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파도는 모든 보트를 끌어 올린다
1.
회사로 돌아온 나는 조민을 내 자리로 불렀다.
“조민 씨도 투자에 직접 참여해 볼 생각 있습니까?”
조민의 딱딱했던 얼굴이 환해졌다.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당연하죠.”
“지난번에 회계 처리로 바쁘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조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리고 바쁘더라도 해야죠.”
“좋습니다. 대신 처음부터 큰 액수를 맡길 수도, 재량권을 줄 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조민 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니까요.”
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하죠.”
“그럼 우선 오늘부터 한국의 가이닉스 반도체를 최대한 낮은 가격에 최대한 매입해 주세요. 투자금은 1천만 달러.
“1천만 달러요?”
투자금 규모를 들은 조민이 조금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리안이나 브레이크와 비교하면 너무 적은 금액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왜, 1천만 달러가 적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처음 리안과 제가 같이 할 때 우리가 운용하던 투자금이 1천만 달러보다 그렇게 많은 금액이 아니었습니다. 실적을 쌓고 고객을 추가 유치해서 지금처럼 늘어난 거죠.”
“알겠습니다.”
조민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쉬운 표정이었다.
2.
조민이 돌아간 이후 내 눈은 리안을 향했다.
리안은 내가 그녀를 처음 불렀을 때부터 힐끔힐끔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민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이후에는 그녀의 행동을 살펴보고 있었다.
본인은 나름 눈치채지 못하게 행동을 한다고 하지만 다 보였다.
나는 리안을 내 자리로 불렀다.
“내가 조민에게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 궁금한 표정인데?”
“뭔 소리야? 누가 궁금해한다는 거야!”
리안이 강하게 부정했다.
나는 그런 리안에게 비웃어 주고는 입을 열었다.
“조민과 약혼 싫어하는 것 아니었어?”
“약혼하기 이전부터 친한 동생이었으니까.”
리안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인정했다.
“투자를 맡겨 보려고. 그래서 시험하는 중이야.”
“잘됐네. 전부터 해 보고 싶어 했는데······.”
“진작 나에게 말하지. 그럼 적은 액수라도 맡겨 봤을 텐데.”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알아서 해야지. 내가 부탁하는 것은 본인도 싫어하고 말이야. 그동안 봐서 알겠지만, 자존심이 강해.”
“그래서 말인데······. 너 아시아 투자에서 손 떼고 한동안 나스닥 투자에만 집중하는 게 어때?”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국 일본에 대한 선물투자와 AAM까지 전부?”
리안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민에게 넘기려고?”
리안이 물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처음부터 그럴 수야 없지.”
나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동안은 내가 관리할 생각이야. 2팀과 협력하기로 했으니 큰 부담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네가 계속할 생각은 아닐 것 아니야.”
“그야 그렇지.”
“너무 큰 부담이 아닐까? W&R과 AAM 투자금을 모두 합치면 1억 4천만 달러나 되는데······. 아직 조민은 그런 금액을 감당하기에는······.”
리안이 말했다.
그의 표정에서는 조민에 대한 걱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리안이 지금 운용하는 투자금은 3억 달러가 넘었다.
그중 아시아에 투자하는 자금은 1억 4천만 달러로 절반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이 자금을 운용하면서 나오는 받는 인센티브는 아무리 부자라도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아니, 돈을 떠나서 자신이 관리하던 투자금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넘긴다면 기분 나쁜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도 그런 마음보다는 조민이 더 걱정되는 듯했다.
조민을 정확히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은 분명해 보였다.
“1억 4천만 달러까지는 아니야. 나스닥 투자 비중을 조금 늘릴 생각이야.”
리안이 관리하는 투자금 중에서 1억 4천만 달러를 가져오면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자금을 관리하는 사람이 리안이 아니라 브레이크가 된다.
인센티브를 떠나서 투자회사에서 관리하는 자금의 규모는 곧 그 사람의 능력을 보여 주는 지표였다.
내가 류오린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류오린과의 계약도 계약이지만 내가 관리하는 자금의 규모와 벌어 주는 매매 수수료가 회사 내에서 압도적이기 때문이었다.
내 실적은 류오린 내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아마도 내가 내년에 떠날 것이 확실하지 않았다면 류오린에서는 진작에 내 직급을 더 올려줬을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돈이 곧 힘이자 그 사람의 위치인 그런 세계였다.
이런 상황에서 리안보다 브레이크가 더 많은 투자금을 관리하게 할 수는 없었다.
“얼마까지?”
“일단 2억 달러까지 늘릴 생각이야. 나스닥은 우리 팀의 주력 투자 시장이고 기준이 되는 시장이니 그 정도는 늘어야지.”
내가 이런 결정을 한 다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안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알았어.”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민에게는 한동안 이야기하지 마.”
“그걸 왜 말해. 내가 바본 줄 알아!”
“글쎄 내가 왜 그럴까?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런데 너 괜찮겠어?”
“뭐가?”
“언젠가는 조민에게 넘긴다고 해도 꽤 오랫동안 네가 관리해야 할 텐데······. 시간 괜찮아?”
“해 봐야지. 그리고 아까 말했잖아. 매매는 2팀에 맡긴다고.······.”
“알아서 해라.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할 수 있다니까.”
내가 말했다.
3.
리안이 돌아간 이후 나는 순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리안을 돌려보내고 나니 이제야 너무 충동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담이 없을 수는 없었다.
