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은혜는 두 배로 열 배로 갚아라
리안과 나는 내일 있을 투자 회의를 위해 내 집에서 만났다.
먼저 한 이야기는 거래를 2팀에 맡긴 일과 그 조건이었다.
내가 장 팀장과 한 이야기를 듣고는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장 팀장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말이지? 그 자존심에 아무리 이익이 되어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줄 알았더니 의외네.”
“대신 W&R의 홍콩 선물 투자도 2팀에 맡기기로 했어.”
내 이야기를 듣던 리안이 물었다.
“혹시 장 팀장에게 마음이라도 있어?”
리안의 말에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건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잖아.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 2팀 상황이 우리가 일을 맡기면 더 안 좋은 조건이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잖아. 자존심 때문에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한 거지. 그런데 거기에다가 홍콩 선물까지 맡겼다니 하는 말이야.”
거래 마지막에 순간 조금 흔들렸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애써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 필요해서 한 일이야. 내가 생각해 보니까 어차피 내년에 독립한 이후에는 트레이더가 많을 필요가 없더라고······.”
“그렇기는 하지. 우리가 증권 업무를 할 것도 아닌 이상 말이야. 거래 시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만 있으면 실제 매매는 증권사에 맡겨도 충분하잖아.”
내년에 RAM을 청산하고 AAM은 W&R에 합병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W&R은 외부 투자 없이 나와 리안의 자금만을 투자하는 패밀리 오피스로 키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우리가 직접거래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매매는 증권사에 위임하면 간단했다.
굳이 팀 내에서 트레이더를 팀원으로 채용해서 키울 필요가 없었다.
직원을 매매만 시켰다가 내년에 W&R로 데려가도 시킬 일이 없었다.
“계약이 1년, 아니 11개월이나 남았는데 이왕이면 류오린과도 좋게 지낼 필요도 있고 말이야.”
요즘 상황이라면 내년에 내가 회사를 나가면 류오린의 매출이나 이익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류오린이 망할 리가 없었다.
어차피 류오린의 존재 목적은 자체의 이익보다 중국과 세상을 이어 주는 통로였다.
“그게 전부야? 정말 장 팀장에게 마음이 조금도 없어? 그렇게 미인인데?”
리안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무슨 인생 망칠 일 있어? 어떤 꽃은 그냥 멀리서 볼 때가 좋은 법이야.”
“꽃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나 보네.”
리안이 물었다.
그는 집요하게 추궁했다.
당연하지만 나는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너야말로 장 팀장에게 관심이 많나 보네. 미인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지?”
“내가 무슨 관심이 있다는 거야.”
내 말에 리안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아닌 것 같은데······. 너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약혼녀가 바로 옆에서 일하고 있는데도 일하러 와서 다른 여자 이야기만 하다니······. 그것도 조민 씨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여자를 말이야. 조민 씨가 네가 장 팀장을 미인이라고 부른 일을 알면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리안이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생사람을 잡는 거야! 일 이야기나 하자, 일!”
나는 당황하는 리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가 그러자면 그렇게 해야지.”
리안은 잠시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지난 한 주 수익률은 거기 보고서에 나온 그대로야.”
“아주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네.”
“W&R만 따지면 대충 3%의 수익률이니 그런 셈이지. 예상대로 러시아를 제외한 금융시장에서 하락하기는 했는데······. 거기 보면 알겠지만, 갑자기 일본의 증시가 올라서 일본에서의 수익률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각종 경제 지표가 최악인데도 일본 증시는 조금이나마 올랐다.
심지어 고이즈미 정부가 공공연하게 인위적인 경기 부양책을 내놓을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나온 상승이었다.
“고이즈미 정부에 대한 일본인의 지지는 정말 놀라울 정도야. 최고 80%까지 올랐던 지지율에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60% 후반대의 지지율인데······. 아니, 이런 최악의 경제 상황에서 저런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라니까.”
어느 국가든 대통령의 지지율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단일 요소는 경제였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경제 상황이 나쁜데도 여전히 많은 일본 국민이 고이즈미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럼 일본 증시가 오른 것도 고이즈미에 대한 신뢰 때문인가?”
