했다.

주가 하나를 확인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홍콩 센트럴은 홍콩 금융기관이 집중된 곳이라서 인터넷이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자카르타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특급 호텔이라서 그나마 빠른 편이라는 데도 조금은 답답했다.

예상했던 그대로 미국을 제외한 투자한 곳 모두 주가가 내림세를 보였다.

다른 때라면 미국의 주식시장이 오르면 다른 곳도 동반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 주식시장이 반등했는데도 다른 시장들은 하락 폭이 줄어들었을 뿐 특별한 반등 계기가 보이지 않았다.

전 세계 주가가 이런 식이라면 아무리 미국의 주식시장이라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뉴스를 확인하고 투자 보고서를 빠르게 완성해서 리안에게 보냈다.

보고서를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아서 휴대전화로 전화가 걸려왔다.

리안이었다.

“메일 확인했어?”

-확인했어. 그런데 이번 주에도 못 오는 거야?

“지난주에 말했잖아. 하순까지는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듣기는 했지. 그런데 너는 괜찮은 거야? 인도네시아 상황 심각하던데?

“여기가 무슨 팔레스타인도 아니고. 특급 호텔에 머무는 데 무슨 일이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

“빠르면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에는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하여간 넌 너무 여행을 좋아하는 것이 탈이야. 어떻게 붙어 있지를 않네.

리안의 말에 나는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여행을 좋아한다고? 미국에서 날 알던 친구들이 들으면 농담이 심하다고 할 말이네.”

홍콩에 오기 전까지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영국으로 유학하러 가기 전에는 해외여행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의 유명 관광지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운동하고 공부하고 남은 시간 대부분을 책을 읽으면서 보냈다.

그런 내가 지금 아시아 각국을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했다.

“일 이야기나 하자. 보고서는 읽어 봤지?”

-지금 읽고 있어. 미국을 포함해서 러시아 빼고는 모두 하락 포지션이라는 말이지?

“맞아.”

-러시아는 미국 부시 대통령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 때문에 상승할 거로 생각하는 거야?

자카르타에 있는 동안에도 리안과는 전화와 메일을 통해서 투자 정보를 주고받았다.

리안이 보낸 정보 중에는 브레이크가 알아낸 정보도 있었다.

“어느 정도는 맞아. 브레이크가 그 정상회담에서 핵무기 감축 합의가 있을 거라면서?”

-응, 브레이크가 자신의 러시아 측 정보원에게 들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것만으로 주식시장이 상승할 거라고 보는 것은 좀 무리 아니야?

“다음 주에 OPEC 회의도 있잖아. 거기서 추가 석유 감산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어.”

러시아 경제에서 석유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석유 감산은 러시아 경제에 좋은 소식이었다.

-석유 감산 합의? 그걸 어디서 들은 거야?

“인도네시아도 OPEC 회원국이잖아.”

석유 감산 합의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들은 것은 우연이었다.

인도네시아 정국이 불안하고 공무원들도 정신이 딴 곳에 팔려 있다 보니 이런 정보를 얻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능력이 좋은 것인지 운이 좋은 건지······. 어디서든 돈이 될 정보를 얻나 보네.

“운은 무슨, 능력이지. 자세한 이야기는 홍콩에 가서 이야기하자.”

-알았어.

리안이 전화를 끊었다.

3.

와히드 대통령이 야당에 통보한 협상 시간 마감은 20일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야당은 20일이 지나도록 와히드 협상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 날인 21일.

나는 이반 부카드와 CIA 안가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화통화를 마친 이반 부카드가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와히드 대통령이 비만토요 청장에 대한 체포를 지시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네.”

와히드 대통령이 사퇴하지 않고 버티는 비만토요 청장을 체포를 지시한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비만토요 청장을 체포하고 경찰을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그다음은 계엄령 선포였다.

비만토요 청장은 계획 시작부터 준비된 희생양이었다.

그가 얼마나 잘 죽느냐에 따라서 대세를 굳힐 수 있었다.

“기다리던 때가 왔군요. 기자들은 준비됐습니까?”

내가 물었다.

어차피 와히드를 제거하는 일은 국민의 여론과 명분의 싸움이었다.

비만토요 경찰청장이 체포된다고 해도 그 사실을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지 못하면 효과는 작았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기자들이었다.

비만토요 청장이 체포되는 모습을 생생히 내보냄으로써 와히드 대통령의 행동이 얼마나 강압적인가를 보여 줘야 했다.

“이미 준비됐네.”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체포 장면을 기사로 내보낸다는 것은 이미 방송국과 신문사마저 와히드에 등을 돌렸다는 의미였다.

