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고치기에 너무 늦을 때는 없다.
1.
“알다가도 모르겠네.”
나는 지난 한 주 투자 결과 보고서를 보면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투자 때문에 그래?”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주가가 왜 내려갔는지 모르겠네.”
지난주 나는 전 세계적인 주가 상승을 예상했다.
내 예상대로 미국과 한국은 물론이고 나중에 따로 투자했던 대만 주식시장까지 올랐다.
그런데 투자 중에서 유독 러시아만 떨어졌다.
“그래도 많이 떨어지지는 않았잖아. 겨우 1.6% 떨어졌고 그나마도 손절매해서 실제 손해는 그보다 적고 말이야. 나머지 투자에서 얻은 이익에 비하면 러시아에 본 손해는 얼마 되지도 않잖아. 심지어 가이닉스도 며칠째 계속 오르고 있다면서?”
리안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지난 한 주 동안 나스닥은 무려 4.2%나 올랐고 한국의 코스닥은 7% 이상 올랐다.
가이닉스도 조민과 내가 구매한 직후부터 계속 올라 이미 1,500원대였다.
우리가 산 가격이 1,000원대 중반에서 1,100원 사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일주일 사이 40% 이상 올랐다.
대만 가권 지수도 5.3% 올랐고 제러미 하를 통해 투자한 인도네시아 루피아도 5% 이상 올랐다.
러시아 투자에서 400만 달러 손실이 났음에도 지난 한 주 동안 4,6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성공적인 투자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러시아 지수 하락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그래. 지표만 보면 떨어질 이유가 없거든? 러시아 경제가 지난 경제 위기에서 빠르게 회복하고 있고 주요 수출품인 유가도 오름세고 말이야. 미국은 물론이고 서유럽 국가들 아시아 주요 국가 증시가 다 오르는데 러시아만 떨어졌어. 왜 떨어진 거지?”
“올해 많이 올랐잖아. 이미 40%나 올랐으니 차익을 실현하기 위한 매물이 쏟아진 거지.”
리안이 대답했다.
리안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러시아 증시는 올해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몇십 퍼센트가 내려간 다른 증시에 비해서 러시아는 오히려 40% 이상 상승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러시아 증시가 빠르게 상승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반년 동안 꾸준히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 다른 증시가 다 오르던 시점에 떨어질 이유가 없었다.
억지로 찾자면 실적 악화라든가 대통령 푸틴에 대한 정적들의 공격이라든가 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러시아도 가 봤어야 했나?”
리안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러시아를 가겠다고?”
“지금 가겠다는 것은 아니고, 시간이 날 때 가 보면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말이야.”
내가 임무 때문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깨달은 점 하나가 있었다.
문서나 뉴스 같은 간접 정보는 한계가 있었다. 그 나라에 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투자한 나라 중에서 최근 몇 년간 가 보지 못한 나라가 러시아였다.
투자 규모로만 보면 나스닥에 못지않은 투자처인데 너무 소홀한 면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몇 달 안에 시간을 내서 가 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시간이 없고 러시아에 갈 여유도 없어.”
홍콩에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는 비행시간만 11시간 걸리는 먼 거리였다.
하지만 모스크바로의 여행은 단순히 거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나마 내게 익숙한 미국과 서유럽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홍콩에서 러시아 가는 항공편이 하루에 한 번밖에 없다는 사실은 두 도시가 얼마나 다른지 바로 말해 주고 있었다.
2.
보고서를 보던 리안이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가이닉스 반도체 주식은 언제 팔 거야?”
리안이 물었다.
“여전히 오르고 있어서 조금 더 있다가 팔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건 왜? ”
내 질문에 리안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조민이 물어보더라고······.”
“그래?”
“네 지시를 받아서 싸게 사서 많이 오르기는 했는데, 팔아야 하나 아니면 더 가지고 있어야 하나를 고민하더라고······.”
“고민이 되는 상황이기는 하지.”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가이닉스 반도체는 조민이 팀에 들어와서 처음 한 투자였다.
일주일 사이에 40% 이상 올랐으니 많이 오르기는 했다.