“지금으로서는 그렇다고 봐야지. 며칠 후에 있을 상원 선거가 끝나고 경제 개혁이 시작되면 일본 경제가 나아지리라 생각하는 듯해.”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보기에는 일본의 경제 상황은 어지간한 개혁으로는 어림도 없어 보이는데 참 신기하네. 직전 총리였던 모리 때나 지금이나 경제가 나쁘고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나빠졌는데 모리는 5%의 지지율이었고 고이즈미는 60% 후반대의 지지율이라니······”
“고이즈미가 믿음을 주는 얼굴인가 보지.”
리안이 말했다.
“뭐 그렇기는 하지.”
어딘가 탐욕스러워 보이는 모리 전 총리와는 달리 고이즈미가 선량해 보이고 상대적으로 미남이기는 했다.
하긴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이후 정치도 얼굴로 하는 시대가 된 지 오래였다.
고이즈미는 텔레비전 시대에 맞는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대충 지난 한 주 정리는 그렇게 하고······. 다음 주는 다시 전체적으로 상승 포지션을 잡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주식시장이 다시 오를 것 같아?”
“전체적으로 떨어졌으니 잠시 반등 정도는 할 것 같아. 여기서 더 떨어지면 다우존스 지수가 1만 포인트 이하로 떨어지는 셈인데······. 그걸 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우지수가 1만 포인트 이하로 떨어진다고 해도 냉정하게 말해서 큰 의미는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주가지수에 심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는 한다.
“알았어, 나도 주가 방향에 대해서는 비슷한 생각이야. 내일 회의에게 그렇게 방침을 정할게. 그런데 너 내일도 오후에 출근할 거야?”
인도네시아에 가기 전 나는 리안에게 투자 회의를 맡기면서 오후에 출근했었다.
리안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목적이었었다.
“그러려고······.”
“나를 생각해서 오후에 출근하는 것은 좋은데 이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으니 회의에 참석하는 게 낫지 않아?”
“조금 더 자리가 잡히면······. 그리고 내일은 너 때문이 아니라 W&R에 가서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아저씨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카이 황 씨에게 볼일이 있다기보다는 할 일이 있어. 가서 F/X 외환 거래를 좀 해 보려고.”
“갑자기 무슨 외환 거래야? 이제 팀에서 외환 거래까지 하자고?”
리안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건 아니고······.”
나는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인도네시아에 있었잖아.”
“그랬지. 광산 투자 때문이라고 그랬었나?”
“인도네시아 상황이 정리되면서 인도네시아 루피아 환율이 올라가고 있더라고······. 이미 지난주에만 11% 이상 올랐어. 그런데 작년 와히드가 정치 위기에 빠지기 전보다 여전히 환율이 낮거든······. 그래서 인도네시아 루피아에 좀 투자해 볼 생각이야.”
“얼마나 하려고?”
“한 1천만 달러 정도?”
“하······.”
1천만 달러라는 말에 리안이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잠시 나를 보며 말했다.
“외환 거래는 처음 해 본다면서 처음부터 너무 거액을 투자하는 것 아니야? 더구나 인도네시아 루피아라면 거래량도 그렇게 많지 않잖아?”
“그래서 W&R을 찾아가는 거야. 카이 황 씨에게 물으니 채용한 직원 중에서 외환 거래를 하다가 온 직원이 있다고 하더라고······.”
“레버리지는 얼마나 쓰려고?”
“한 10배 정도?”
외환 거래에서는 선물이나 옵션보다 훨씬 큰 레버리지가 사용되고는 했다.
외환 거래만 전문적으로 하는 기관투자자 중에는 1천 대 일, 1만 대 일이라는 다른 금융 시장에게는 불가능할 정도의 레버리지를 사용하는 때도 있었다.
“네 생각과 반대로 움직이면 외환차액거래강제청산 당한다는 것 알고 있지?”
흔히 마진콜이라고 부르는 외환차액거래강제청산.
레버리지가 큰 만큼 예상과 다르게 움직이면 강제로 청산 당할 위험도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1천만 달러 다 잃어도 어쩔 수 없지. 수업료로 생각해야지.”
1천만 달러는 큰 금액이지만 내가 가진 투자금과 한 주에 버는 수익을 생각하면 전부를 잃는다고 해도 큰 타격은 아니었다.
