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텔 방에서 나는 리레이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탁신의 반부패 혐의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잠시 후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기자가 태국어로 이야기해서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화면만 봐도 결과는 짐작할 수 있었다.
“예상대로네요. 무죄입니다.”
내 옆에서 방송을 같이 보던 리레이가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제 리레이를 탁신 측근에 보내서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탁신 주변에서도 오늘 판결 결과에 대해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판결 결과가 8 대 7이었으니 생각보다는 아슬아슬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대법원 판사들 대부분이 지난 정부에서 임명한 인물들이었다.
확실히 위법이 드러난 상황에서 여덟 명이 탁신에게 돌아선 것이다.
“이번 일로 반부패방지법은 사실상 무력화되겠네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리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며 입을 열었다.
“탁신처럼 확실한 혐의가 있는 데도 무죄가 나왔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 집권당이 정적을 제거하는 수단 정도의 의미만 가지겠죠.”
현재 반부패방지법은 지난 정부에서 의욕적으로 만든 법이었다.
오랜 군사독재와 정당들의 난립으로 혼란한 정치권을 개혁해 보자는 취지에서 통과된 법이었다.
그 첫 번째 적용 사례라고 할 수 있는 탁신에게 면죄부를 준 순간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법이든 실제 적용은 법원의 판결 특히 대법원의 판결이 지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화가 왔다. 장샤오이에게서 온 전화였다.
-지금 태국에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방콕입니다.”
-재판 결과 연락받았어요. 이 재판 때문에 태국에 투자하신 것 맞죠?
장샤오이가 물었다.
“예, 맞습니다. 재판 결과를 불안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난주 태국 증시가 떨어진 것을 보고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결과가 나온 이상 굳이 장샤오이에게 숨길 이유가 없었다.
-탁신의 신그룹과 자원개발공사 같은 대기업 위주로 매입을 끝내 놨어요.
태국의 자원개발공사는 태국 최대 기업 중 하나인 태국 석유공사의 자회사였다.
석유공사가 태국에서 석유 관련 제품의 제조 유통을 책임진다면 그 자회사인 자원개발공사는 다른 기업들과 합작으로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우량 기업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굳이 보고하실 필요 없습니다. 주가지수 상승률과 큰 차이만 없다면 어떤 주식을 사들이는지는 장 팀장님과 2팀의 팀원들이 결정하시면 됩니다.”
내 말에 장샤오이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전화기 너머에서 장샤오이의 말이 들려왔다.
-그건 주가지수보다 수익률이 낮으면 책임을 묻겠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지시를 따랐는데도 주가지수보다 수익률이 낮다면 그건 제 책임이겠죠. 하지만 그런 지시가 없었는데도 주가지수 상승률과 수익률이 많이 차이가 난다면 그건 능력 부족이고, 능력이 부족하면 저는 어떤 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겠죠.”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태국에서 언제 홍콩으로 돌아오실 예정입니까?
“홍콩에 돌아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태국에서 할 일이 남아 있나요?
“그건 아니고 한국에서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밤 비행기로 한국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아······. 그럼 다음 주에 뵙죠.
2.
장샤오이와의 대화를 끝내자 리레이가 말을 걸었다.
“오늘 방콕을 떠날 생각입니까?”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약속이 있어서요.”
“아쉽네요. 어제 연락을 드린 분들이 에드릭 씨를 한 번 만났으면 하던데요.”
리레이가 말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리레이가 말한 사람들이란 지금은 장관이 된 솜키드 같은 사람들이었다.
현재 솜키드는 태국의 재무부장관으로 탁시노믹스라고 불리는 경제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사실상 정부의 이인자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나로서는 만나는 것을 피해야 했다.
거물이 된 솜키드 장관을 개인적으로 만나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태국 CIA 지부의 정보망에 걸려들 수가 있었다.
에이전트 에스 팀 소속이었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개인적으로 움직일 때도 CIA의 관심을 끄는 것은 곤란했다.
하지만 이건 내 사정일 뿐 상대로서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실제로도 리레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초대를 거절할 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정말 안 되겠습니까? 그분이 섭섭해하실 텐데······. 이왕이면 시간을 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권력자의 초대는 요청이라기보다는 명령이라고 봐야 했다.
내가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는 않겠지만 리레이나 리슈는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저야 당연히 그런 분들과 만나는 것이 손해될 것이 없죠. 하지만 선거 전과는 다릅니다. 공직에 있는 분들이 저 같은 해외 투자자를 만나는 것은 그분들에게 좋을 게 없습니다.”
“하지만······.”
“저 같은 투자자를 태국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리레이 씨도 잘 알지 않습니까. 태국 국민들이 보기에는 국부를 해외로 빼돌리는 투기꾼일 뿐입니다.”
나는 리레이에게 혹시 있을지 모를 상황을 설명했다.
태국은 외환 위기에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그 외환 위기를 통해 국제적인 투기 세력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탁신이 창당 2년 만에 집권한 것은 이런 태국 국민의 감정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탁신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솜키드 교수가 나를 만다는 것은 자칫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장관님께도 그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잘 설명해 주십시오.”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네요. 에드릭 씨의 식견이라면 솜키드 장관님이나 태국에 큰 도움이 될 텐데요.”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네요. 저는 그냥 투기꾼일 뿐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리레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전화 통화를 들어 보니 태국에 투자하신 것 같던데······. 실례가 안 된다면 얼마나 투자하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상식을 벗어난 질문이었다.