주식을 사서 아무리 많이 올랐다고 해도 팔기 전에는 수익은 난 것은 아니었다.
차익을 실현하기 위해서 팔아야 하나 계속 오르고 있으니 계속 가지고 있어야 여부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보류했는데 우리 팀은 대부분 일주일 단위로 투자를 정리하잖아. 어때, 내일 오전 중에 팔라고 할까?”
리안이 물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조민에게 도움이 되려고 하는 태도였다.
“조민이 판단해서 결정하라고 해. 어차피 한동안 가이닉스에 대한 투자를 유지할 생각이니까. 그사이에 매매해서 수익률을 높이는 거야 조민 능력이지.”
“다음 주까지 가이닉스에 투자하려고?”
“내가 조사해 봤는데 가이닉스에 투자한 해외 투자자들이 산 금액이 적게는 3천 원에서 많게는 2만 원 정도라고 하더라고. 그 해외 투자자들 상당수가 아직 주식을 가지고 있고. 아마 손해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가격을 올리려고 할 거야.”
현재 한국 코스닥의 거래량 중에서 가이닉스 반도체가 주식 거래 비중이 절반이 넘은 상태였다.
가이닉스 반도체 시가총액이 1조 원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비정상적으로 높은 거래량이었다.
이건 누군가 아마도 한국의 기관 투자자들과 해외 투자자들이 인위적으로 거래량과 가격을 높이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게 다음 주라는 말이지.”
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음 주 월요일 정도에 다 정리할 생각이야. 나야 내가 직접 매매를 하지 않으니 굳이 수익을 높이기 위해서 가이닉스 주식을 사고팔 생각이 없지만, 조민 씨는 아니잖아. 직접거래 하다 보면 배우는 게 있을 거야.”
같은 주식을 비슷한 시기에 사서 비슷한 시기에 팔더라도 나와 조민은 처지가 달랐다.
“알았어. 그렇게 전할게.”
리안이 대답했다.
그런 리안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둘의 관계는 내가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어떤 면에서는 그냥 대놓고 사귀는 것보다 더 짜증이 났다.
3.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내일 투자 방향을 이야기할게. 우선 미국 나스닥, 러시아 그리고 홍콩은 하락 포지션을 잡을 거야. 곧 발표될 경제지표가 아무리 봐도 좋게 나올 것 같지 않거든······.”
“알았어. 하락 포지션이라는 말이지.”
“그리고 한국의 경우는 상승인지 하락인지 명확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아주 조금은 오를 것 같아. 그러니 상승 포지션을 잡을게.”
“한국은 따로야?”
“맞아.”
정윤호를 통해 한국에 투자하기 시작한 이후로 일정 시간을 한국에 대한 조사에 할당하고 있었다.
단지 선물 거래를 위해서 방향성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영향을 주는 주요 기업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었다.
당연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결론은 같을지 몰라도 조금 더 정확한 예측이 가능해진 셈이다.
“그리고 2팀에 의뢰할 투자 건 말인데······. 4,500만 달러를 전부 태국 탁신 관련 기업에 투자해 달라고 이야기해 줘.”
“탁신 관련 기업?”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일정을 보니 이틀 후가 탁신에 대한 반부패 혐의 기소 대법원 선고일이더라고.”
현재 태국의 총리인 탁신이 부총리 시절 재산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혐의로 고발된 것은 작년 총선이 있기 전이었다.
유죄가 확정되면 탁신은 의원 자격을 박탈당하고 당연히 총리직도 잃게 된다.
“탁신 관련 기업 주식을 사라고 하는 것을 보니 넌 탁신이 무죄 받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태국의 반부패법에 따르면 탁신의 유죄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법대로 한다면 탁신이 의원직을 상실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원칙과 현실은 다른 법이다.
“그렇지 않겠어? 이미 총리가 된 탁신에 대한 유죄가 확정되어 의원 자격을 잃더라도 지금 집권당에서 탁신의 위치는 확고해. 탁신의 재산과 인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유죄 확정은 혼란만 부추길 뿐이지.”
“맞는 말이기는 하지. 그런데 내가 2팀에 이야기해도 되는 거야?”
리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네가 하지 누가 해?”