내 말에 리안이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난 네가 굳이 외환 거래까지 하려고 하는 것이 좀 이해가 가지 않아. 주식만 해도 충분히 많은 돈을 벌고 있잖아?”
“돈을 버는 데 충분한 게 어디 있어. 눈앞에서 돈을 벌 기회가 돌아다니면 일단 벌어 둬야 하는 것 아니야?”
“돈 벌어서 뭐 하려고? 너는 돈을 벌어서 별로 쓰지도 않잖아. 내가 알기로는 외국에 나갔을 때 고급 호텔에 묵기는 하지만 비행기는 비즈니스석만 타고 1등석을 안 타잖아. 그렇다고 특별히 모으는 물건도 없고 말이야.”
리안이 말했다.
내가 1등석을 타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1등석은 고객 수가 적기 때문에 항공사에서도 특별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욱이 정보기관에 발각될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당연히 이런 사실을 리안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스파이라는 사실은 말할 수 없지만, 정윤호에게 말했던 아버지의 과거 정도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말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어느 정도는 말해도 될 때가 온 셈이었다.
거짓을 가장 잘 숨기는 방법은 진실 속에 숨기는 것이었다.
어차피 정윤호를 고용한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면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도 해야 했다.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지금은 좋은 때였다.
“돈을 벌어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리안을 보며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이라니?”
리안이 물었다.
“집안의 복수라고나 할까?”
“복수?”
“그래, 집안의 복수.”
나는 정윤호에게 했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리안에게 했다.
“그래서, 너희 집안 재산을 강탈하고 네 아버지를 추방한 자들에게 복수하려는 거야?”
리안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 대답에 리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 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리안의 집안도 상하이방의 압박으로 가족이 홍콩을 떠나야 했고 홍콩에서 가문의 위세도 축소되었다.
그런 리안에게 권력에 밀려 재산을 빼앗겼다는 내 상황에 감정이입이 되는 일은 어쩌면 당연했다.
잠시 생각을 마친 리안이 입을 열었다.
“복수하려는 자들이 꽤 대단한 자들인가 보네. 어지간한 놈들이라면 지금 네가 가진 돈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말이야.”
투자받은 돈을 빼고도 4억 달러 정도가 있었다.
전부 현금이었다.
이 정도 돈이라면 돈으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대부분을 할 수 있는 액수이기는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모르지. 하지만 내가 무슨 복수에 미친놈도 아니고 30년 전 복수를 한다고 가진 돈을 날릴 생각은 없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나와는 다르지.”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도 그렇지만 나도 복수는 포기했어. 중국 지도부 상대로 어떻게 복수를 하겠어. 공청단에 권력이 완전히 넘어간다고 해도······. 공산당 지도부는 하나야. 아무리 힘을 잃었다고 해도 외부인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내버려 둘 인간이 아니야. 그게 권력을 잃은 다음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자신을 스스로 특권층이라고 생각하는 자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칼을 들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상대라도, 그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는 자신들뿐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어쨌든 너도 복수하려는 자들이 꽤 지위가 있는 자들인가 보네. 그래서 너도 바로 복수를 못 하는 거잖아. 적어도 지금 가진 돈 중에서 상당 부분을 써야 복수할 수 있다는 말이잖아.”
“맞아. 아버지가 남긴 자료를 보면 죽은 자도 있지만 살아 있는 자 중에는 한국에서 재벌이라고 불리는 자도 있고 정치인도 있더라고. 물론 반대로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자도 있고 말이야.”
“나중에 복수할 때 나도 한 팔 거들게.”
“복수를 언제 할지는 몰라. 안 할 수도 있고······.”
“아니! 내가 아는 너라면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꼭 복수할걸.”
“네가 아는 너라니?”
“너 은근히 쪼잔한 면이 있어. 예전에 있었던 일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어떤 놈들인지 너에게 걸린 놈들이 불쌍하네. 너 단순히 아버지가 당한 일 정도에서 복수를 끝낼 생각 없잖아?”
“그야 당연하지.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돌려줘야지.”
리안에게 복수를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 약속은 나중에 꽤 도움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