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15화 (116/270)

#116.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1.

태국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열대성 소나기인 스콜이었다.

경호원이 짐을 찾아오는 동안 랄 바하두르가 내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저 멀리서 두 사람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투자하고 있는 여행사의 사장인 리슈와 수난 클라한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만에 오셨네요.”

리슈가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태국 방문은 꽤 오랜만이었다.

“리슈 대표님이 운영을 잘하셔서 올 일이 없었습니다.”

리슈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태국은 정치가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올 일이 없었다.

투자한 리슈의 여행사는 별다른 수익이 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수익이 나기는 하지만 현재까지는 거의 100% 재투자하는 상태였다.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서 리슈의 여행사에 투자한 것도 아니었다.

탁신 정부의 유력자들과 친분이 있어 보이던 리레이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 투자였다.

그래도 가끔 보내오는 리슈의 정보 덕분에 쏠쏠히 돈을 벌었으니 의외로 돈값은 한 셈이었다.

“여행사에 이번에 가 보시겠습니까?”

리슈가 물었다.

아마도 그녀는 내가 투자한 여행사를 둘러보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중에 가 보죠. 지금은 일단 쉬고 싶네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생각이 짧았습니다.”

리슈가 사과했다.

옆에 있던 수난 클라한이 끼어들었다.

“차오프라야강(Chao Phraya River)이 내려다보이는 힐튼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잘됐네요.”

내 눈에 짐을 가지고 오는 경호원의 모습이 들어왔다.

“경호원이 머물 방도 잡아 주시겠습니까?”

“문제없습니다. 우기라서 호텔의 빈방은 많습니다.”

수난 클라한이 대답했다.

태국 여행 성수기는 건기인 11월에서 3월 사이였다.

우기 그중에서도 가장 더운 7월에서 8월 사이는 상대적으로 비수기였다.

공항을 나왔을 때도 여전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수난 클라한은 우산을 쓰고 사라졌다가 잠시 후 차를 타고 나타났다.

차에서 내린 수난 클라한이 우리 일행을 보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어떡하죠? 일행분과 함께 오시는지 모르고 차를 한 대만 준비했습니다.”

나와 리슈의 일행을 합쳐서 모두 다섯 명이었다.

앞에 두 명 뒤에 세 명이 타면 다섯 명 모두 탈 수는 있겠지만 경호원과 뒷좌석에 타고 가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랄 바하두르가 같이 온 경호원에게 말했다.

“사짓트(Sajit), 호텔이 어딘지는 알고 있지? 네가 택시를 타고 와.”

경호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수난 클라한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랄 바하두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잠시 후 우리는 수난 클라한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오빠가 에드릭 씨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리슈가 말을 걸어왔다.

“그렇습니까?”

“예. 시야가 굉장히 넓고 정확하신 분이라고······.”

“그렇게 봐 주시니 고맙네요. 저도 리레이 씨를 한번 뵙고 싶네요.”

“오늘도 일이 없으면 나오시려고 했는데 일본 혼다자동차에서 사람들이 와서······. 저녁에 에드릭 씨를 보기 위해 호텔로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리레이 씨도 사업이 잘되나 보군요. 하긴, 리레이 씨 능력과 인맥이면 잘못되는 것이 오히려 어렵겠죠.”

“걱정해 주신 덕분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는 것 같아요. 최근에 새로운 거래처도 늘어난 것 같고요.”

리레이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처음 소개한 사람이 태국 자동차 업계의 거물이었다.

태국의 자동차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아무리 태국의 자동차 산업이 독자적인 브랜드를 가진 회사가 아니라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조립 공장이라고 해도 규모는 상당했다.

일본 자동차 회사라고 해도 부품 전부를 일본에서 수입해 오는 것은 아니었다.

리레이 회사의 전망은 밝다고 할 수 있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비가 그쳤다.

2.

태국에 왔으니 이제 탁신의 재판 상황을 알아볼 차례였다.

일단 태국 언론에서는 뭐라고 하는지를 조사했다.

태국어 신문을 읽는 것이 상황 파악을 하는 데 좋겠지만 나는 태국어를 읽지 못했다.

대신 태국에서 발행되는 영어 신문과 중국어 신문을 호텔에 요청했다.

호텔 직원들이 가져다준 신문에서 탁신 재판 관련 기사만 찾아서 읽었다.

신문들은 조금씩 재판을 보는 논조에 차이가 있었다.

영어 신문들이 대체로 원칙을 강조하는 데 비해 중국어 신문은 유죄가 확정됐을 때 가져올 혼란을 강조했다.

영어 신문들의 이런 논조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탁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론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공통으로 대체로 탁신이 유죄로 판결이 났을 때 그 결정이 가져올 파장을 우려하고 있었다.

판결도 이런 여론의 영향을 받게 될 것 같았다.

탁신에 관한 기사를 확인한 나는 다른 흥미 있는 기사가 있나 찾아보았다.

대체로 별 의미 없는 기사들이었지만 그중에는 흥미를 끄는 기사도 있었다.

바로 태국의 의료 관광에 관한 기사였다.

태국 최고의 병원인 범룽라드 국제병원(Bumrungrad International Hospital)이 의욕적으로 외국인 의료 관광객 유치에 나서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에서 가장 흥미가 가는 부분은 범룽라드 국제병원이 의료 관광객 유치를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였다.

범룽라드 국제병원은 1997년 외환 위기 직전에 7,500만 달러가 넘는 대출을 받아 병원을 신축했다.

하지만 병원 신축 직후 외환 위기가 발생했다.

환자 수가 급감하고 병원 수익성이 나빠졌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범룽라드 국제병원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의료 관광객 유치였다.

