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12화 (113/270)

#113. 일곱 번 계산하고 한 번에 잘라라

1.

정윤호는 에드릭이 알려 준 건물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약속 장소는 이 빌딩 10층이었다.

에드릭의 명함에 있던 회사인 류오린이 아닌 W&R이라는 회사의 대표실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우습지만 발을 들여놓기가 망설여졌다.

에드릭이 만났을 때 준 봉투를 나중에 확인하고 정윤호는 깜짝 놀랐다.

봉투에 들어 있는 것은 10만 달러 수표였다.

한화로는 1억 3천만 원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지난번 보내준 1만 달러도 놀랍지만 한 번 본 사이에 이런 돈을 준다는 것은 잘 믿기지 않았다.

수표를 본 순간 혹시 자신에게 접촉한 것이 북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지웠다.

예전이라면 모르지만 지금 북한은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저렇게 쓸 돈이 없었다.

하지만 액수가 큰 만큼 에드릭의 복수를 돕는 일이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다.

서울로 돌아가서도 고민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던 카센터 사장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장 아쉬운 일은 자식들과의 관계였다.

지금은 잘하면 자식들과 친해질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에드릭과 함께하면 그런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정윤호가 그런데도 홍콩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의 삶은 정윤호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죽은 삶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정작 에드릭을 만나려고 하니 망설여졌다.

정윤호는 결심을 굳히고 한 걸음 한 걸음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에드릭이 말한 약속 장소로 가기 위해 10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감에 따라 점점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몸은 지난 2년 사이 많이 녹슬었지만, 마음만은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이름을 말하자 비서가 다시 안쪽에 있는 문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전에 봤던 에드릭이라는 청년이 40대 중년 사내와 함께 있었다.

정윤호는 빠르게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책상에 놓인 명패나 사진을 보니 이 사무실의 주인은 저 중년 사내인 듯했다.

에드릭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윤호를 맞았다.

“오셨군요. 오는 데 고생은 하지 않았습니까?”

정윤호는 에드릭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예전에 주신 돈으로 비즈니스석으로 편안히 왔습니다.”

“여기까지 오신 것을 보니 함께할 결심을 하셨군요.”

정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하겠습니다.”

“그러면 여기까지 오는 쓴 비용도 회사 경비로 처리해야겠네요.”

정윤호는 급히 손을 저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회사에 들어오기 전에 받은 돈만 11만 달러였다.

1억 4천에서 1억 5천에 가까운 돈이었다.

그런 돈을 받고 다시 또 돈을 받는 일은 부담스러웠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비용 처리를 하지 않아도 어차피 세금으로 나갈 돈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카이 황 대표이사님.”

“우리 회사가 버는 돈을 생각하면 맞는 말이기는 하죠.”

정윤호는 지금 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고용을 제안한 것은 에드릭이었다.

둘이 자신에 대해 하는 대화로 봤을 때는 마치 자신이 W&R의 직원이 되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눈치챈 듯 에드릭이 말했다.

“정윤호는 류오린이 아니라 여기 W&R의 직원으로 채용될 겁입니다.”

“그렇습니까?”

에드릭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앞으로 같이 일을 하는데 W&R 소속이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전에 분명 류오린에서 일하신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지금 제가 일하는 회사가 류오린이기는 하지만 W&R은 제가 일부나마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거든요.”

“아······.”

나름 류오린을 조사했던 정윤호로서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정윤호가 에드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는 류오린이 설립된 지는 몇 년 되지 않았지만, 꽤 건실한 투자회사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W&R에 대해서는 아는 정보가 없었다.

건물에 올라오면서 본 기억으로는 W&R은 8층부터 10층의 세 개 층을 쓰고 있었다.

이 빌딩은 크지는 않지만, 홍콩,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가인 센트럴에 있었다.

그중 가장 꼭대기 3층을 모두 사용한다는 것만 봐서는 W&R도 재정적으로는 건실한 기업으로 보였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이 완전히 보장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W&R에 대해 아는 정보가 없다 보니 여기서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2.

나와 정윤호는 카이 황의 대표 사무실 옆에 있는 10층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회의실에서 마주 앉아서 바라보니 정윤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도 자기 생각과는 다른 상황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국정원 직원인 그의 과거를 생각하면 아마도 홍콩에 오기 전에 이런저런 첩보를 수집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홍콩에 도착한 이후에도 찾아봤을지도 몰랐다.

