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11화 (112/270)

#112. 모든 기회를 다 잡을 수는 없다

나는 아침 일찍 W&R로 카이 황을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카이 황이 나를 반갑게 맞았다.

“거의 한 달 만이군요.”

“벌써 그렇게 되나요?”

“그렇죠. 인도네시아 가기 전에 회사를 찾아오셨을 때가 마지막이니······.”

“인도네시아에 오래 머물기는 했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안 계시는 동안 리안 도련님이 꽤 적적해하셨습니다.”

생각할수록 인도네시아에 너무 시간을 허비했다.

인도네시아가 그 정도 시간을 들일 정도로 중요한 나라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가 인도네시아를 떠나지 못한 이유는 근래 미국 정부와 CIA의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G8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을 방문했던 부시 대통령은 은연중에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유일한 강대국 미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대접이었다.

이렇게 푸대접을 받은 이유는 현재 유럽의 집권당 대부분이 좌파 정당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시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정책과 유럽 정부의 정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부딪치는 면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유로화의 도입으로 한층 경제적으로 가까워진 유럽 연합이 미국을 상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가장 큰 실패는 뭐니 뭐니 해도 도쿄 기후 협약의 이행 결의안이었다.

미국의 반대로 거의 좌초되었던 도쿄 기후 협약은 본에서 열린 회의에서 178대 1이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이행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물론 그 1은 미국이었다.

부시 대통령의 공개적인 반대에도 미국의 우방들조차 도쿄 기후 협약에서 미국의 반대편에 섰다.

미국의 외교 참사라고 할 수 있었다.

CIA의 분위기도 안 좋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CIA 국장인 조지 테넷은 지난달부터 직접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휴전을 중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CIA 국장이 직접 나섰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충돌은 점점 더 확산하고 있었다.

당연히 미국 정부와 CIA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이런 때는 알아서 몸을 낮출 필요가 있었다.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머문 이유였다.

“도련님께 듣자니 인도네시아 루피아 환율 상승에 투자하시려고 한다고요?”

카이 황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와히드 전 대통령이 물러날 때 투자했어야 했는데······. 시기를 조금 놓쳤습니다. 벌써 11%나 올랐더군요.”

“여전히 올라갈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작년 환율을 생각하면 올라갈 여지가 있죠.”

“알겠습니다. 마침 최근에 고용한 직원 중에서 외환 거래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직원이 있습니다. 제러미 하, 내 방으로 올라오라고 하세요.”

비서에게 지시한 카이 황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러미 하라고 몇 년 전까지 페레그린증권에서 일한 직원입니다. 인도네시아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 그 페레그린증권사.”

내가 페레그린이라는 이름을 아는 것은 그 회사가 인도네시아와 깊은 관련이 있는 회사이기 때문이었다.

페레그린증권사는 98년 파산하기 전까지 홍콩 최대 증권사였다.

그런 페레그린이 파산한 이유는 인도네시아 운수회사 채권에 투자했다가 막대한 손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페레그린이 투자한 운수회사는 수하르토 딸이 운영했던 회사로, 이 회사의 파산은 수하르토 정권 붕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제러미 하도 에드릭 님과 같은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한국 이름이 하성철이라고 하더군요.”

“한국계라고요?”

홍콩에서 관광객이 아니라 홍콩에 사는 한국계 외국인 혹은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내가 알기로는 600만 명 훌쩍 넘는 홍콩 거주민 중에서 외국인은 겨우 몇십만이었고 그나마도 한국계는 겨우 몇천 명 수준이었다.

“페레그린증권사 채권팀을 이끌었던 안드레 리가 한국계라서 그 팀에 한국계 직원이 몇 명 있었습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이미 말했지만, 제러미 하라는 직원에게도 제가 이 회사 대주주라는 사실은 숨겨 주십시오.”

카이 황에게 대표를 맡기면서 회사 설립하기 전에 직원들에게 나에 대해 감춰 달라고 이야기했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도련님과 제가 가진 지분 외에 다른 투자자가 누군지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카이 황이 대답했다.