“아구스 전 참모총장 쪽은 어떻습니까? 와히드 대통령이 그에게 국방부장관을 제안했다고 하던데요?”

와히드 대통령은 경찰만을 장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군을 장악하려는 시도도 함께하고 있었다.

와히드가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좋은 패는 바로 인도네시아군 개혁의 상징 아구스 전 참모총장이었다.

그는 위란토 전 국방부장관과 함께 인도네시아군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두 명 중 하나였다.

“이미 거절한 것을 확인했네.”

“좋네요.”

내 예상이 맞는다면 아구스 전 참모총장으로는 살아날 기회를 놓친 것이지만 어차피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초조하게 우리가 기다렸던 뉴스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우리가 기다렸던 뉴스가 방송을 통해 나오기 시작했다.

방송에서는 비만토요 경찰청장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잡혀 가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와히드는 이제 끝났군.”

이반 부카드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방송에서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간단했다.

와히드 대통령은 경찰청장조차 저렇게 끌고 가는 인물이다.

그런 와히드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저런 일이 인도네시아에서 일상이 될 것이다.

다른 나라였다면 효과가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는 아니었다.

인도네시아의 독재자인 수하르토가 쫓겨난 것이 겨우 몇 년 전이었다.

인도네시아 국민 대부분은 수하르토가 집권하던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저런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시절을 자신들의 손으로 무너트린 것이 겨우 몇 년 전이었다.

비만토요의 모습은 곧 자신들의 모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자카르타에는 와히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불길처럼 확산하였다.

그리고 인도네시아군은 전격적으로 병력 4만 명을 동원해서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하지만 대통령궁을 둘러싼 군의 총구가 향한 곳은 시민들이 아니라 대통령궁이었다.

시민들과 뜻을 같이한 것이다.

그리고 23일.

인도네시아 의회는 회의를 열어서 와히드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공식적으로 와히드가 대통령에게 쫓겨난 것이다.

아직 와히드가 대통령궁에서 버티고 있지만, 그가 대통령궁에서도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탄핵안이 통과됐다는 뉴스를 보자마자 나는 이반 부카드를 찾아갔다.

이반 부카드가 나를 반갑게 맞았다.

그는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는지 피곤해 보였다.

“수고했네. 와히드를 몰아내는 데 자네 계획이 큰 도움이 됐어.”

이반 부카드가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이반 부카드의 말에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와히드 대통령은 이미 4월에 끝났죠. 본인의 고집으로 버틴 것뿐이고요.”

“자네 말대로 오래전부터는 와히드가 쫓겨나고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확실했지. 하지만 자칫 있을 수 있는 유혈 사태가 없이 나름 평화적으로 탄핵을 성공시키는 데는 자네 계획이 중요한 역할을 했어. 덕분에 인도네시아 국민의 여론은 완전히 와히드에 돌아섰네.”

정보에 의하면 와히드는 심지어 성전을 선포할 계획까지 있었다.

자신의 지지 기반인 NU를 동원할 계획이었다.

“저는 그냥 의견을 낸 것뿐입니다. 일이 다 끝난 것도 아니고요. 메가와티 부통령, 아니 메가와티 대통령이 됐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내가 말했다.

“자네 말대로네. 진짜 문제는 메가와티가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일지도 몰라. 듣기로는 대중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굉장히 외골수라고 하던데······. 더욱이 아버지 수카르노 때부터 공산권 국가와 가깝고 말이야. 뭐, 지금 공산권 국가라고 해 봐야 중국, 베트남, 북한, 쿠바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골칫거리들이지.”

말을 마친 이반 부카드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벌써 와히드가 물러난 다음을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괜히 괜한 말을 했다가는 엮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째 그 걱정에 은근슬쩍 나를 낄 생각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걱정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내가 지금, 이 고생을 하는 것도 지난번 작전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작전의 목표는 와히드를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이었고 그 일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나중 일은 그때 생각하죠. 저는 빨리 팀에 돌아가 봐야 합니다.”

이반 부카드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알겠네. 이번에 자네 도움은 내가 잊지 않겠네.”

나로서는 그가 빨리 잊어 주기를 바라지만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실패하기 위해 엉터리 계획을 낼 수도 없고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런 방법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성공은 수많은 아버지가 있지만, 실패는 고아라는 말이 있다.

내가 계획을 성공을 계속하는 이상 나와 같이 일했던 요원들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내 계획이 실패하면 그 사람들은 내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됐을 때 나를 보호해 줄 수단이 현재로서는 없었다.

호랑이를 탄 이상 계속 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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