나스닥 비중을 2억 달러까지 늘렸다지만······.
그래도 내가 운용해야 할 자금이 9천 5백만 달러 정도였다.
투자금이 일정 수준 이상 늘어난 이후 나는 리안과 브레이크에게 지시만 내렸다.
이런 거액을 직접 내 손으로 투자해 본 적은 없었다.
더구나 일정 부분을 지수 선물이 아니라 한국 개별 기업에 투자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일은 훨씬 늘어날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하지?
나는 일단 9천 5백만 달러를 중 9천만 달러를 셋으로 나눠서 코스피 선물과 가이닉스에 3천만 달러씩 2팀에 주문을 넣었다.
5백만 달러는 증거금이나 처리 비용으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문제는 나머지 3천만 달러였다.
6천만 달러를 조금 위험한 곳에 투자했으니 나머지 3천만 달러는 조금 안전한 곳에 투자해야 하는 데 마땅한 투자처가 없었다.
내가 아는 그나마 안전한 곳이라면 미국 다우지수 ETF나 나스닥 ETF인데······.
이건 리안과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문득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리안이 선물을 주로 투자하게 가장 큰 이유는 레버리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두 사람, 정확하게는 리안 혼자서 매번 다른 국가의 개별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직접 주식을 매매하는 것은 나나 리안이 아니었다.
나는 2팀으로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죠?
“추가로 매매 요청이 있습니다.”
-여기서 또요?
“일이 많습니까?”
-지금 아까 가이닉스 매매 요청 때문에 얼마나 일이 많은 줄 알아요? 3천만 달러면 한국 원화로 390억이에요. 지금 가이닉스 주가는 1000원대 초반까지 떨어졌고요. 거래량이 얼마나 많을지 짐작이 가시죠? 이걸 가격 올리지 않으면서 사들이느라고 우리 팀이 총동원되다시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어렵습니까? 안 되면 다른 팀이나 외부 증권사에······.”
-누가 안 된다고 했어요! 뭔데요?
“대만 가권 지수 상위종목으로 10개 회사 주식을 300만 달러씩 사들여 주십시오.”
-하······. 이것도 양이 많겠네요.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았어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역시 돈은 남을 부려 버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날 저녁 확인해 보니 내가 가이닉스 주식을 사들인 날 가이닉스 주식은 사상 최저가를 기록했다.
채권단 협의에서는 긴급 자금 지원이 있었지만, 그 자금으로도 몇 달 버티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나온 영향이었다.
내가 사들이지 않았으면 얼마나 더 떨어졌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잠시 버텨보기로 했다.
내가 가이닉스를 사들인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은 반도체 기업을 포기할 수 없었다.
더구나 가이닉스라는 기업 자체가 지금 정부의 인위적인 구조 조정 때문에 만들어진 기업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한국 정부 임기 내에서 망할 염려는 없었다.
4.
이렇게 버티는 동안 다음 날부터 가이닉스의 주식은 오르기 시작했다.
2팀의 반응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조민의 반응은 어제와 오늘이 달랐다.
그녀는 어제 장이 끝났을 때만 해도 뭔가 내게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왜 그 주식을 샀는지 하는 질문을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오늘도 왜 그 주식을 샀는지 물어보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그 표정은 전혀 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류오린에 출근해서 여느 때처럼 각종 보고서와 경제지를 읽었다.
내 책상 옆에는 인도네시아에 머무는 동안 보지 못했던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홍콩과 일본 그리고 미국과 영국 금융기관에서 발행된 보고서들이었다.
휴일에도 집에 가서 읽어야 할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일요일 일본 상원 선거에서는 예상했던 그대로 자민당이 압승을 거뒀다.
연초 모리가 총리일 때 지지율이 5%까지 떨어졌을 때만 해도 참패가 예상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극적인 반전이었다.
고이즈미가 어떤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일본인들은 고이즈미를 좋아한다는 것이 이번 결과로 드러났다.
이렇게 나름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나 보다 하면 안심하던 31일······.
CNN에서는 폭격에 무너진 건물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나블루스에 있는 하마스 사무실을 폭격해서 8명이 사망했다는 뉴스였다.
사망자는 8명으로 그중에는 자말 만수르와 자말 살림이라는 하마스 지도자 2명과 어린이 2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블루스는 팔레스타인의 통치를 받는 도시였고 당연히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은 불법이었다.
아이들까지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하마스 사무실이 폭격당한 것에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한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휴전 협상을 이끄는 사람은 현 CIA의 국장이었다.
무엇보다 하마스가 저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있을 리 없었다.
당연히 보복할 테고······.
그 보복에 이스라엘은 또다시 보복할 것이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랐다.
지구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그 지역에서만 영향을 주는 예전과는 다른 세상이 되었다.
파도는 모든 보트를 끌어 올리는 법이다.
최근 들어 점점 커지는 이슬람과의 충돌은 장기적으로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그런 장기적인 영향도 있지만, 당장 신경 쓰이는 일은······.
휴전 협상이 물 건너갔다는 사실이었다.
의욕적으로 휴전 협상을 추진했던 CIA 국장이 결과적으로 대놓고 물을 먹는 셈이었다.
자칫 파도에 휩쓸려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온몸을 감쌌다.
이것 잘못하다가는 CIA 퇴직에 문제 생기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미국에 전화를 걸어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