“2팀의 팀장은 내가 아니라 네가 직접 연락해 주기를 기다릴 텐데······.”
리안이 말했다.
“됐어.”
나는 리안의 말을 딱 잘랐다.
“왜? 만나 보지 그래. 만난다고 꼭 결혼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 정도면 미인이고 집안도 좋고 더더구나 네 후배라면서?”
“됐네요, 너나 잘하세요. 너야말로 조민 씨처럼 미인에다가 너를 좋아하고 심지어 약혼까지 한 사이잖아. 집안에서 결혼도 재촉한다면서?”
“그렇게 걸고넘어지나!”
“그럼 안 걸고넘어질 거로 생각했어? 그리고 난 내일 태국에 가야 해서 시간이 없어.”
“태국을 직접 가 보려고?”
리안이 물었다.
“맞아. 전에 직접 투자한 것도 있고 꽤 오랫동안 못 가 봐서 이번에 가 보려고.”
4.
내가 태국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이번 러시아 투자로 느낀 점 때문이었다.
현장을 직접 가 보는 것과 간접적으로 정보를 듣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예전에 아시아 여러 나라를 가는 일이 CIA의 임무 때문이었다면 이제는 투자, 즉 돈이 걸려 있었다.
어느 점에서는 임무로 방문하는 일보다 더 중요했다.
“태국에 얼마나 있으려고?”
“태국에는 길어야 이삼 일 있을 거야. 태국에 갔다가 홍콩으로 오기 전에 한국에도 들를 생각이야.”
한국에서 일이 잘 진행되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한국에서의 일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벌이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CIA 요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하지 못하지만, 내년에 요원을 그만두면 복수를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러자면 조금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었다.
“한국까지 들르려면 일주일은 넘게 걸리겠네.”
“아마도······?”
내가 말했다.
“너 어떻게 홍콩에 2주 이상 머무는 있는 일이 없네. 보다보다 너처럼 해외에 자주 다니는 투자회사 직원은 본 적이 없다.”
“그러게. 나도 내가 이렇게 외국에 자주 나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 너에게 이미 말한 것처럼 난 대학교 갈 때까지 운동부 대회 참가할 때를 제외하면 주 경계도 넘어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말이야.”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하던 내가 이제는 아무런 임무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태국을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도 내가 많이 바뀌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차이나타운에서 본 점괘에 내가 방랑벽이 있다고 했을 말을 듣고 웃어넘긴 일이 있었다.
그 정도로 당시에는 나는 집 밖을 나가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해외로 간 것도 영국으로 유학 갈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여권에 도장을 찍을 곳이 없을 정도로 해외여행을 자주 가고 있었다.
더 웃긴 것은 그나마도 내가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 가짜 여권을 사용해서, 실제보다 기록상으로는 해외로 나간 횟수가 적다는 부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 점괘를 봐 준 사람이 정말 정확히 본 셈이었다.
“내년이면 아예 네가 쓸 개인 제트기라도 사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이대로라면 정말 필요할 것 같았다.
개인 제트기 구매 비용이라고 해 봐야 몇천만 달러 수준이었다.
유지비까지 생각해도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일이었다.
“바쁘게 사네.”
리안이 내 서재 한쪽에 쌓여 있는 상자 더미로 향했다.
리안이 본 서재 구석에는 내가 읽은 그리고 읽어야 할 보고서가 들어 있는 상자가 여러 개 있었다.
점점 투자금의 규모가 커지면서 읽어야 하는 보고서나 책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이래서 요즘 여자를 못 만난다니까.”
돈은 지금이 훨씬 많지만, 예전 에디 미첼의 지시를 받아서 수동적으로 움직일 때가 훨씬 여유가 있었다.
어차피 그때도 매주 수만 달러를 받고 있었다.
그 정도 돈이면 어지간한 여자를 만다는 데 돈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액수였다.
지금 같아서는 CIA를 그만둔다고 해도 그렇게 여유가 날 것 같지도 않았다.
점점 더 많은 돈을 버는데 점점 더 여유를 잃어 가는 것이 현재 내 현실이었다.
요즘 같아서는 내가 뭐를 위해서 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