오기 전 전화로 홍콩 공항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언제 홍콩에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홍콩에 도착해서 이런저런 조사를 하고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W&R로 부른 의도는 성공한 셈이었다.

정윤호가 적이라면 조금 더 지켜보며 주도권을 확실히 잡을 기회였다.

그렇지만 이제 직원으로 고용하려고 하는 이상 이런 상황을 길게 끌 필요는 없었다.

이제 확신을 줄 차례였다.

“고용하는 회사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어차피 형식상 W&R의 직원이지 정윤호 씨는 제 지시만 받으면 됩니다. 한국에

“파견 근무가 아니라 자회사에 소속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바로 회사 설립을 준비해 주십시오.”

정윤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회사 설립을 준비하라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태도였다.

“회사 설립을 제가 해야 합니까?”

“운영할 사람이 직접 설립하지 그럼 누가 하겠습니까.”

“제가 운영한다고요?”

정윤호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서울에 자주 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설립부터 운영까지 전부 정윤호 씨가 해 줘야 합니다. 필요한 자금은 충분히 지원해 주겠습니다.”

정윤호가 이번에는 어떻게 할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라면 정확히 무슨 회사를 차리라는 말씀이신지······.”

정확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류오린이나 W&R이나 모두 투자를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입니다. 주로 유가증권이나 금융에 투자하지만, 직접투자도 하고 있습니다. 정윤호 씨가 세워야 하는 회사는 저나 한 기업에 대한 조사를 맡게 되는 거죠. 한국에서는 조사 업무 자체가 불법이니 외형상으로는 본사의 부동산 투자를 대행하고 투자한 부동산 관리를 하는 회사로 보여야 하겠지만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정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돌아가시면 하실 일이 많습니다. 회사 설립도 설립이지만 제가 한국에 갔을 때 머물 아파트와 회사가 들어갈 건물도 구해야 합니다. 아파트는 이왕이면 보안이 잘된 곳을 구해 주십시오.”

“그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최근에 강남에 보안이 잘 된 신축 아파트가 하나 완공되었습니다. 그런데 주거 공간이 비교적 고층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홍콩에서 제가 사는 집이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산 정상에 있습니다.”

“아······.”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한국에서나 고층에 아파트가 있는 일이 드문 일이었지 외국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산은 어느 정도나······?”

“제가 한국에서 지낼 아파트, 회사가 들어갈 건물 그리고 추가 부동산 구매를 위한 예산 그리고 운영비까지 합쳐서 1천만 달러입니다.”

“1천만 달러라면 원화로 130억······.”

정윤호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카센터 사장에서 단숨에 130억의 자본으로 설립되는 회사의 대표가 되는 셈이었다.

나는 이어서 정윤호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회사는 수익보다는 정보 수집에 집중해 주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보 수집입니다. 증권가 소식이나 경제 소식을 중점적으로 수집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펜을 꺼내 메모지에 몇 명의 이름 간단한 신상 정보를 적어서 정윤호에게 건네주었다.

“이 사람들을 회사에 영입할 수 있으면 영입해 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정윤호 씨와 같이 국정원에 있던 사람도 있지만 주로 경찰청 정보과 직원들이었던 사람들입니다.”

내가 단테 패트릭이 준 명단에서 정윤호를 가장 먼저 부르고 그에게 회사를 맡긴 것은 그에게 아버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정윤호는 국정원 해외 부서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국내 정보 수집을 위해서는 국정원보다는 오히려 경찰청 정보과 직원들이 나았다.

그리고 정윤호는 직접적인 정보 수집보다는 오히려 조직 관리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국정원 출신 중에는 그나마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정보기관 요원 중에서 믿을 수 있는 인물은 정말 드물었다.

정보기관의 요원과 사기꾼의 차이는 말 그대로 아주 작았다.

“정윤호 씨와 마찬가지로 경찰청 정보과 직원 중에서도 정권이 바뀌면서 밀려난 사람이 꽤 많더군요.”

선거를 통한 한국 최초의 정권 교체다 보니 특히 정보를 다루는 부서를 대상으로 물갈이가 진행되었다.

“최대한 영입해 보겠습니다.”

“일단 그 사람들을 고용하면 그들을 통해서 부동산 개발과 관리에 필요한 사람도 찾아보세요. 정보 수집을 위해 필요한 직원도 마찬가지이지만 부동산 개발과 관리하는 직원들에게도 업계 최고 대우를 해 줄 생각입니다. 당연히 그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지만요.”