신축한 병원이다 보니 시설이 최신식이었고 범룽라드 국제병원의 의료진은 태국을 넘어서 동남아에서는 손에 꼽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위기가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된 셈이었다.

범룽라드 국제병원의 이야기를 보면서 내가 투자에 뛰어든 이유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디 미첼의 사고가 아니었다면 나도 투자에 뛰어들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어쩔 수 없이 투자에 뛰어들고 성공한 것처럼 범룽라드 국제병원도 의료 관광 분야에서 큰 성과를 내고 있었다.

본래 세상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환경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하는 자는 도태되는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범룽라드 국제병원과 나는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 셈이었다.

환경이 변하기 전에 생각했던 삶과 다를지라도······.

3.

리레이는 레스토랑 앉아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을 바라보았다.

고층 레스토랑 전망대에서 보는 야경은 아름다웠다.

방콕을 내 발아래 두는 기분이었다.

순간 목이 말랐다.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고층 건물에서 내려다보는 것으로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은 꽤 일이 잘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탁신의 집권은 리레이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거래처도 생겼고 자연스럽게 매출도 늘어났다.

하지만 오늘 일본 자동차 회사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면서 태국 자동차 산업의 한계를 실감했다.

일본 자동차 회사는 이익이 많이 나는 부품은 태국에서 현지 조달하는 것보다 일본에서 가져오고 있었다.

얼마 전 리레이는 우연한 기회에 망한 한국의 자동차 부품 회사 직원을 스카우트해서 새로운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기술을 이용해서 시제품을 만들었다.

생각보다 시제품은 쓸 만했다.

자체 실험 결과 일본에서 수입하는 제품에 못지않았다.

그래서 일본 자동차 회사에 보내 가능성을 타진했다.

일본에서 수입하는 부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가격 경쟁력이 압도적이었다.

계약을 따내기만 하면 회사를 한 단계 성장시킬 기회였다.

하지만 일본 회사 직원들은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모습을 보며 리레이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놈들은 태국을 그냥 조립 공장 정도 이상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태국에 진출한 다른 일본의 공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자동차 산업이 지금처럼 성장하기 전 태국 최대의 산업은 전자 제품 산업이었다.

그리고 그 전자 제품 산업을 이끄는 공장들도 일본이 투자한 업체들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의 회사들은 태국의 전자 산업이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태국의 공장들은 철저한 하도급 조립 공장일 뿐이었다.

태국의 전자 제품 공장들은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여전히 일본 회사의 제품을 하청받아서 조립하고 있었다.

자체 상표도 없었고 당연히 해외에서 경쟁력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태국의 자동차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리레이 자신이 운영하는 공장은 그냥 언제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부품이 될 뿐이었다.

이 상태라면 차라리 중국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기회를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돌아가야 하나?’

리레이의 눈에 레스토랑 입구에서 들어오는 사람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예전 본토에서 알던 사람의 소개로 만난 사람이었다.

동생의 회사에 투자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동생에게 관심이 있나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동생에게 들으니 연락만 주고받을 뿐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는 일개 팀원이었는데 지금은 팀장이 되었다.

단순한 팀장이 아니었다.

아는 지인들을 통해서 알아본 바로는 회사 내에서 가장 실적이 좋은 팀을 이끌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나이는 어리지만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 주던 사람이었다.

저 사람은 지금 자신이 고민하는 질문의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동생을 통해서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

나는 리레이와 악수했다.

“리레이 씨에게도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리고 싶었는데,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려야 했는데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제 자주 봤으면 좋겠네요.”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주요한 대화 소재는 나나 리레이의 공통으로 이야기할 만한 화제, 즉 리슈의 사업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에드릭 씨는 앞으로 리슈가 중동을 공략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리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리레이 씨도 아시겠지만 지금 중동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세계적으로 무슬림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자칫 사건 하나면 터지면 곧장 불이 여기저기 옮겨붙을 상황이죠. 만약 일이 생기면 중동 국가들의 무슬림들이 유럽의 병원을 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틈새를 이용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제가 알아보니 태국 의료 관광객 절반 정도가 일본 관광객이더군요. 일본 관광객들이 태국에 관광을 오면서 겸사겸사 가벼운 진료를 하는 게 지금 태국 의료 관광입니다.”

리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죠.”

“일본인의 의료 관광 유치에서 스노우는 기존 여행사를 따라잡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의료 관광이 지금처럼 빠르게 성장하기 이전에도 태국 여행사는 이미 상당한 규모였다.

리슈의 회사가 그런 기존 회사들을 따라잡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한마디로 일본인의 의료 관광에 관한 한 기존 여행사가 더 유리하다는 의미였다.

“동생도 비슷한 말을 하더군요. 더구나 아무래도 저나 동생이나 태국 사람이 아니다 보니 어려움도 있고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공략하기보다는 기존 관광객들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는 중동을 공략해야 합니다.”

내 말을 듣던 리레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으면 진작에 동생에게 말씀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투자자가 하는 말이니 동생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텐데요.”

리레이가 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태국에 오기 전까지는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리슈의 회사는 나에게 리레이와 연결하고 태국의 정보를 알려 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여행사에 투자 자체로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보니 여행사의 사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것은 태국에 도착하고 난 이후였다.

당연히 이런 생각을 리레이에게 할 수는 없었다.

“투자자인 제가 말하면 강요처럼 들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왕이면 제가 태국을 떠난 이후에 오빠분께서 제게 들었다는 말을 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까지 저희 남매를 생각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인연 아닙니까. 앞으로도 두 분과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가고 싶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리레이가 내 말에 감격하는 눈치였다.

“제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리레이가 여전히 감동한 얼굴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표정이었다.

이제 말을 본격적으로 꺼낼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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