투자자에게 자신의 지갑을 보여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나는 굳이 숨길 생각이 없었다.
리레이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투자 규모를 어느 정도는 밝힐 필요가 있었다.
“수요일부터 오늘까지 3일간 4,500만 달러 정도를 투자했습니다.”
액수에 놀란 듯 리레이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4,500만 달러요?”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한 번에 그 정도 자금을 동원하실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리레이는 놀란 표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리레이 씨도 주식을 조금 사 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은 기회인데요.”
리레이에게 주식 투자를 제안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되죠. 애초에 제 허락을 받을 일은 아니고요.”
리레이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탁신의 기업 주식 매입 지시를 내렸다.
“그사이에 7% 이상 올랐다네요.”
리레이가 말했다.
나로서는 좋은 소식이었다.
“그 정도라면 앞으로도 충분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2주 동안 15% 정도 떨어졌더군요. 그 당시 주가까지는 며칠 안에 회복될 겁니다.”
“그 후에도 계속 오를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리레이가 물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단기간에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무리 탁신이라도 해도 바로 자신이 소유한 기업에 특혜를 줄 수는 없을 테니까요. 물론 장기적으로 탁신이 총리로 있는 이상 오르겠지만요.”
“예전 주가 수준을 회복하면 바로 팔아야겠군요.”
“2년에서 3년 이상 보유할 생각이면 계속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탁신이 대놓고 특혜를 주지 않더라도 밑에서 알아서 챙길 테니까요.”
탁신이 기업을 세우고 10년 만에 태국 최고 부호가 된 과정에는 정경 유착이 있었다.
정경 유착으로 재산을 모은 탁신이 총리가 됐다고 갑자기 그런 깨끗한 정치인이 될 리가 없었다.
“이번에 투자한 돈은 회사 운영자금입니다. 그렇게까지 묶어 둘 여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제 제가 이야기한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리레이가 물었다.
3.
나는 리레이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기 난감했다.
어제 리레이는 나에게 태국의 사업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계획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다.
어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많이 놀랐다.
태국에서 그는 재무부장관이나 자동차 부품 업계의 거물과의 인맥이 있었다.
자동차 부품 공장을 하는 리레이로서는 어느 정도 성공은 보장된 셈이었다.
그런데 만족하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하다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리레이의 야망이 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리레이는 태국 정부 고위층과 연결할 수 있는 통로였다.
내가 태국 재무부장관의 초대를 거절한 것도, 굳이 내가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리레이를 통해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중국으로 돌아가겠다니······.
리레이를 포섭하기 위해서 별 수익도 나지 않는 동생의 여행사에 투자까지 했는데 이건 무슨 날벼락이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리레이의 계획을 무조건 반대할 수도 없었다.
당장 이익을 위해서 리레이의 중국 귀국을 반대했다가는 몇 년 안에 리레이의 신뢰를 잃을 수 있었다.
중국의 자동차 시장은 태국의 자동차 시장보다 훨씬 전망이 밝았다.
아마 몇 년 안에 중국은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이 될 것이다.
어떻게 리레이를 태국에 계속 머물게 하면서 장기적으로도 이익이 되는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다행히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조금 생각해 봤는데······. 바로 중국에 회사를 옮기는 것보다 태국의 사업은 그대로 두고 따로 중국에 회사를 세우는 것은 낫지 않겠습니까?”
리레이의 눈에 놀란 기색이 비치더니 잠시 후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회사가 아직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다행히도 이제 겨우 태국에서도 자리를 잡은 상태라서요. 태국의 회사를 팔아야 중국에 돌아가서도 사업을 시작할 자금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태국 회사는 인수할 사람이 있는 겁니까?”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얼마 전 자동차 부품 하나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덕분에 인수자를 찾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당장은 납품은 어려워도 장기적으로는 전망이 있으니까요.”
리레이는 꽤 자신이 있는 표정이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중국에 진출할 때 도와줄 투자자를 소개해 드리죠. 그 투자자들의 인맥이라면 중국에서 자리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좋겠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대규모로 시작할 생각이 아니라면 여기서 회사를 정리하고 중국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 나을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투자자는 리안과 장샤오이였다.
정말로 리레이의 회사에서 개발한 부품이 경쟁력이 있다면 리안이나 장샤오이에게도 도움이 되는 제안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 조금 검토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리레이가 일단 한발 물러섰다.
아마도 중국에 진출하는 것도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다른 사람의 투자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했다.
“그럼 생각해 보시고 나중에 홍콩의 회사로 연락해 주십시오.”
나는 리레이에게 내 제안을 강요하지 않았다.
나로서는 그가 태국에 그대로 남아도 좋고 투자를 받아서 중국에 진출해도 좋았다.
더구나 아직 리안과 장샤오이에게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리안이나 장샤오이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니 거절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정 안되면 내 투자금을 리안이나 장샤오이를 통해서 투자해도 됐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제안이라도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서두를 필요도 없지만 설사 리레이가 받아들였다고 해도 당장 추진할 여유가 없었다.
내 신경은 온통 한국에 쏠려 있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가야 했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과일을 먹으려면 나무에 올라야 한다.
내가 하려는 일은 한국에 가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