정확하게는 리안과 카이 황이 개인 명의로 가지고 있는 지분을 제외한 나머지 지분은 미국과 영국의 조세 회피처와 싱가포르에 소재한 수십 개 회사 명의로 나뉘어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비서가 제러미 하가 도착했다고 알려 왔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을 열고 30대 중반의 사내가 들어왔다.

“어서 오게. 이쪽은 우리 회사 자금을 관리하는 류오린의 팀장인 에드릭 손이네.”

나를 소개한 카이 황은 손으로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제러미 하입니다.”

사내가 나를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제러미라고 불러 주십시오.”

“에드릭입니다.”

카이 황이 제러미 하를 보며 말했다.

“자네도 여기 자리에 앉게.”

제러미 하가 내 맞은편 소파에 앉자 카이 황이 입을 열었다.

“여기 에드릭 씨가 인도네시아 루피아에 투자하고 싶다고 해서 자네를 불렀네. 자네가 인도네시아와 환율 전문가 아닌가.”

카이 황의 말에 제러미 하가 순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딘지 씁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긴 그 일 때문에 경력에서 금전적으로나 경력으로나 큰 손해를 봤을 테니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했다.

“전문가는요. 인도네시아에 투자했다가 회사를 망하게 했는데요.”

“실패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죠.”

내가 말했다.

“인도네시아 루피아에 투자하신다는 것을 보니 환율 상승에 투자하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제러미 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W&R에게 맡겨 주신 투자금을 주로 지수 선물에 투자했는데 이번에 인도네시아 환율 상승에 투자하면 어떨까 해서 찾아와 봤습니다.”

“외환 거래에 계속 투자하실 생각입니까?”

제러미 하가 다시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지난주까지 인도네시아에 일 때문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좀 알아보니 인도네시아 루피아가 상승하고 있고, 정치 위기 전 수준을 생각하면 아직 올라갈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한번 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와히드 대통령이 탄핵당한 직후에 투자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직 상승 여력이 남아 있으니까요. 한 번 정도는 나쁘지 않습니다.”

제러미 하도 나와 거의 같은 의견이었다.

대답을 들은 카이 황이 입을 열었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자네가 여기 에드릭 팀장을 도와서 해 보는 것은 어떤가?”

“제가 말입니까?”

제러미 하가 카이 황에게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그래.”

카이 황이 대답했다.

제러미 하가 다시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전에 인도네시아 루피아에 투자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내 대답에 제러미 하가 잠시 나를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만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만······.”

“말씀해 보십시오.”

“지금 인도네시아 루피아 환율 상승에 투자하신다는 생각은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같은 제3국 세계 국가 외환 거래를 경험이 없는 사람이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달러나 엔화, 파운드화, 유로화 같은 국제적인 통화와는 달리 인도네시아 루피아 외환시장은 거래량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변화도 심하고요.”

제러미 하는 이어서 외환 거래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사례를 들어서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설명만 들어도 숨이 막혔다.

무엇보다 쉴 시간도 없이 계속 모니터를 보면서 변화를 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내가 처음 리안과 손을 잡은 계기가 바로 그런 일이 싫고 별로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러미 하의 말대로라면 외환시장은 주식보다 더 변화가 심하고 장 중에는 흐름도 불규칙했다.

“설명은 잘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쉽게 뛰어들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아무래도 이번 일은 제가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기회인데 굳이 포기하실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제러미 하가 물었다.

“아닙니다. 외환 거래에 경험이 없는 제가 하기에는 조금 버거운 일처럼 보이네요.”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기회인데······.”

아쉬운 표정을 짓던 제러미 하가 카이 황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기 에드릭 씨만 괜찮으면 제가 한번 인도네시아 루피아에 투자해 보고 싶습니다.”

“자네가 말인가?”

제러미 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피아 환율 상승에 투자한다는 생각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상대로라면 루피아는 지금 환율에서 최소 3% 이상은 상승할 여력이 있습니다.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제러미 하의 말에 카이 황이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 눈치를 보는 듯했다.