지금 나에게 한국 직원들의 연봉은 그리 큰 부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능력도 없는데 퍼 줄 생각은 없었다.

“물론 정윤호 씨에 대해서도 최고 대우를 해 줄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3.

정윤호는 W&R 인사 담당자와 구체적인 계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9층으로 내려갔다.

정윤호가 엘리베이터를 탄 것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카이 황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카이 황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와서 앉았다.

“이야기는 잘 끝내셨습니까?”

“덕분에 잘 끝냈습니다.”

“한국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습니다. 2천만 달러 투자하는데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실 줄 몰랐습니다.”

카이 황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정윤호를 만나기 전에 그가 관리하는 W&R의 자금 중에서 2천만 달러를 한국에 투자하겠다고 이야기했었다.

카이 황이 관리하는 투자금은 1억 2천만 달러가 조금 안 됐다.

2천만 달러는 전체 투자금은 물론이고 카이 황이 관리하는 자금에 비해서도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었다.

카이 황은 내가 상대적으로 적은 2천만 달러 투자에 일일이 신경 쓰는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아무래도 이런저런 고려할 일이 많아서요.”

“1천만 달러는 아까 본 정윤호라는 사람을 통해서 투자하신다고 하셨으니 1천만 달러가 남는데, 이건 어떻게 투자하실 생각입니까?”

카이 황이 물었다.

“1천만 달러는 한국의 기업 주식에 투자하고 제가 직접 챙길 생각입니다.”

내가 한국 기업에 투자하고 그걸 직접 챙기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주식시장만큼 기업과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을 파악하는 데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주식 투자는 내가 한 판단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판단하는 잣대였다.

일곱 번 계산하고 한 번에 자르라는 말처럼 내가 한국에서 하려는 일에는 철저한 준비와 계획이 필요했다.

단번에 복수를 끝내기 위해서라도 상황 파악은 꼭 필수였다.

정윤호를 고용하고 회사를 세우고 투자를 하는 모든 일이 복수를 위한 준비였다.

내 말이 끝나고 카이 황은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카이 황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보군요.”

카이 황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투자금이 몇억 달러나 늘어난 지금도 리안이나 카이 황에게 자금을 맡기고 방침에 대한 지시만 내릴 뿐 직접 챙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겨우 1천만 달러 투자를 챙긴다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리 중요한 일도 아니고요.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오겠죠.”

내 대답에 카이 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런데······.”

“말씀하십시오.”

“리안에게 이것까지 맡길 수는 없으니 제 지시를 받아서 한국 주식을 따로 매매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리안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가 맡은 선물 거래에는 홍콩 시각으로 낮에 거래가 이뤄지는 한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밤에 주로 거래되는 나스닥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밤낮으로 거래에 매달리고 있는 셈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리안은 자리를 자주 비우는 나를 대신해서 팀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W&R의 직원 중에 꽤 쓸 만한 직원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지금 팀장님께서 찾으시는 일을 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일을 하자면 팀장님이 W&R의 주주라는 사실까지 밝혀야 하니까요."

“하긴 그도 그렇겠네요.”

카이 황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W&R의 투자금을 운용하는 류오린의 팀장이었다.

W&R와 내 관계를 밝히지 않는 이상 그런 내가 역으로 W&R의 직원에게 한국에 대한 투자 지시를 내리는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설사 그런 상황을 어떻게 설득시킨다고 해도 W&R에는 직접 투자할 권한이 없었다.

결국, 류오린을 통해 투자해야만 했다.

W&R 직원을 통한 투자는 답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카이 황이 입을 열었다.

“조민 아가씨는 어떻습니까?”

“조민요?”

조민이라는 이름에 나는 저절로 눈살을 찌푸려졌다.

내가 없는 동안 막무가내로 팀에 들어와 있던 일이 생각났다.

“예. 이미 아시겠지만, 회계에 뛰어난 능력이 있죠. 판단도 빠르고요. 어지간한 직원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나도 예전부터 카이 황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지금까지 그녀에게 회계만 맡긴 데는 흔한 말로 엮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 방법밖에 없을까요?”

“지금으로서는 조민 아가씨가 최선입니다.”

카이 황이 말했다.

한국 주식 투자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흔한 말로 사람은 때로는 싫어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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