내 아이디어를 듣고 초보자가 뛰어들 시장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놓고 바로 자신이 하겠다는 제러미 하의 말은 내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내가 이미 포기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카이 황으로서는 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별 상관 없었다.

아이디어건 뭐건 돈을 벌면 충분하다.

오히려 내가 할 일을 해 주는 셈이었다.

나를 바라보던 카이 황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번 해 보게. 투자금은······.”

나는 카이 황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한 1천만 달러 정도면 되겠나?”

카이 황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제러미 하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실망하게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기 에드릭 팀장에게나 감사 인사를 하게.”

제러미 하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와 함께 루피아 거래를 함께 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같이하자는 말씀입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가 남의 아이디어를 훔칠 만큼 뻔뻔한 사람은 아닙니다. 좋은 투자 기회인데 포기하신다고 하셔서 제가 나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함께하시면서 외환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험을 하신다면 나중에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겁니다.”

좋은 제안이었다.

당연히 좋은 제안이라고 해도 나는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나에게 환율은 위험 관리 차원에서 고려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듣기만 해도 환율 거래를 직접 할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제러미 하와 함께 일을 하자면 앞으로 최소 일주일 동안 몸을 낮추며 일해야 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가 팀장님의 아이디어를 빼앗는 셈이 되는데, 그건······.”

제러미 하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당황한 듯 나와 제러미 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가 자신의 제안을 당연히 받아들이리라 생각한 듯했다.

하긴 내가 일반 투자회사의 직원이었다면 당연히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제러미 하의 말처럼 3%만 올라도 외환시장의 특성을 생각하면 막대한 수익률이 보장된 거래였다.

투자회사가 막대한 수익률은 얻으면 직원도 막대한 인센티브를 받는다.

이런 기회를 포기할 투자회사 직원이 있을 리 없었다.

단순히 직원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런 직원이 아니었다.

“W&R은 회사와 팀의 가장 큰 고객 중 한 분입니다. 오히려 제 아이디어로 돈을 벌면 좋은 일이죠.”

“이번 일은 제러미 자네가 혼자 맡아서 하게.”

카이 황이 결론을 내렸다.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에드릭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정윤호입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전 국정원 직원인 정윤호였다.

같이 일을 할 생각이 있으면 홍콩으로 찾아오라고 했더니 벌써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결심은 하셨습니까?”

-지금 홍콩 공항입니다. 어디로 찾아가면 될까요?

“그렇습니까? 마침 잘 맞춰서 오셨습니다. 지금 오시죠. 여기가 어디냐면 홍콩 센트럴······.”

나는 W&R의 주소, 정확하게는 카이 황의 사무실을 알려 주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곧 가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카이 황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제러미 하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그만 나가 보게.”

카이 황의 지시에 제러미 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은 꼭 갚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제러미 하가 나가고 나는 카이 황을 보며 말했다.

“사람 하나를 채용해 주십시오.”

“사람요?”

“한국에서 제 일을 도와줄 사람입니다.”

“한국에서의 일요?”

카이 황이 물었다.

표정을 보니 무슨 일인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리안이 내가 한 이야기를 카이 황에게는 하지 않은 듯했다.

리안이 카이 황에게도 비밀을 지킨 것은 의외였지만 아마도 내 개인적인 일로 생각한 듯했다.

나도 굳이 카이 황에게까지 이야기할 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개인적으로 투자를 해 보려고 합니다.”

카이 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뿌리는 중요하죠. 리안 도련님도 가문의 고향인 절강성에 이런저런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도와줄 사람을 고용했는데 아무래도 류오린에 고용하는 것보다는 장기적으로 보면 W&R에 고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투자도 굳이 류오린을 통해서 할 필요도 없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윤호가 마침 때를 맞춰 와서 W&R까지 온 일이 헛걸음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 온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루피아에 대한 투자도 어쩌면 내가 직접 하는 것보다 제러미 하에게 맡기는 것이 더 수익이 많이 날 것 같았다.

정윤호를 기다리는 동안 나와 카이 황은 최근 늘어나고 있는 대만의 중국 투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20분 정도가 지나자 카이 황의 비서가 정윤호의 도착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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